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이 뇌진탕을 앓고 있는데 학교에서 치료비라 주는 돈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고요? 만약 후유증이 생겨서 글을 못 읽는 바보가 되면 인생이 끝나는데, 그 비용은 누가 부담하나요? 오늘 돈 충분히 주지 않으면 잔말 말고 경찰서에서 만나시죠.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세상에 다 알려서 망신 제대로 당하게 할 겁니다.”
“아리 어머님, 합리적으로 생각하세요, 아리양은 항상 선생님의 감시를 받아야 하는 유치원생이 아니잖아요? 게다가 아리가 너무 뚱뚱해서 계단에서 떨어졌고, 책임은 모두 아리 자신에게 있어요. 그래도 치료비 절반을 지불해 주겠다는 건 학교에서 해드릴 수 있는 가장 친절하고 의로운 행동입니다.”
“그리고 아리양은 성적이 좋지 않을뿐더러 다른 학생들의 공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며칠 전 저를 찾아온 한 학생의 말에 따르면 이젠 연애까지 한다고 하더라고요. 다른 반 남학생 찾아가서 아침밥 챙겨주고 하는데 이건 매우 심각한 행위예요. 남학생 부모까지 찾아왔었어요.”
박정희는 허리에 손을 올려두고는 한 발의 물러섬도 없었다.
“말이 많으시네요. 그냥 돈 안 내겠다는 거잖아요?”
병실에서 이들은 얼굴이 붉어지도록 다퉜다.
이때, 차가운 목소리가 병실 안에서 울렸다.
“조용히 해!”
서로 논쟁을 벌이던 박정희 부부와 담임 선생님, 그리고 교장은 동시에 침묵을 지키며 병상에 누워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마샤는 아픈 머리를 만지며 병상에서 일어났고 얇은 병상은 그녀의 움직임에 의해 삐걱거렸다. 극심한 통증이 뒤통수에서 온몸으로 퍼져나가자, 그녀는 몸을 움츠려 빠르게 이 통증에 적응했다.
그러나 이때 뭔가가 잘못됐음을 느낀 마샤. 그녀는 동작을 멈추고 눈을 떴다.
안 죽었어?
빠르게 병실을 스캔하는 마샤. 그녀의 시선은 자신을 향한 평범한 네 사람에게 떨어졌다.
“당신들 누구야?”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걸 느낀 마샤는 멈칫했다. 목을 만지려 손을 들었으나 엄청나게 두꺼운 팔 때문에 놀라 동작을 멈췄다.
어떻게 된 거야?
마샤는 눈썹을 찌푸리며 상황을 이해하려 했다.
그녀의 질문에 네 사람은 모두 얼어붙었다.
박정희는 곧바로 담임 선생님에게 달려들어 소란을 피웠다.
“내 딸이 어떻게 됐는지 봐요, 학교에서 치료비도 안 내주고, 당신은 정말 비인간적이고 흑심을 품고 있어요.”
짙은 안경을 쓴 마흔이 넘은 담임 선생님도 당황하며 말했다.
“아리 어머님, 진정하세요.”
“아리야, 나 아빠야. 못 알아보겠니?”
“아리 학생, 아직 정신을 온전히 못 차린 거죠? 잘 봐요. 우리가 누군지 모르겠나요?”
그러나 소녀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자신의 두꺼운 팔만 쳐다봤다.
이때 TV에서는 뉴스 속보가 흘러나왔다.
“오늘 아침 7시 10분에 아즈라 해의 외딴섬에서 큰 폭발이 발생했습니다...”
그녀는 충혈된 눈으로 TV를 바라보았다.
반응할 틈도 없이 갑자기 바닷물이 밀려오듯 자신의 것이 아닌 기억이 밀려와 이마를 찌푸렸다.
그러나 주위 환경이 너무 시끄러웠다. 박정희는 담임 선생님과 돈 문제로 끊임없이 다퉜고, 자기 아버지라고 자칭한 사람과 교장 선생님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귀에 대고 질문을 퍼부었다. 결국 그녀는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두통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다 나가.”
“다들 그만 싸우세요. 아리가 방금 깼으니 편히 쉬게 하고 우리는 나가서 얘기해요.”
아버지라고 한 남자는 끝없이 돈 달라는 여자를 데리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병실은 마침내 조용해졌고, 마샤는 소독 냄새를 맡으며 평정심을 되찾았다.
바깥 복도에서는 박정희의 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샤는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에 비친 낯선 얼굴을 10분 넘게 바라보았다. 얼굴은 꽤 괜찮게 생겼다. 이목구비도 뚜렷하고. 몸은 좀 뚱뚱하지만 얼굴에는 살이 많지 않고 피부는 하얗고 윤기가 있다.
살만 빼면 꽤 예쁠 것 같다.
“임아리라...”
한참을 거울만 보던 마샤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영혼의 환생인가?
이미 이상하고 기이한 일들을 많이 봐왔기에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았다. 10분밖에 서 있지 않았는데 몸이 허한 게 느껴졌다. 이건 머리가 다쳐서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운동을 너무 안 해서 생긴 증상이다.
몸집은 되게 크면서 어쩜 이렇게 허한지 마샤는 의문이 들었다. 힘들게 훈련한 강철 같은 몸은 이미 바닷속 물고기들의 밥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안타까웠다.
마샤는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받아들였다.
임아리... 이마리... 마리...
꽤 괜찮다.
적어도 마샤보다는 훨씬 사람 같은 이름이니.
병실로 돌아오자 복도는 이미 조용했고, 의사가 진료 기록을 들고 들어오며 상황을 확인했다.
“임아리 양?”
“네.”
임아리는 맑은 눈을 예쁘게 뜨며 답했다.
서원 시, 정 씨 가문.
고급스러우면서 그다지 호화롭지 않게 꾸며진 서재에서 한 남자는 책상 앞에 파일을 놓고 의자에 앉아 있다.
“안타깝군.”
남자는 자신의 희망이 좌절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낮은 목소리로 표현했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는 말을 마저 이어갔다.
“천재가 이렇게 몰락하다니.”
시선이 파일에 떨어졌고, 프로필에 적힌 이름은 마샤였다.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천재 킬러, 수많은 사람은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조차 모르지만 이 남자의 눈 앞에는 그녀의 정보가 적힌 파일이 한가득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다.
임아리는 하룻밤만 병실에 누워 있다가 다음 날 아침 일찍 박정희로부터 집에 가라는 재촉을 받았다.
“빨리 옷 갈아입고 집에 가. 학교에서 돈을 그렇게 많이 보상해 주지 않았거든.”
박정희는 가져온 옷을 임아리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임아리의 눈빛은 차가웠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고 계속 침대에 앉아 있었다.
“얼른 가서 갈아입어! 나 이따 출근해야 해. 지각하면 월급 깎는단 말이야.”
입만 열면 돈, 돈, 돈.
그래도 이 몸 덕분에 새로운 삶을 얻게 됐으니 마샤는 참기로 했다.
병원에서 나가자마자 박정희는 임아리를 내팽개쳤다. 버스비와 집 열쇠를 쥐여주고는 출근하러 갔다.
이 몸의 기억에 따라 임아리는 집을 찾아갔다. 이때, 입구에서 잘생긴 소년을 발견했다.
소년은 파란색과 흰색 교복을 입고 활기차고 약간 마른 체격에 평소에 말을 많이 할 것 같지 않은 인상을 주었다.
박정희는 성격은 모가 났지만 예뻤기에 교만하고 부자가 되고 싶은 심리를 조성했다. 눈앞에 서 있는 소년은 박정희의 유전자를 아주 잘 물려받았다.
소년은 그녀를 보자마자 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녀의 머리를 감싸고 있는 붕대를 힐끗 쳐다보았다.
임아리 역시 걸음을 멈춰 소년을 바라보았다.
평소의 임아리라면 사람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데 과감히 시선을 맞춘 그녀의 행동에 소년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임아리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이 소년은 왼발을 절뚝이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
임지호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나가면서 그녀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고는 가방을 메고 학교로 향했다.
임아리는 쥐여준 만두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엄마의 모가 난 성격을 물려받지 않은 동생인 듯싶다.
뇌진탕은 작은 문제가 아니라며 의사는 퇴원을 동의하지 않았지만, 박정희는 돈이 아까웠기에 의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퇴원 수속을 밟아버렸다. 그래서 임아리는 아직 회복 중이라 집 가자마자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누워 잤다.
“돼지 새끼, 전생에 돼지였나? 먹고 잠만 처자고. 그냥 계단에서 굴러 죽지 그랬어.”
눈을 뜨자마자 임예봄이 혐오와 증오가 가득 찬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봤다.
“뭘 봐? 깼으면 일어나서 밥 먹어. 내가 이 얘기를 해주러 이 방에 들어오다니, 진짜 토 나오네.”
임예봄은 말을 끝낸 다음 재빠르게 임아리의 방에서 나갔다.
이 성깔은 지 엄마와 똑 닮았다.
임아리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집안 식구들이 정상이 아닌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동생이라는 임예봄은 그동안 이 몸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기억을 통해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