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5화 진짜 사랑과 아닌 거의 차이

  • “유라야!”
  • 임수연이 외치자 여자아이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아이는 재빨리 몸을 돌려 그녀를 향해 달렸다.
  • “엄마!”
  • 임수연은 몸을 낮추어 아이를 품에 안았다. 진유가 아이를 뒤따라왔다.
  • “안녕, 유라야. 난 진유라고 해. 너랑 친구 해도 될까?”
  • 유라는 임수연과 심유찬 사이에 태어난 아이이자 진유가 말했던 바로 그 ‘귀염둥이’였다.
  • 이 아이는 그해 임수연과 심유찬이 결혼하기 마지막 날 함께 보냈던 밤에 생긴 아이였다.
  • 둘은 혼인할 사이였기 때문에 임수연은 아이를 낳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 그 뒤로 4년, 결혼생활은 이어졌으나 심유찬은 단 한번도 그녀와 함께 침대를 공유한 적이 없었다. 부부 사이가 냉랭하다 보니 아이한테까지 영향이 갔다. 아이는 소심하고 숫기가 없는 성격으로 자라게 되었다.
  • 임수연은 이런 가정환경이 유라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아이를 기숙사가 있는 유치원으로 보내게 되었다. 아이는 주말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 “네.”
  • “진짜? 그렇다면 보답으로 이모가 맛있는 거 사줄게.”
  • 진유는 임수연이 차를 운전할 수 있도록 얼른 아이를 안아 들었다.
  • 임수연은 기꺼이 아이를 진유에게 넘겨준 뒤 힘껏 차 액셀을 밟았다. 그녀는 오랜만에 마음껏 속도가 가져다주는 바람을 즐겼다.
  • 세 사람이 떠나고 얼마 되지 않을 시점, 심유찬의 차도 성진 유치원에 도착했다.
  • 심유찬은 언제나 그랬듯 바쁜 모습이었다. 그는 싸늘함이 느껴지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 집사는 홀로 차에서 내렸다.
  • 잠시 후, 돌아온 그가 심유찬에게 보고를 올렸다.
  • “선생님께 물어보니 좀 전에 이미 사모님께서 유라 아가씨를 데려가셨답니다.”
  • 심유찬의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췄다. 덤덤하던 그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 “역시 사모님께선 진심으로 도련님과 이혼할 생각이 아니신가 봐요. 아이를 데려가다니, 이건 도련님께 돌아오고 싶다는 신호를 보내는 게 분명해요.”
  • 집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사모님은 분명 도련님이 먼저 움직이길, 자기를 데리러 오길 기다리고 계시는 거야.’
  • “돌아가자!”
  • 그러나 심유찬은 차갑게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
  •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 심유찬은 임수연이 스스로 깨닫길 바라고 있었다. 이런 얕은 수단을 쓰는 것보단 얌전히 자기 발로 돌아오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는 것을!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덧 삼십 일이 지났다.
  • 드디어 내일, 심유찬과 임수연이 법적으로 이혼절차를 마무리하는 날이 다가왔다.
  • 이미 마음속으로 이혼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임수연은 매우 평온했다.
  • 그녀는 유라를 먼저 재운 뒤, 거실로 나가 진유와 함께 와인을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 임수연은 최근 할애할 수 있는 모든 시간을 유라에게 쏟아 부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그녀는 그동안 아이에게 해주지 못했던 것을 보상해주고 싶었다.
  •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아이의 표정이 점점 더 밝아지는 것을 보고 그녀는 뿌듯함을 느꼈다. 그리고 더더욱 심유찬과 헤어지는 것이 옳다는 확신이 들었다.
  • “다들 궁금하겠지, 내가 왜 돌아왔는지. 사실 이유는 별것 없어. 여긴 내 집이고, 내가 속한 곳이니까.”
  • 둘의 대화가 점점 무르익어갈 무렵, 어디선가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고개를 돌려 TV를 본 임수연의 눈에 한은정이 들어왔다. 그녀는 맑은 미소와 사슴 같은 눈망울로 수많은 기자를 마주 보며 화려한 플래시를 받고 있었다.
  • “그 말씀은 한은정 씨가 드디어 평생 함께할 상대를 찾으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것도 바로 여기, 이 도시에.”
  • 눈치가 빠른 기자들이 그녀의 말속에 담은 은밀한 뉘앙스를 알아차리곤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 하지만 한은정은 은은한 미소를 띨 뿐 어떠한 답도 내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미소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 “그때 그런 망신을 당하고도 다시 얼굴을 들이밀 용기가 나다니… 너만 아니었다면 저 여자는 진작에 이 바닥에서 매장될 운명이었어. 그런데 돌아와 하는 짓이 너의 가정을 파탄 내는 일이라니! 정말 얼굴도 두껍다!”
  • TV에 나온 한은정을 본 진유가 참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 “저런 악독한 여자를 심유찬은 뭐가 좋다고 그렇게 끼고 도는 거야. 상한 음식 먹다가 체할까 두렵지도 않나 봐.”
  • 쾅 하고 컵을 내려놓은 진유가 말을 이었다.
  • “내가 심유찬이었으면 눈을 감고도 저 여자가 아니라 너를 선택했을 거야!”
  • 그녀의 말을 들은 임수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 “어쩌면 이게 바로 진짜 사랑과 아닌 거의 차일지도.”
  • ‘진심으로 한은정을 사랑했으니까 4년이라는 세월 동안 배신을 당하고도 심유찬은 눈을 감아줄 수 있었던 거겠지.
  • 사랑하지 않으니까, 아무리 내가 4년 전 ‘침대 사건’에 있었던 진실을 설명하려고 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거겠지.’
  • “아무리 이혼했다고 해도 이 나쁜 년, 놈이 잘사는 꼴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
  • 허리에 양손을 올린 채 꼿꼿이 허리를 편 진유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옳고 그름, 은혜와 원한에 대한 가치관이 확고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 그에 비해 임수연은 무덤덤한 모습이었다.
  • “둘이 지지고 볶던 난 상관 안 해. 난 그저 우리 유라랑 행복하면 돼.”
  • 그러다가 문득 임수연은 자신이 아직 유라에게 이혼 사실을 털어놓지 못한 것을 상기하곤 마음이 무거워졌다.
  • 다음 날 아침.
  • 심유찬은 평소처럼 단정한 옷차림에 무심한 얼굴로 소매 단추를 잠그며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 “도련님, 사모님께서 전화하셨습니다.”
  • 얼굴에 화색을 띤 채 집사가 다가왔다.
  • 심유찬은 전화를 넘겨받았지만, 먼저 말을 꺼내진 않았다.
  • 전화 너머 임수연의 평온하고도 예의 바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언제 시간 있어요? 저 지금 회사 밑 커피숍에 있는데.”
  • 심유찬은 고개를 들어 벽에 걸려 있는 달력을 쳐다봤다.
  • ‘거의 이십 일 버텼군. 이젠 못 배기겠나 보지?’
  •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임수연의 말을 들은 심유찬이 생각했다. 그는 임수연이 틀림없이 잘못을 인정하고 화해하러 온 것이라 확신했다.
  • 심유찬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전화를 끊어버렸다.
  • 반면 아무런 답도 받지 못한 임수연은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어 심란했다.
  • 이혼은 당연한 결말이었으나, 그녀는 속전속결로 얼른 마무리 짓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그의 회사 아래까지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 차에서 내린 심유찬은 단번에 회사 앞에 있는 가느다란 인영을 알아봤다.
  • 그는 아주 못마땅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코웃음을 날렸다.
  • 심유찬의 눈엔 그녀가 당장이라도 잘못을 빌지 못해 아주 초조해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런 티를 내면 낼수록 얼마 전에 콧대 높게 당당히 이혼을 들먹이던 모습이 떠올라 혐오감이 치밀어 올랐다.
  • 그가 도착한 것을 본 임수연이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 “왔어요?”
  • 심유찬은 냉담한 얼굴로 말했다.
  • “이럴 거였으면 진작에 잘하지 그랬어?”
  •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임수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멈칫했다.
  • 그러나 이내 대수롭지 않은 듯 계속 말을 이었다.
  • “커피숍 가서 마저 얘기해요.”
  • 심유찬은 더 이상 그녀와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 “할 말 있으면 여기서 해!”
  • “그렇다면, 좋아요.”
  • 그가 사람들에게 이혼 사실을 알려도 상관없다면 그녀도 딱히 개의치 않았다.
  • 임수연은 재빨리 태블릿을 꺼내 영상통화를 걸었다.
  • “요즘 다들 바쁜 걸 아시고 동사무소에서 화상 면담으로 업무 절차를 진행할 수 있게 만들었더라고요. 직원이 이렇게 영상통화를 통해 저희 둘의 신분을 확인하고 이혼 절차를 진행할 거예요. 이제 저희가 확답만 해주면 번거롭게 동사무소까지 갈 필요 없이 이혼 증명서를 택배로 집에서 받을 수 있어요.”
  • ‘요즘 공공기관 업무 시스템 너무 잘 되어 있다니까.’
  • 심유찬은 할 말을 잃었다.
  • 그는 임수연이 잘못을 빌러 온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가 원하던 건 이혼 증명서였다.
  • “심유찬 씨, 임수연 씨, 두 분 모두 이혼에 동의하십니까?”
  • 태블릿 화면에 한 중년 여성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 임수연은 태블릿 상태가 좋지 않아 볼륨을 최대한 높인 상태였다. 그런데 저쪽에서도 마이크를 사용해 말하고 있었던 탓에 대화 내용이 주변에 아주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주변을 지나가고 있던 직원들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놀란 표정이 된 사람들의 시선이 둘에게 쏠렸다.
  • “네, 그럼요.”
  • 임수연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 하지만 심유찬은 침묵하고 있었다.
  • 태블릿을 한번, 임수연을 한번 쳐다본 그의 얼굴색이 어둡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