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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박시혁에게 보낸 카톡

  • 새벽에 잠에서 깬 허청아는 남자가 곁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탄탄한 팔이 그녀를 완전히 감싼 채 고른 숨소리가 목을 간지럽혔다.
  • 다리 사이에서 전해지는 고통에 남아 있던 술기운이 완전히 가셨고 이성도 점차 돌아왔다.
  •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회사 대표랑 잠자리를 하다니!’
  • 허청아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은 기분에 조심스레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 그리고 허둥지둥 침대에서 내려온 뒤 옷을 입고 짐을 챙겨 도망치듯 1501호에서 나와 프런트로 달려가 다른 방을 달라고 했다.
  • 휴대폰을 꺼내 결제를 하려고 할 때 그제야 박가희에게 문자를 보낸 게 아니라 박시혁에게 보냈다는 걸 발견했다.
  • 몇 년 전 중학교 동창회가 있었을 때 반장이 단톡방을 만들어 서로 친추를 하라고 한 적이 있었다.
  • 그때 분명 박시혁이 먼저 자신의 카톡을 추가한 기억이 있었다. 추가한 뒤 그는 문자를 보낸 적이 없었고 그녀도 그저 프로필에 그의 이름을 적어놨을 뿐이다.
  • ‘그런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 그녀는 새로 체크인한 호텔 방에 앉아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휴대폰을 꺼내 중학교 동창들이 있는 단톡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청아에서 Lily로 바꾸고 프사도 인터넷에서 대충 찾은 여자 사진으로 바꿨다.
  • ‘이렇게 하면 내가 누군지 모르겠지!’
  • 카톡을 차단하는 건 너무 의도적인 것 같았다. 어차피 1501호는 회사에서 예약한 방이니 누가 묵었는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 그녀는 모든 걸 마치고 마침내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할 수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일찍 알람이 울렸다. 오늘 허청아는 부장을 따라 한양그룹에 추가 자금 문제에 대해 협상하러 가기로 했다.
  • 이번 채권 교환 프로젝트의 예상 순수 금액이 이미 손실 제한 아래로 떨어져 상대방이 추가 투자를 요구하고 있었다.
  • 그렇지 않으면 증권 자산을 매각해야 하기 때문에 상황이 긴박한 터라 그들의 투자팀이 대표님 덕을 봐서 함께 전용기를 타고 W 시티로 출장을 오게 된 것이다.
  • 샤워를 마친 그녀는 서류를 챙겨 서둘러 호텔 로비로 향했고 얼마 뒤 도착한 박가희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 “진 부장이 우리 성세그룹은 추가 매수한 쪽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더니, 내가 신탁회사에 가서 계약서를 확인해 봤는데 그 복사본에 분명 진 부장 이름이 적혀 있었어!”
  • “그만해, 진 부장님이 곧 도착하실 텐데, 괜히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 허청아가 박가희를 끌고 한쪽으로 섰을 때 곁눈질로 엘리베이터에서 훤칠한 키의 소유자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나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 박시혁이었다.
  • 어젯밤에 입었던 가운 대신 검은색 정장으로 갈아입은 그는 매우 단정하고 잘 어울렸다.
  • 약간 찌푸려져 있는 눈썹과 입술을 꾹 다문 채 곁에 있는 비서의 보고를 집중해 듣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며, 이쪽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 박시혁이 냉담하기 그지없는 건 상업계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잘생긴 얼굴은 항상 날이 서 있는 것 같았고 고고한 자태와 무뚝뚝한 모습은 순식간에 주변의 공기를 서늘하게 만들어버리는 것 같았다.
  • 허청아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어젯밤 부드럽게 그녀의 눈물에 키스해 주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 ‘아무래도 내가 헛것을 봤나 봐.’
  • “우리 박 대표님은 역시 멋있다니까. 대표님과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
  • 박가희는 허청아의 몸이 굳어지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 말을 이었다.
  • “같은 박 씨인데 외모 차이가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청아야, 멍하니 무슨 생각 하고 있어?”
  • 박가희가 그녀의 팔을 툭툭 치자 허청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박시혁을 피하려고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 그런데 하필이면 이사진들과 비서가 거의 입구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그녀와 멀지 않은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 그리고 그가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낮은 소리로 비서를 향해 지시를 내렸다.
  • “어젯밤 누가 1501호에 묵었는지 확인해 봐.”
  • 허청아는 방 번호를 듣자마자 다리가 얼어붙은 것처럼 꼼작도 할 수 없었다.
  • 머릿속이 복잡해져 갈 때 곁에 있던 박가희의 흥분에 휩싸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 “1501호요? 박 대표님, 어제 허청아 씨가 1501호에 묵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