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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사과할 줄 몰라?

  • 안에서 문을 걷어찬 탓에 두 여학생은 그대로 문에 부딪혔고, 높이 들어 올렸던 물통의 물을 본인들이 뒤집어쓰고 말았다.
  • “꺅!”
  • 고통스러운 비명과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철벅 이는 물소리가 화장실에 울려 퍼졌다.
  • 두 명의 여학생은 문에 부딪혀서 연달아 뒤로 물러났고, 뒤에서 구경하던 여학생들과 부딪혀 한데 엉켜서 물이 고여 있는 바닥에 넘어지며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 임아리는 느릿느릿 발끝으로 튕겨 돌아온 문을 다시 밀어 열고, 두 손은 교복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싸늘한 시선으로 물에 흠뻑 젖은 여학생들을 내려다보았다.
  • 그녀는 천천히 눈을 들어 유일하게 멀쩡한 염희주를 바라보았다.
  • 화장실에 들어와 이 광경을 목격한 임예봄은 칸막이 안에 있는 임아리를 보자마자 생각할 것도 없이 밖으로 도망쳤다.
  • 혹시라도 임아리랑 엮이게 되면 큰일 난다고 생각한 그녀는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빠르게 달아났다.
  • 모두가 그 등신 같은 뚱뚱한 돼지가 자신의 언니라는 것을 알게 될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 임아리는 도망가는 임예봄을 신경 쓰지 않고 칸막이에서 나와 바닥에 엎드려 있는 여학생들을 넘어 싸늘한 시선을 염희주한테 고정했다.
  • 염희주의 얼굴은 놀라서 약간 창백해졌다.
  • 그녀는 임아리를 괴롭히는 데 익숙해져 있었고, 임아리가 반항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이전의 그 나약하고 무능했던 임아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한 걸음씩 다가오는 임아리를 보자, 염희주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 그러다 문짝에 등이 닿게 되었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 “뭐, 뭐 하는… 짓이야?”
  •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아리의 주먹이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 “꺅!”
  • 염희주는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르며 눈을 꼭 감았지만, 예상했던 통증은 찾아오지 않았다.
  • 염희주가 의아해하며 눈을 뜨자, 임아리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고, 주먹은 바로 그녀의 귀 옆에 바짝 붙어 있었다.
  • 염희주가 아직 놀란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임아리의 차가운 경고가 들려왔다.
  • “다음번에도 이러면 오늘처럼 운 좋지는 않을 거야.”
  • 겁에 질려 멍해진 염희주를 보면서, 임아리는 이런 사람들과 싸우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는 모욕이라고 느꼈다.
  • 임아리는 손을 주머니에 넣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자리를 떠났다.
  • 염희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단단한 나무문에 선명하게 움푹 패인 자국과 그 주위로 퍼져 나간 수많은 미세한 균열을 보았다.
  •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정신을 차린 염희주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여학생들을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뒤늦게야 그 돼지한테 겁먹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 그리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 “임아리, 두고 보자!”
  • 임아리가 돌아가는 길에, 임지호가 그녀의 반 교실 밖 복도에서 뭔가를 찾는 듯한 초조한 표정으로 있다가 그녀를 보자마자 급히 다가왔다.
  • “누나.”
  • “무슨 일이야?”
  • “학생들이 화장실에서 괴롭혔다며?”
  • “그래서 무사한지 확인하러 왔어?”
  • 그의 묵인에 임아리는 알겠다는 표정으로 얘기했다.
  • “예전엔 그냥 귀찮아서 상대하지 않은 것뿐이라고 얘기했잖아.”
  • 다리를 절뚝이며 먼 거리에서 서둘러 계단을 오르내리며 달려온 남동생을 보니 임아리는 마음이 약해졌다.
  • 늘 말수가 적었던 그녀는 이번에는 조금 더 말을 이어갔고, 약간의 위로가 담긴 어조로 대답했다.
  • “나 괜찮아.”
  • “저 뚱땡이 남동생이야? 절름발이랑 뚱땡이, 이 가족은 유전자를 참 골고루 나눠 가졌네.”
  • 옆에서 던진 조롱 섞인 비아냥이 분위기를 망쳤다.
  • 임아리가 고개를 돌려 보니, 옆 반에서 두 남학생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중 한 명은 임아리가 생전에 짝사랑했던 서지훈이었다.
  • 임아리는 그들을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평가했다.
  • ‘저게 학교 킹카라고? 그나마 봐줄만한 외모이긴 하지만 임지호만큼 잘생기진 않았네.’
  • 임지호가 다리가 불편한 덕분에 서지훈이 운 좋게 킹카 자리를 꿰찬 것 같았다.
  • 임아리는 곧이어 방금 지껄인 한 남학생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 “본인은 뚱땡이에 남동생은 불구잔데, 저런 조건이면서 무슨 용기로 널 좋아하는 거야?”
  • 그 남학생이 서지훈에게 말했다.
  • 임아리의 관심을 받는 것 자체가 창피한 일인 듯 서지훈의 얼굴이 구겨지더니 그 남학생을 향해 한마디 했다.
  • “그만해.”
  • 서지훈의 기분이 상한 것을 보고 남학생은 입을 삐죽이더니 임지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 “이봐, 절름발이. 곧 수업 시작할 텐데 빨리 안 가면 늦을지도 몰라.”
  • 임지호의 하얀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고, 옆에 늘어진 손으로 주먹을 꽉 쥐고는 꾹 참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가자, 재미없어.”
  •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뚱뚱한 손이 그의 옷깃을 잡아 벽에 밀쳤다.
  • 등과 뒷머리가 벽에 부딪혀 밀려오는 고통에 남자는 비명을 질렀다.
  • 고개를 들어 보니, 임아리의 커다란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 “이 돼지가 맞고 싶냐? 빨리 이 손 놓지 못해?”
  • 마른 원숭이처럼 생긴 남자는 몇 번 몸부림 쳤지만 벗어나지 못하자 당황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 “사과할 줄 몰라? 얼른 사과해.”
  • 임아리가 입을 열었다.
  • “사과는 개뿔, 빨리 이 더러운 손이나 치워.”
  • “사과하라고 했잖아!”
  • 임아리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남학생은 임아리의 기세에 놀라 멍해졌고, 차갑게 번뜩이는 임아리의 눈빛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 “뭐 하는 거야, 얼른 그 손 풀어.”
  • 서지훈은 불쾌한 듯 임아리에게 말했다. 이 남학생 때문이 아니라면 임아리와 한마디도 섞고 싶지 않았다.
  • 남학생은 서지훈이 나서자, 곧 당황한 표정에서 비웃는 표정으로 바뀌면서 마치 서지훈의 한마디면 임아리는 고분고분 따라야 할 것이라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그러나 임아리는 서지훈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 “닥쳐,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 이 말에 모두가 놀랐다.
  • “너…”
  • 임아리가 자신에게 대들 줄 몰랐던 서지훈은 당황한 나머지 무안해지고 말았고, 순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 임지호는 놀란 표정으로 패기가 넘치는 임아리를 바라보았다.
  • “사과해!”
  • 임아리는 슬슬 인내심이 바닥을 보였다. 만약 여기가 학교가 아니라면 당장 주먹을 휘둘렀을 것이다.
  • 그녀가 손에 힘을 주자 남학생의 목이 조여지며 숨을 쉬기 어려웠고, 얼굴마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 복도에 구경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자, 남학생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지만, 무엇보다도 눈앞의 뚱뚱한 여자를 때려주고 싶었다.
  • 그러나 그는 전혀 벗어날 수 없었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 “미, 미안해.”
  • 임아리는 그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싸늘한 한마디를 던졌다.
  • “또다시 절름발이란 단어가 내 귀에 들어오면 너도 절름발이가 된 기분이 어떤지 똑같이 만들어 줄게.”
  • 그리고 나서 먼지를 털어내듯 비쩍 마른 남학생을 한쪽으로 내던졌다.
  • “꺼져.”
  • 남학생은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임아리를 노려보았지만, 섣불리 행동할 용기는 없었다.
  • 그때 종이 울리고 서지훈이 남학생에게 반으로 돌아가라고 말하자 남학생은 순순히 자리를 떠났다.
  • “멍하니 뭐 하고 있어, 종 치는 거 안 들려?”
  • 임아리는 멍청한 표정으로 제자리에 서 있는 임지호를 보고 웃음이 나왔다.
  • 임아리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임지호는 적응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 “서, 서지훈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 그의 누나가 서지훈을 짝사랑하며 쓴 연애편지가 공개되면서 망신을 당한 일은 모두가 알고 있었고, 임지호는 그때 본인이 다 창피했다.
  • 임아리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 “애초에 관심 없었어.”
  • 마침 반으로 들어가려던 서지훈이 그 말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