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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겁나 똑똑해

  • 임아리는 방에서 나왔다.
  • “아리야, 이리 와서 먹어.”
  • 아버지는 임아리 앞에 접시랑 젓가락을 갖다 놓으며 말했다.
  • 집이라고 하기에는 안락함을 일도 찾을 수 없는 분위기다. 사방이 벽이고 가치 있는 물건은 하나도 찾을 수 없으며 먼지가 가득 쌓인 전구는 희미한 빛을 내뿜었다.
  • 다섯 식구가 작은 테이블에 옹기종기 둘러앉았다. 임지호는 묵묵히 밥을 먹다가 임아리가 오니까 조용히 의자를 옆으로 옮겨 뚱뚱한 임아리에게 공간을 더 주고 자기는 식탁 끝에 앉았다.
  • “푹 자고 나니 훨씬 낫지? 얼른 먹어.”
  • 아버지는 임아리의 그릇에 고기를 집어넣으며 말했다.
  •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병원에 이틀 더 입원할 돈이 없으니 일찍 퇴원 수속을 밟을 수밖에 없었어. 집에서 쉬다가 몸이 회복되면 그때 학교에 가. 내일 아빠가 몸보신을 위해 닭죽 해줄게.”
  • “성적이 형편없으니 학교에 안 가도 상관없을걸? 선생님은 차라리 안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할지도.”
  • 임예봄은 비꼬는 말투로 비웃었다.
  • “임예봄! 아리는 네 언니야! 버르장머리 없이!”
  • 아버지는 임예봄의 말투에 화를 냈다.
  • “왜 그렇게 사납게 굴어요? 예봄이가 뭘 잘못했다고? 이 돼지 년의 머리에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르겠네. 시험 성적이 10점, 5점 이러는데 내가 얘 때문에 얼마나 부끄러운지 알기는 해요? 무슨 연애까지 한다더라 이제는? 어린 나이에.”
  • 박정희는 말하면 할수록 점점 더 화가 났다. 임아리에게 화를 내기 시작하니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아 목표를 아버지에게로 옮겼다.
  • “당신 친척들이 나를 어떻게 비웃는지 알아요? 내가 어쩌다 이렇게 쓸모없는 인간이랑 결혼한 건지. 당신 형제들, 다 가난했었어. 근데 이젠 다들 잘 살잖아! 우리만 아직도 이렇게 낡은 집에 살고 있다고! 당신 형제들이 갖다 버린 냉장고 TV나 주워 오면서 살고 있다고! 당신이 조금만 더 노력했더라면 당신 아들은 발을 절뚝이지 않았을 텐데. 내가 장님이었지 뭐, 당신이랑 결혼한 건 내 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선택이야!”
  • 아내의 불평에 아버지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술잔만 꽉 쥐었다. 과로로 인해 또래보다 훨씬 늙어버린 그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붉어졌다.
  • 임지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조용히 밥을 먹었으나 발을 절뚝인다는 말을 듣게 되었을 때는 젓가락을 더 꽉 움켜쥐었다.
  • “엄마 아빠가 너 때문에 이렇게 싸우는데 언니라는 사람은 TV나 보고 있고 말이야. 정말이지 내 언니인 게 부끄러워 죽겠어.”
  • 임예봄은 계속해서 불에 기름을 끼얹는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역시나 이 말을 들은 박정희는 화를 내며 임아리를 원망에 가까운 칼날 같은 눈빛으로 노려봤다.
  • 하지만 임아리는 무표정하게 TV에서 시선을 옮겨 임예봄을 바라보았다.
  • 그 시선은 매우 차가웠다.
  • “왜 째려봐! 사실이잖아.”
  • 임예봄은 임아리가 병원에서 돌아온 후 조금 이상해졌다고 느꼈다. 예전 같았으면 고개를 숙이고 목을 움츠렸을 텐데 오늘은 감히 눈을 마주치다니.
  • 그것도 뚫어지게.
  • “야! 어디서 감히 네 여동생을 흘겨 봐! 얼른 밥 먹고 설거지나 해! 보기만 해도 화가 나네.”
  • 박정희는 임아리를 꾸짖으며 밥그릇을 집어 들었다.
  • 임아리의 시선은 박정희를 스쳐 지나갔다. 지금은 이런 사사로운 것들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 그녀는 다시 TV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 TV는 몇 년 동안 사용했는지 모르겠을 만큼 매우 낡았고 오래전에 폐지된 모델이었다. TV에서는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아즈라 해의 대폭발.
  • 임아리의 눈동자 아래에는 섬광 같은 차가움이 번쩍였다.
  • 흑룡, 내가 조만간 복수하러 찾아간다.
  • 임아리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 “어머, 오늘은 왜 이렇게 적게 먹어? 보통 세 그릇은 먹어야 배부르면서?”
  • 임예봄은 임아리의 그릇을 흘겨보며 조롱했다.
  •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설거지부터 해.”
  • 박정희는 임아리에게 한 마디 던졌다.
  • “아리는 사고 당한 아이야. 설거지를 시키면 안 되지. 예봄이랑 지호가 씻어.”
  •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 “난 할 줄 몰라요.”
  • 임예봄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머리를 다쳤지 손이 다친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설거지는 항상 해왔던 일이기도 하고.”
  • “예봄이랑 지호는 숙제하러 가야 된다고. 성적 떨어지면 어쩌려고요? 새해 때마다 친척들은 차 자랑에 집 자랑하는데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건 예봄이와 지호의 성적뿐이라고요.”
  • 박정희는 빈정 상한 말투로 임아리에게 설거지하라고 재촉했다.
  • 임아리는 고개를 돌려 박정희를 조용히 응시했다. 무언가를 억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 마샤는 좋은 성격이 못된다. 그녀의 무자비함에 대한 소문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박정희와 임예봄이 한 마디만 더 지껄이면 분명 마샤는 참지 못하고 뭔가를 저지를 게 뻔하다.
  • 이때, 임지호는 밥 다 먹고 묵묵히 그릇과 젓가락을 치우기 시작했다.
  • “내려놔! 네가 왜 씻어? 방에 가서 숙제나 해!”
  • 평소의 집안일은 다 임아리가 도맡아서 했다. 그렇게 힘들게 집안일을 했기에 밥을 그만큼 많이 먹었다.
  • 임지호는 박정희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설거지하러 주방에 들어갔다.
  • 임예봄은 이 상황이 영 맘에 들지 않았지만 동생을 말리고 싶지는 않아 방에 들어갔다. 한마디만 더 했으면 자기의 “목숨”이 날아갈 뻔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 박정희는 임아리를 노려보고는 주방에 가서 아들을 방으로 내쫓고 자기가 설거지하기 시작했다.
  • 하루 푹 자니 몸 상태가 많이 좋아진 임아리는 정원으로 나가 집 상태를 확인해 봤다.
  • 이 낡은 집은 조상이 물려준 재산이다. 많이 낡기는 했지만 정원도 있고 담벼락에 단독 주방까지 있다. 정원에는 월계수 나무가 심겨있다.
  • 방이 유독 많았다. 집안 식구들이 다 같이 살았지만 친척들은 돈을 벌어 이사 갔고 다섯 명만 남았다. 임지호는 주방에서 나오면서 임아리와 마주쳤다. 서로 바라보다 임지호는 발을 절뚝이며 방으로 돌아갔다.
  • 임아리는 그의 뒤를 따랐다.
  • 임지호는 어제 인터넷에서 베껴온 수학 문제를 꺼내 책상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 따가운 시선을 느낀 그는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봤고 임아리가 문에 기대 팔을 안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 뚱뚱한 몸은 문 전체를 딱 가렸다.
  • 처음이다. 임아리가 자기 방에 들어온 건. 예전 같으면 학교에서 오자마자 바로 방에 들어가 있을 텐데 오늘의 임아리는 뭔가가 달라 보였다.
  • 임아리는 그 수학 문제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눈썹을 치켜들고 물었다.
  • “할 줄 몰라?”
  • “......”
  • 임지호가 반응하기도 전에 임아리는 펜을 가져와 고민도 하지 않고 공책에 풀이를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 완벽하게!
  • 풀이 과정까지 적어놨기에 임지호는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흥분한 목소리와 깜짝 놀란 눈빛으로 말을 더듬었다.
  • “어떻게 할 줄 알아?”
  • 동생이 자기에게 건넨 첫 말이 이거라니.
  • “이 문제는 손만 있으면 다 풀 수 있는 거 아니었어?”
  • 임아리는 진지하게 답했다.
  • “이건 인터넷에서 베껴온 대학교 문제인데?”
  • 임지호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으로 임아리와 임예봄보다 한 살 어리다.
  • “그래서?”
  • “평소에 5점 10점만 맞으면서? 제일 높을 때는 25점이었나? 수학 객관식 문제는 ABCD만 고르줄 알고 나머지는 다 비워두면서...”
  • 어떻게 이 문제를 풀 수 있을까?
  • 임지호는 의심의 눈초리로 평소와 확연히 다른 임아리를 쳐다봤다.
  • 이 몸의 기억을 이미 읽은 마샤는 이 몸이 얼마나 바보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고민도 하지 않고 답했다.
  • “풀 가치도 없는 문제들이었어. 시간 낭비만 할 뿐이지. 내가 뭐 하러 그런 걸 해?”
  • “그동안 다 척이었다고?”
  • 임지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