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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다시 태어나다

  • 청산 시.
  • 어느 병원의 허름한 병실에서.
  • “내 딸이 뇌진탕을 앓고 있는데 학교에서 치료비라 주는 돈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고요? 만약 후유증이 생겨서 글을 못 읽는 바보가 되면 인생이 끝나는데, 그 비용은 누가 부담하나요? 오늘 돈 충분히 주지 않으면 잔말 말고 경찰서에서 만나시죠.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세상에 다 알려서 망신 제대로 당하게 할 겁니다.”
  • “아리 어머님, 합리적으로 생각하세요, 아리양은 항상 선생님의 감시를 받아야 하는 유치원생이 아니잖아요? 게다가 아리가 너무 뚱뚱해서 계단에서 떨어졌고, 책임은 모두 아리 자신에게 있어요. 그래도 치료비 절반을 지불해 주겠다는 건 학교에서 해드릴 수 있는 가장 친절하고 의로운 행동입니다.”
  • “그리고 아리양은 성적이 좋지 않을뿐더러 다른 학생들의 공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며칠 전 저를 찾아온 한 학생의 말에 따르면 이젠 연애까지 한다고 하더라고요. 다른 반 남학생 찾아가서 아침밥 챙겨주고 하는데 이건 매우 심각한 행위예요. 남학생 부모까지 찾아왔었어요.”
  • 박정희는 허리에 손을 올려두고는 한 발의 물러섬도 없었다.
  • “말이 많으시네요. 그냥 돈 안 내겠다는 거잖아요?”
  • 병실에서 이들은 얼굴이 붉어지도록 다퉜다.
  • 이때, 차가운 목소리가 병실 안에서 울렸다.
  • “조용히 해!”
  • 서로 논쟁을 벌이던 박정희 부부와 담임 선생님, 그리고 교장은 동시에 침묵을 지키며 병상에 누워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 마샤는 아픈 머리를 만지며 병상에서 일어났고 얇은 병상은 그녀의 움직임에 의해 삐걱거렸다. 극심한 통증이 뒤통수에서 온몸으로 퍼져나가자, 그녀는 몸을 움츠려 빠르게 이 통증에 적응했다.
  • 그러나 이때 뭔가가 잘못됐음을 느낀 마샤. 그녀는 동작을 멈추고 눈을 떴다.
  • 안 죽었어?
  • 빠르게 병실을 스캔하는 마샤. 그녀의 시선은 자신을 향한 평범한 네 사람에게 떨어졌다.
  • “당신들 누구야?”
  •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걸 느낀 마샤는 멈칫했다. 목을 만지려 손을 들었으나 엄청나게 두꺼운 팔 때문에 놀라 동작을 멈췄다.
  • 어떻게 된 거야?
  • 마샤는 눈썹을 찌푸리며 상황을 이해하려 했다.
  • 그녀의 질문에 네 사람은 모두 얼어붙었다.
  • 박정희는 곧바로 담임 선생님에게 달려들어 소란을 피웠다.
  • “내 딸이 어떻게 됐는지 봐요, 학교에서 치료비도 안 내주고, 당신은 정말 비인간적이고 흑심을 품고 있어요.”
  • 짙은 안경을 쓴 마흔이 넘은 담임 선생님도 당황하며 말했다.
  • “아리 어머님, 진정하세요.”
  • “아리야, 나 아빠야. 못 알아보겠니?”
  • “아리 학생, 아직 정신을 온전히 못 차린 거죠? 잘 봐요. 우리가 누군지 모르겠나요?”
  • 그러나 소녀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자신의 두꺼운 팔만 쳐다봤다.
  • 이때 TV에서는 뉴스 속보가 흘러나왔다.
  • “오늘 아침 7시 10분에 아즈라 해의 외딴섬에서 큰 폭발이 발생했습니다...”
  • 그녀는 충혈된 눈으로 TV를 바라보았다.
  • 반응할 틈도 없이 갑자기 바닷물이 밀려오듯 자신의 것이 아닌 기억이 밀려와 이마를 찌푸렸다.
  • 그러나 주위 환경이 너무 시끄러웠다. 박정희는 담임 선생님과 돈 문제로 끊임없이 다퉜고, 자기 아버지라고 자칭한 사람과 교장 선생님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귀에 대고 질문을 퍼부었다. 결국 그녀는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두통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 “다 나가.”
  • “다들 그만 싸우세요. 아리가 방금 깼으니 편히 쉬게 하고 우리는 나가서 얘기해요.”
  • 아버지라고 한 남자는 끝없이 돈 달라는 여자를 데리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 병실은 마침내 조용해졌고, 마샤는 소독 냄새를 맡으며 평정심을 되찾았다.
  • 바깥 복도에서는 박정희의 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마샤는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에 비친 낯선 얼굴을 10분 넘게 바라보았다. 얼굴은 꽤 괜찮게 생겼다. 이목구비도 뚜렷하고. 몸은 좀 뚱뚱하지만 얼굴에는 살이 많지 않고 피부는 하얗고 윤기가 있다.
  • 살만 빼면 꽤 예쁠 것 같다.
  • “임아리라...”
  • 한참을 거울만 보던 마샤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 영혼의 환생인가?
  • 이미 이상하고 기이한 일들을 많이 봐왔기에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았다. 10분밖에 서 있지 않았는데 몸이 허한 게 느껴졌다. 이건 머리가 다쳐서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운동을 너무 안 해서 생긴 증상이다.
  • 몸집은 되게 크면서 어쩜 이렇게 허한지 마샤는 의문이 들었다. 힘들게 훈련한 강철 같은 몸은 이미 바닷속 물고기들의 밥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안타까웠다.
  • 마샤는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받아들였다.
  • 임아리... 이마리... 마리...
  • 꽤 괜찮다.
  • 적어도 마샤보다는 훨씬 사람 같은 이름이니.
  • 병실로 돌아오자 복도는 이미 조용했고, 의사가 진료 기록을 들고 들어오며 상황을 확인했다.
  • “임아리 양?”
  • “네.”
  • 임아리는 맑은 눈을 예쁘게 뜨며 답했다.
  • 서원 시, 정 씨 가문.
  • 고급스러우면서 그다지 호화롭지 않게 꾸며진 서재에서 한 남자는 책상 앞에 파일을 놓고 의자에 앉아 있다.
  • “안타깝군.”
  • 남자는 자신의 희망이 좌절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낮은 목소리로 표현했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는 말을 마저 이어갔다.
  • “천재가 이렇게 몰락하다니.”
  • 시선이 파일에 떨어졌고, 프로필에 적힌 이름은 마샤였다.
  •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천재 킬러, 수많은 사람은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조차 모르지만 이 남자의 눈 앞에는 그녀의 정보가 적힌 파일이 한가득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다.
  • 임아리는 하룻밤만 병실에 누워 있다가 다음 날 아침 일찍 박정희로부터 집에 가라는 재촉을 받았다.
  • “빨리 옷 갈아입고 집에 가. 학교에서 돈을 그렇게 많이 보상해 주지 않았거든.”
  • 박정희는 가져온 옷을 임아리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 임아리의 눈빛은 차가웠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고 계속 침대에 앉아 있었다.
  • “얼른 가서 갈아입어! 나 이따 출근해야 해. 지각하면 월급 깎는단 말이야.”
  • 입만 열면 돈, 돈, 돈.
  • 그래도 이 몸 덕분에 새로운 삶을 얻게 됐으니 마샤는 참기로 했다.
  • 병원에서 나가자마자 박정희는 임아리를 내팽개쳤다. 버스비와 집 열쇠를 쥐여주고는 출근하러 갔다.
  • 이 몸의 기억에 따라 임아리는 집을 찾아갔다. 이때, 입구에서 잘생긴 소년을 발견했다.
  • 소년은 파란색과 흰색 교복을 입고 활기차고 약간 마른 체격에 평소에 말을 많이 할 것 같지 않은 인상을 주었다.
  • 박정희는 성격은 모가 났지만 예뻤기에 교만하고 부자가 되고 싶은 심리를 조성했다. 눈앞에 서 있는 소년은 박정희의 유전자를 아주 잘 물려받았다.
  • 소년은 그녀를 보자마자 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녀의 머리를 감싸고 있는 붕대를 힐끗 쳐다보았다.
  • 임아리 역시 걸음을 멈춰 소년을 바라보았다.
  • 평소의 임아리라면 사람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데 과감히 시선을 맞춘 그녀의 행동에 소년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임아리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이 소년은 왼발을 절뚝이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
  • 임지호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나가면서 그녀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고는 가방을 메고 학교로 향했다.
  • 임아리는 쥐여준 만두를 바라보았다.
  • 그래도 엄마의 모가 난 성격을 물려받지 않은 동생인 듯싶다.
  • 뇌진탕은 작은 문제가 아니라며 의사는 퇴원을 동의하지 않았지만, 박정희는 돈이 아까웠기에 의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퇴원 수속을 밟아버렸다. 그래서 임아리는 아직 회복 중이라 집 가자마자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누워 잤다.
  • “돼지 새끼, 전생에 돼지였나? 먹고 잠만 처자고. 그냥 계단에서 굴러 죽지 그랬어.”
  • 눈을 뜨자마자 임예봄이 혐오와 증오가 가득 찬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봤다.
  • “뭘 봐? 깼으면 일어나서 밥 먹어. 내가 이 얘기를 해주러 이 방에 들어오다니, 진짜 토 나오네.”
  • 임예봄은 말을 끝낸 다음 재빠르게 임아리의 방에서 나갔다.
  • 이 성깔은 지 엄마와 똑 닮았다.
  • 임아리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집안 식구들이 정상이 아닌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동생이라는 임예봄은 그동안 이 몸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기억을 통해 알 수 있다.
  • 나이는 어리면서 하는 짓은 다 깡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