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마터면 한진서의 뺨이라도 칠 뻔했다. 이 미친 년이 이제는 선을 넘네? 가람이한테 엄마라고 부르라고 했다고?
잔뜩 굳은 내 표정에 한진서는 겁에 질린 얼굴로 내 앞에서 애써 미소를 지으며 변명했다.
“아람아, 너도 알잖아. 예전에 내가 가람이 엄청 예뻐했던 거. 그래서 가람이를 내 딸처럼 생각하는 거 너도 알지? 그래서 오늘 잠깐 그 말이 나왔던 것뿐이야. 가람이가 오해를 한 것 같아.”
그녀의 변명이 가소롭기만 했다.
예전에 가람이를 자신의 딸처럼 생각하고 예뻐해 주겠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는 가람이를 정말 예뻐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처음부터 다른 속셈이었구나 너는.
오해? 절대 아닐 것이다!
한진서의 말을 들은 유형진은 잽싸게 표정을 풀고는 가람이를 보며 말했다.
“가람아, 이모가 너한테 농담한 거야. 네가…”
“어떻게 엄마로 농담을 할 수가 있어! 가람이 엄마는 한 명뿐이야!”
가람이는 유형진의 말을 채 듣지도 않은 채 대꾸했다.
가람이의 말에 나는 뿌듯했지만 한진서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식사가 끝나자 한진서는 내가 말릴 새도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유형진은 나의 반응이 마음에 걸리는지 나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일부러 모르는 척 한진서를 배웅해 주라고 했다.
그제서야 유형진은 몸을 일으켜 한진서를 배웅해 주러 나갔다. 난 가람이를 씻기러 욕실로 향했다.
“엄마, 비아 이모가 그러는데 진서 이모 여우래. 나 여우 싫어!”
역시 가람이가 오늘 유독 민감하게 반응한 건 허비아의 작품이었다.
하여간 허비아 입이 문제라니까. 애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어.
이 일을 가람이까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일로 가람이에게는 피해가 가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비아 이모 헛소리하는 거야. 듣지 마.”
“아니야 엄마. 진서 이모 여우 맞아! 오늘도 할아버지 할머니 병실에 와서 엄마 험담했어!”
가람이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험담?”
“할머니가 엄마 게으르대. 아무것도 안 하고 아빠만 부려먹는대. 그리고 엄마가 아들 못 낳는다고 쓸모없다고 했어. 외할아버지만 아니면 진작에 엄마랑 아빠 이혼시켰다고 했어!”
“정말로 그렇게 말했어?”
“응!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런 말 하고 있을 때 진서 이모도 같이 했어. 엄마가 사람 배려할 줄 모른다고. 그래서 아빠도 배려 안 해준다고. 그런데 엄마, 나는 엄마가 동생 낳지 않는 이유가 나 때문인 거 알아. 그래서 나는 진서 이모가 싫어! 할아버지 할머니도 싫어!”
가람이의 말에 나는 마음이 저릿했다. 시부모님이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 나를 미워할 줄이야.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나는 언제나 아들을 낳지 못하는 며느리에 불과했다.
이 집에 시집만 오지 않았다면 남부럽지 않은 집의 딸로 살다 부잣집 며느리가 되었을 내가! 누구 때문에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데!
처음부터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임신을 하고도 저 사람들 때문에 고생을 하다 유산을 하였고 그러다 몸이 상해 이렇게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죄책감이 없는 것은 물론 아직도 내 탓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지금의 유형진은 과거의 유형진이 아니었다. 놀 만큼 돈이 있었고 바람을 피우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아마 아직 나와 부부 사이를 유지하는 것도 우리 아버지 때문이겠지.
“엄마, 가람이는 엄마를 사랑해! 앞으로도 영원히!”
가람이는 갑자기 나의 얼굴에 뽀뽀를 하더니 고백을 했다. 가람이의 행동에 나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유형진과의 결혼생활에서 나한테 유일하게 좋은 점이 있다면 그건 가람이었다.
한진서를 배웅하고 들어온 유형진은 나의 눈치를 보며 내일 병원에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다음날 아침, 가람이를 학교에 보낸 뒤 우리는 같이 병원에 갔다.
가는 길에 대형마트 앞을 지나는 길에 유형진은 일부러 차의 속도를 줄였다. 내가 내려서 뭐라도 사길 기다리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항상 내가 먼저 챙겼던 부분이었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어차피 잘해줘 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인간들한테 잘해줄 필요가 없었다.
병실에 도착하자 어머니는 아버지와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나와 유형진이 빈손으로 온 것을 본 어머니는 안색이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