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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박시혁의 문신

  • 게다가 꽤 오래됐는지 색이 바란 것이 새로 한 문신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 만약 박가희 말이 사실이라면 그 0825는 그가 사랑하는 여자와 관련된 숫자일 것이다. 회사의 회장님이나 사모님, 그러니까 박시혁의 부모님의 생일은 모두 7월이었기 때문이다.
  • 물론 자신과는 더욱 상관없는 일이다.
  • 그녀의 생일은 11월 14일이니까 그 숫자와는 하나도 맞는 게 없었다.
  • 생각해 보면, 박시혁처럼 뼛속 깊이 냉철한 남자가 그런 유치할 정도의 문신을 할 정도라면 정말 상대방을 미치도록 사랑한다는 의미겠지.
  • 허청아는 순간 어젯밤에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에 후회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 ‘어제 왜 여자 친구가 있냐고 먼저 물어볼 생각을 못 했을까?’
  • 비록 박시혁이 외모도 출중하고 체격도 좋다지만, 다른 여자의 남자를 건드릴 정도로 도덕관념이 없는 여자는 아니었다.
  • “가희야, 너 혹시 박 대표님 주변 사람들 중에 누가 생일이 8월인지 알아?”
  •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우리 회사가 대산그룹의 계열이긴 하지만 이미 국내 시장의 70%를 점유하고 대규모 투자까지 하게 됐어. 그런데 박시혁은 그 대산그룹의 대표님인데 그런 분의 소식까지 내가 알 자격은 없다고 생각해.”
  • “……”
  • 알 자격이 없다고 말은 하지만 꽤 많은 소식을 알고 있는 것 같다.
  • 순간 박가희는 뭔가 떠오른 듯했다.
  • “잠깐, 대산그룹의 수석 변호사 하희진의 생일이 8월 달인 것 같아. 내가 그 여자 사진 본 적이 있는데 완전 엄친딸이야. 예전에 우리 박 대표님이랑 같이 파티에 참석했을 때 실검에 오른 적도 있는데, 내가 사진 보내줄게!”
  • “그럴 필요 없어.”
  • 허청아는 그녀의 말을 잘랐다.
  • 이 정도만으로 그녀는 이미 재벌가 러브스토리를 상상할 수 있었다.
  • 어쩐지 오늘 박시혁의 말투에 가시가 돋쳐 있더라니, 자기 체면을 전혀 봐 주지 않고 업무적으로 대한 건 아마 그녀가 함부로 떠들고 다닐까 봐 걱정했던 거겠지.
  • 일부러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낯선 사람 대하듯 딱딱한 느낌을 주며 관계를 분명히 할수록 그녀가 아무리 떠들어 대도 사람들이 믿지 않을 테니까.
  • ‘역시 대표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이라 쉬운 성격은 아니겠지.’
  • 전화를 끊은 뒤 허청아는 방으로 돌아가 대충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노트북을 켜고 프로젝트에 관한 자료를 정리했다.
  • 지금 매달 들어가는 엄마의 치료비만 생각하면 사랑 타령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그녀는 곁에 무음으로 해둔 휴대폰이 몇 번이나 울렸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허청아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나머지는 내일 처리하려고 정리하려고 할 때 그제야 4시간 전에 박시혁이 세 차례나 그녀에게 음성통화와 한 통의 문자를 보낸 것을 발견했다.
  • [일어나면 연락해.]
  • ‘무슨 일로 나를 찾는 거지?’
  • 어쩌면 함부로 떠들고 다니지 말라는 경고거나 입막음 비용을 주겠다는 연락일 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그 돈을 받는다면 몸을 판 것과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 허청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답장을 써 내려갔다.
  • [어젯밤 일은 없던 일로 여기고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을게요.]
  • 하지만 발송을 누르려는 순간 그녀는 생각을 바꾸고 박시혁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해 버렸다.
  • ‘이러면 안심하겠지.’
  • 휴대폰을 내려놓은 뒤 허청아는 그대로 잠들었다가 진 부장의 전화에 잠에서 깼다.
  • “청아 씨한테 있는 계약서 안나한테 넘겨요.”
  • “진 부장님, 저…”
  • 그녀가 미처 얘기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상대방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 허청아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계약서를 찾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 분명 호텔에 체크인할 때 확인까지 한 기억이 있었다.
  • 순간 허청아의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 ‘망했다…’
  • 분명 그날 아침에 너무 급히 나오느라 1501호에 두고 온 계약서를 박시혁이 주운 게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