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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호된 교훈

  • 임아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이, 이 문제도 풀어 봐.”
  • 임지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또 어려운 문제를 골라 임아리한테 풀어보라고 했다.
  • 문제를 대충 훑어보던 임아리는 침묵하더니 펜을 움직이지 않았다.
  • 그런 임아리의 모습을 지켜보던 임지호는 입을 삐죽하며 방금 그 문제도 그의 풀이집을 보고 인터넷에서 답을 검색한 것이라 여겼다.
  • ‘저렇게까지 하고 싶을까! 그 머리로 용케도 어려운 풀이 과정을 다 기억했네.’
  • 임지호는 숙제 방해하지 말고 그녀에게 그만 방으로 돌아가라고 얘기하려던 찰나 임아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곡면의 방정식은 z=x2+y2야.”
  • “뭐?”
  • “답 말이야.”
  • 임지호는 2초간 멍하니 있다가 반신반의하며 인터넷으로 답을 찾아보다가 임아리가 얘기한 답과 똑같은 것을 보고 멍해지고 말았다.
  • 그리고 그 아래 두 페이지 반이나 되는 풀이 과정을 보고 엄마나 둘째 누나한테 10년 넘게 바보 소리를 들은 등신 누나를 괴물 보듯 쳐다보았다.
  • ‘속으로 이걸 풀었단 얘기야? 무슨 이런 괴물 같은 인간이 다 있지?’
  • “또 모르는 문제 있어?”
  • 임아리는 충격받은 듯한 그의 표정이 웃겼다.
  • 이 집구석에서 그나마 남동생만이 유일하게 마음에 들었다.
  • 한참이 지나도 임지호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기가 막혔지만 그래도 이성의 끈을 붙잡고 물었다.
  • “하, 할 줄 알면서 시험은 왜 그따위로 봤는데?”
  • “쓰기 귀찮아서.”
  • 임아리는 대충 아무 핑계나 댔다.
  • “그럼 언제까지 귀찮아할 건데? 수능도 귀찮아?”
  • “그건 아니지.”
  • 마샤는 무수한 영광을 등에 업고 전설 속의 신화로 불리는 존재인데, 언제 이런 억울함과 혐오의 시선을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 어떤 신분이든, 팔다리가 없는 쓸모없는 존재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녀를 우러러보고 복종할 뿐이었다.
  • 그녀는 오직 가장 높은 곳에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존재여야만 했다.
  • 10여 년 동안 알고 지낸 등신 누나가 이 정도로 비상한 머리를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에 임지호는 한동안 적응하지 못했다.
  • 그러나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를 신뢰가 생기며 그녀가 ‘귀찮지 않을’ 때의 성적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 “무슨 생각 해?”
  • 임지호는 고개를 저으며 사탕을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 “저녁 적게 먹었잖아. 나중에 분명 배고플 테니까, 이거 먹어.”
  • 혼자 다니는 것에 익숙했던 마샤는 그의 손바닥에 있는 사탕을 바라보며 2초간 가만히 침묵을 지킨 후에야 사탕을 받았다.
  • “살 좀 빼는 게 좋겠어. 사람들이 누나에 대해 얼마나 심하게 떠들어 대는지 모르지? 그런 말 듣고도 괜찮아?”
  • 임아리는 손에 있는 사탕을 바라보며 남동생에게 약간의 호감이 생겼다.
  • “예전에는 귀찮아서 상대해 주지 않았는데, 계속 선 넘으면 나도 가만있지 않아. 나를 괴롭힌 인간들에게 반드시 복수할 거야.”
  • 임아리의 담담한 대답에 임지호는 그저 그녀가 머리를 다쳐서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 “난 방으로 갈게.”
  • 방을 나서기 전에 임아리는 임지호의 절뚝거리는 왼발을 한 번 쳐다보았다.
  • 그녀는 임지호의 발을 고칠 수 있었다.
  • 사탕을 먹으며 침대에 누운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거미줄로 가득한 천장을 바라보았다. 공기 중에도 수많은 미생물이 떠다녔다.
  • 몇 번의 어려운 미션을 제외하고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 머문 적이 없었다. 비록 킬러 출신이지만 늘 사치스러운 생활을 해왔고, 심지어 최고 부유층보다도 더 호화롭게 지냈다.
  • 머릿속에는 입만 열면 돈 얘기를 꺼내던 박정희가 떠올랐다.
  • 마샤는 어린 나이에 이름을 떨쳐 돈도 권력도 모두 손에 거머쥐었다. 그 어떤 신분이든 그에 따르는 재산은 한 나라를 살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 하지만 지금 그녀의 영혼은 이 몸에 갇혀서 신분도, 돈도 권력도 사용할 수 없을 뿐더러 돈도 찾을 수 없었다.
  • 그래도 상관없다. 그녀가 원한다면 언제든 손에 넣을 수 있으니까.
  • 임아리는 새로운 환경과 신분에 금방 적응했다. 집에서 이틀간 휴식을 취한 후, 학교에 갈 준비를 했다.
  • 새벽녘, 임아리는 아침 조깅을 위해 집을 나섰다.
  • 마샤는 새로운 모든 것을 참을 수 있었지만, 이 뒤룩뒤룩 살찐 몸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 행동이 불편한 것은 물론, 조금이라도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대처하기 힘들었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본래의 몸 상태로 회복해야만 했다.
  • 땀을 흠뻑 흘리고 돌아온 임아리는 지쳐서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 빠르게 샤워를 하고 교복으로 갈아입은 후 집을 나서자, 임지호가 책가방을 메고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 이 몸의 기억 속에서, 임지호가 학교 갈 때 그녀를 기다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가자.”
  • 마찬가지로 ‘처음’인 임지호는 다소 쑥스러운지 머뭇거리다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
  • 임아리가 이틀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임지호는 수학 문제를 들고 여러 번 그녀의 방을 드나들었다. 그리고 임아리의 변태적인 실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임지호는 귀찮았다는 그녀의 말을 철저히 믿게 되었다.
  • 임아리에게 이런 문제들은 식은 죽 먹기였다.
  •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눈으로 한 번 훑기만 해도 답을 알 수 있었다.
  • “이런 문제들은 괜히 시간과 잉크만 낭비했지, 풀이 과정을 적는 건 체면을 봐주는 거야.”
  • 임지호는 몇 번이고 이 사람이 자신의 누나가 맞는지 의심했다.
  • 역사상 한 번의 충격으로 천재가 된 사례가 있었던가?
  • 없다.
  • 하지만 해외에는 사교 활동과 수다스러운 배우자를 피하고자 수십 년 동안 벙어리인 척한 ‘달인’이 있었다.
  • 임지호는 그의 누나가 두 번째 경우에 해당한다고 생각했다.
  • 임지호는 임아리의 변태적인 지능에 완전히 굴복한 것 같다.
  • “아침 뭐 먹어? 나 돈 없어.”
  • 임아리가 물었다.
  • “엄마가 나한테… 아니 우리한테 1,000원 줬는데 만두나 사 먹자.”
  • 임지호는 주머니에서 1,000원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 “누나가 먹고 싶은 거 먹어도 돼.”
  • 임아리는 당연히 이 아침에 자신의 몫은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 “그냥 만두 먹지 뭐.”
  • “아침에 조깅했어?”
  • 임지호가 물었다.
  • “응, 다이어트하려고.”
  • “다이어트하면 분명 예쁠 거야.”
  • 그 말을 내뱉은 임지호는 쑥스러운지 고개를 돌렸다.
  • 임아리는 귀까지 빨개진 그의 모습에 입꼬리를 올렸다.
  • ‘귀여운 자식.’
  • 학교 정문에 들어서자,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교실로 향했다.
  • 청춘과 학구적인 분위기로 가득한 캠퍼스는 오랫동안 칼에 피를 묻히며 생사를 넘나들던 마샤에게는 낯선 장소였다.
  • 임아리가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원래 떠들썩하던 교실은 이상하게도 조용해지더니 모두가 일제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 그리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저 돼지가 이렇게 빨리 학교에 나오다니, 크게 다치진 않았나 보네.”
  • “너희들 어떻게 다쳤는지 알아? 계단을 내려오다가 우리 학교 인기남을 보고 너무 긴장했는지 발을 헛디뎌서 굴러떨어졌대.”
  • “나도 알아. 나도 그때 옆에 있었는데, 쿵 하는 소리가 나서 지진 난 줄 알았잖아. 풉.”
  • “나라면 쪽팔려서 학교에 못 나왔을 거야.”
  • “야, 우리 쪽을 쳐다보네. 넘어지고 나서 배짱이 커졌나 봐. 이젠 앞머리까지 올리고 우리랑 눈도 마주쳐.”
  • “그러게, 저 뚱땡이 전에는 몰랐는데 얼굴은 꽤 예쁘네.”
  • “밥맛 떨어지는 얘기 하지 마.”
  • 수군대는 소리가 점점 커지며 공개적인 조롱과 비웃음으로 변했다.
  • 임아리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 그 학생들은 어느 정도 이 몸을 괴롭혔던 자들이다.
  • ‘임아리, 네가 당한 일은 내가 대신 갚아줄게!’
  • 임아리는 자리에 앉아 악의적으로 낙서로 얼룩진 책상 위를 보며 싸늘한 눈빛으로 다시 한번 그들을 쳐다보았다.
  • 그녀의 시선을 마주한 사람들은 그 묘한 눈빛에 위축되어 점점 조용해지더니 이내 완전히 말이 뚝 끊겼다. 그리고 목덜미가 서늘해지고 숨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오늘의 임아리는 평소에 몸을 움츠리고 주눅 든 모습이 아니라는 점에 당혹감을 느꼈다.
  • 조용한 아침 자습이 시작되었다.
  • 악의적으로 찢긴 교과서를 꺼내든 임아리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 무사히 아침 자습을 마치고 임아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 칸 안에 있던 임아리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문을 열려고 했을 때, 이미 누군가가 밖에서 문을 막아버렸다.
  • 그녀가 안에 갇혀 비참해하는 상황을 상상하며 밖에 있던 몇 명은 웃음을 터뜨렸다.
  • “이 뚱땡이는 정말 기억력도 나쁘다니까. 아직도 학교 화장실에 들어올 생각을 하는 걸 보면 지난번에 겁을 덜 먹었나 봐.”
  • “빨리 물통 가져와.”
  • “가져왔어.”
  • 두 사람이 양손으로 물통을 들고 칸 안으로 물을 쏟아붓기 직전이었다.
  • 그 순간 문은 안에 있던 사람의 강한 발차기에 의해 벌컥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