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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시비

  • 이런 곳에서 심유찬을 만난 게 조금 놀라웠지만, 임수연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 “심 대표님, 화장실을 잘못 들어오셨네요. 여긴 여자 화장실이에요. 남자 화장실은 저쪽이고요.”
  • “당신이 아무 남자나 만나고 다니는 건 상관하지 않겠지만 유라를 데리고 만나지는 마! 유라는 내 딸이야! 당장 애 집으로 돌려보내!”
  • 그는 예전처럼 그녀에게 명령조로 말했다.
  • 그나마 예의 바른 표정을 짓던 임수연도 그 말을 듣자마자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 “당신 딸이요? 심 대표님, 유라가 오전에 태어났는지 오후에 태어났는지 알아요? 유라가 태어난 날 날씨는요? 유라가 태어날 때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고는 있어요?”
  • 심유찬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 임수연과 결혼한 뒤, 거의 회사에서 숙식을 해결하거나 일 년에 절반 이상을 해외 출장을 갔다.
  • 유일하게 기억하는 건, 출장 갔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아이가 태어났다는 사실이었다.
  • 임수연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 예전에 한 작가의 소설을 읽은 적 있었다. 여자가 홀로 임신하고 산전 검사를 하다가 홀로 아이를 낳는 내용이었는데 그때는 그 주인공이 참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 그런데 출산 과정에서 대출혈을 일으키고 금방 태어난 딸이 위급한 상태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제야 책에서 쓴 내용보다 자신의 처지가 더 심각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 위급한 상황에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고 그녀도 나중에는 이 일을 입에 담지 않았다.
  • 말한다고 해도 돌아오는 건 조롱과 비웃음뿐일 테니 말을 안 하는 게 나았다. 어차피 심유찬은 그녀의 모든 행동이 계산적이고 한은정과 자신의 사랑을 파괴한 것에 대한 벌을 받는다고 말했을 것이다.
  • 씁쓸한 마음을 지운 뒤, 그녀는 다시 미소를 머금고 심유찬에게 말했다.
  • “걱정하지 마세요. 유라는 내가 배 아파서 낳은 내 딸이에요. 나처럼 사람들에게 욕먹고 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요! 유라 자존심은 내가 지켜요!”
  • 말을 마친 그녀는 그를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 그 뒤로 꽤 평온한 날들이 며칠 지속되었다.
  • 백현은 복귀한 뒤, 매일 방송을 켜고 팬들과 소통했고 광고도 많이 들어왔다. 피겨 금메달리스트라는 타이틀과 백현 본인의 우아한 분위기 때문에 수많은 팬들이 몰렸다. 스타업 엔터는 매일 돈을 쓸어 담고 있다고 해도 전혀 과하지 않았다.
  • 유라는 백현의 일호 팬이 되어 매일 그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질투를 느낀 진해준은 유라에게 호감을 얻으려 매력 어필을 했다. 유라는 두 잘생긴 오빠들 사이에서 행복한 날들을 보냈다.
  • 아이를 봐줄 사람이 생기자 임수연은 여유 시간이 많아졌다. 진유는 아침부터 찾아와서 쇼핑하러 가자고 졸랐다.
  • 인터넷 방송계의 큰손으로 알려진 진유가 나타나자 백화점 직원들은 그녀를 에워싸고 자신이 팔고 있는 상품을 적극 추천했다.
  • 눈에 띄는 것을 싫어하는 임수연은 사람들이 진유를 에워싸자 조용히 밖으로 나와 다른 가게로 갔다.
  •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에 드는 핑크색 원피스를 골랐다.
  • 디자인이 심플하면서도 질감이 좋은 원피스였다.
  • “이거 포장해 주세요.”
  • “네.”
  • 매장 직원이 다가와서 원피스를 받아들었다.
  • “이게 누구야? 자존심 강한 임수연 아니야?”
  • 밖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오자 임수연은 고개를 돌렸다.
  • 한 여자가 친구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 여자는 임수연을 보자마자 가소로운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 그 여자가 바로 임수연의 전 시누이, 심유월이었다.
  • 임수연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심유월은 매장 직원이 들고 있는 원피스를 보자 차가운 말투로 비아냥거렸다.
  • “주제 파악을 좀 하고 다니면 얼마나 좋아. 여기가 어디라고 이런 곳에 옷을 사러 와? 여기 옷 얼마나 하는지 너 알기나 해?”
  • “비싸면 얼마나 비싸다고 그래요.”
  • 임수연이 차갑게 대꾸했다.
  • 옷이 비싸봐야 몇백만 원인데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액수였다
  • “꼴에 자존심은 있다고… 너 내가 올 줄 알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던 거지? 나한테 비벼서 떡고물이나 건질까 하고 기다린 거 아니야? 그리고 집에 돌아가게 해달라고 사정하려고 했겠지!”
  • 심유월은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 그녀는 맨몸으로 쫓겨나서 직장도 없는 임수연에게 이런 곳에서 쇼핑을 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당연히 자신을 기다렸다고 여겼다.
  • “무릎 꿇고 빌면 고민은 한번 해볼게.”
  • 그녀는 은혜라도 베푸는 듯한 표정으로 임수연에게 다가가서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 임수연이 정말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저 평소에 임수연을 하대하던 게 습관이 되어 눈에 보이자 괴롭히고 싶어졌다!
  • 심유월은 어느새 집으로 돌아간 임수연에게 어떤 모욕을 줄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는 임수연이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 예전의 그녀는 심유찬에게 피해를 안 끼치려고 심유월에게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 반박 한마디 하지 않았다.
  • 하지만 이미 이혼한 마당에 그녀의 행패를 참아줄 이유는 없었다.
  • 임수연은 조용히 그녀를 지나쳐 계산대로 갔다.
  • “계산해 주세요!”
  • ‘이년이 감히 나를 무시해?’
  • 심유월은 화가 나서 눈에서 불똥이 나왔다. 그녀는 거칠게 매장 직원 손에서 옷을 빼앗아 계산대에 던졌다.
  • “이 옷 내가 살게!”
  • “이거 내가 먼저 골랐거든요?”
  • 임수연이 차갑게 말했다.
  • 심유월은 잔뜩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코웃음 쳤다.
  • “그래서 뭐? 나 유성그룹 심유월이야! 옷 한 벌이 아니라 이 매장을 인수할 능력도 있다고! 거기 직원! 이 주제도 모르는 거렁뱅이를 밖으로 내쫓아!”
  • 심유월은 모두가 자기 발밑에 있는 양, 도도한 표정으로 명령했다.
  • “명령을 할 거면 매장을 인수한 뒤에 명령을 하든가!”
  • 임수연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진유의 차가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쇼핑백을 잔뜩 들고 느긋한 자태로 안으로 들어선 진유는 심유월을 향해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 그냥 허세를 떨고 싶었던 심유월은 진유를 만나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 “이건 내 집안일이니까 끼어들지 마시죠, 진유 씨.”
  • 업계에 소문이 자자했기에 심유월도 진유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었다.
  • 진유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 “수연이에게 가족은 없어. 넌 뭔데 가족이라고 자칭하는 거야? 그리고 수연이 내 친구거든? 수연이 일이면 내 일이야!”
  • 심유월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유를 바라보았다.
  • 자신과 진유는 서로 접점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임수연과 절친이라니!
  • ‘이럴 수가… 구두 집 딸이 어떻게 진유와…’
  • “이 매장, 내가 두 배의 가격을 드리고 인수하죠.”
  • 진유는 계산대로 가서 카드 한 장을 내밀며 호기롭게 말했다.
  • 두 배의 가격. 몇십억에 달하는 가격이었다. 매장 직원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 “매장을 거래할 수는 없지만 진유 씨가 원하는 건 뭐든 맞춰드릴게요.”
  • 눈치 빠른 점장은 진유가 진심으로 매장을 인수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부드럽게 말했다.
  • 진유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리고는 심유월을 힐끗 보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