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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타고난 연기자

  • 마음속으로 생각의 정리를 마친 뒤에야 나는 전화를 받았다.
  • 나는 최대한 전과 다름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응, 여보.”
  • “자기야, 왜 이렇게 늦게 받아? 바빠?”
  • 유형진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 “조금. 안 그래도 방금 강 대표님 전화받았는데 급한 일로 한 일주일 정도 출장을 다녀와야 된대.”
  • 나는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 “출장? 일주일씩이나?”
  • “응. 나도 당신이랑 가람이 두고 가고 싶지 않은데 나를 대신할 다른 사람이 없나 봐.”
  • 나는 일부러 불평스럽게 말을 했다.
  • “나도 우리 여보가 가는 게 싫지만 어쩌겠어. 일 때문이면 가야지. 걱정하지 마, 가람이는 내가 잘 챙길게.”
  • 유형진은 혹시나 내가 출장을 안 가겠다고 할까 봐 서둘러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 “그럼 수고해 여보!”
  • 나는 더 이상 가식적인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전화를 끊고 싶었다.
  • “여보, 사랑해! 보고 싶을 거야!”
  • 그의 마지막 말은 그가 평소에 자주 하던 말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더럽게 느껴졌다.
  • 전화를 끊자 허비아는 옆에서 냉소를 짓고 있었다.
  • “나 다 들었다. 역겨워서 못 들어주겠네. 다른 여자랑 바람난 주제에 뻔뻔하게 사랑한다는 말이 나와? 미친 거 아니야?”
  • 나는 씁쓸하게 웃기만 할 뿐 대꾸를 하지 못했다.
  • “아람아, 잘했어! 방금 진짜 잘한 거야!”
  • 허비아는 나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 “그런데 출장 간다고 한 건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거야?”
  •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출장을 간다고 한 건 일주일 동안 마음 정리도 하고 계획도 제대로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래야만 제대로 된 연기를 할 수 있을 테니까.
  • 허비아는 나의 계획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그가 전화가 온 이유에 대해 물었다.
  • “별말 안 했어. 나도 안 물어봤고.”
  • 그러고 보니 그는 전화를 걸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 “그 인간 자주 전화 와?”
  • “같이 안 있을 때에는 자주 오지. 아침 점심 저녁에 각각 한 번씩은 오는 편이야.”
  • “진짜 타고난 연기자구나!”
  • 허비아는 감탄하며 말했다. 그러다 무언가 깨달은 것인지 나를 멍하니 쳐다보며 말했다.
  • “아람아. 방금 든 생각인데 그 인간 너한테 전화하는 목적이 네가 어디서 뭘 하는지 알아보고 한진서랑 바람 피우기 위해 아닐까?”
  • 허비아의 말에 나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 그러고 보니 유형진은 나한테 전화하면 항상 어디에서 뭘 하는지 물어봤었다. 전에는 의심해 본 적이 없기에 항상 사실대로 말을 했었다.
  • 나와 허비아의 눈이 공중에서 부딪혔고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 유형진이 그동안 바람을 피우면서 나한테 들키지 않은 것은 충분한 준비를 했기 때문이 아닐까?
  • 예전의 나는 그가 매일 걸어오는 전화가 나에 대한 사랑이라고 믿었었다. 자상한 남편을 만난 나의 복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이건 복이 아니라 악몽이었다!
  • 곧이어 허비아는 자러 방에 들어갔고 거실에 혼자 남은 나는 많은 생각에 잠겼다.
  • 사실 유형진과 알게 된 것은 어린 시절 친구 때문이었다.
  • 대학원생 시절 부모님은 가정환경이 비슷한 구빈을 나의 정혼자로 지정하셨고 억지로 사귀길 바랐었다. 그러나 나는 구빈에게 이성적인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고 결국은 가짜 남자친구를 부모님에게 소개할 수밖에 없었다.
  • 그때 유형진을 나한테 소개한 사람이 한진서였다.
  • 유형진을 처음 봤을 때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 여겼었고 한진서는 발 벗고 나서서 이 일을 도와줬었다.
  • 한진서가 유형진에게 뭐라고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형진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나는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유형진과 말까지 맞췄었다.
  • 그러나 부모님은 유형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고 그는 그날 갖은 모욕을 겪었었다. 난 그에게 죄책감이 생겼고 그러다 우리는 친해지게 되었다.
  • 그러다 어느 날 허비아와 한진서랑 함께 놀라 간 날이 있었다. 저녁에 돌아오는 길에 불량배를 만났고 유형진은 때마침 나타나 구해줬었다. 나는 속절없이 그에게 빠져버렸다.
  • 우리의 관계가 확실해진 순간은 내가 잔뜩 취한 나의 생일날이었다.
  • 나는 또다시 그날 우연히 병원에서 만났었던 용모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이 아름다운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 그날 밤의 그 남자는 어쩌면 유형진이 아니라 그였을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