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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땅 치고 후회할 남자

  • “필요 없어요.”
  • 그녀는 차가운 얼굴로 거절하며 그가 내민 지표를 무시했다.
  • “과거에 있었던 일은 내가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할게요. 게다가 나 때문에 심 대표님도 몇 년의 청춘을 낭비했잖아요? 돈은 받은 거로 치고 제가 심 대표님에게 주는 위자료라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이제 우리 서로 빚진 거 없는 거예요.”
  • 말을 마친 임수연은 실없는 사람처럼 활짝 웃었다.
  • 그녀의 생각지 못한 반응에 당황한 건 심유찬이었다.
  • 그가 알던 임수연은 유성그룹이 가진 재력과 권력을 위해 이 집에 시집온 파렴치한 여자였다.
  • 그런데 돈을 건네는데 받지 않았다?
  • 하지만 과거에 있었던 일을 되짚어 보면 혐오의 감정이 놀라움을 대신했다.
  • 심유찬은 음침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 “잘 생각하고 말해. 이건 내가 당신에게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자비야. 지금 자존심 세우다가 나중에 울고불고 매달려도 소용없다고!”
  • ‘하! 또 연기인 줄 아네!’
  • 그 말을 들은 임수연의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심 대표님과 헤어져도 나는 잘나갈 테니까요. 지금 심 대표님이랑 이러고 있을 시간도 아깝거든요.”
  • 그녀는 비아냥거리듯 대꾸하고는 택시를 잡고 자리를 떴다.
  • 그녀를 태운 택시가 심유찬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차갑던 그녀의 얼굴도 무너져 내리고 남은 건 씁쓸한 미소뿐이었다.
  • 그의 아내로 살아온 세월 4년, 줄곧 본분을 지키고 내조에 정성을 다했다. 왜 아직도 그 모든 게 거짓이라고 생각할까?
  • 심유찬이 임수연에게 돈을 건넸다는 사실을 안 진유는 또 한바탕 그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 “나쁜 자식! 온 세상에 자기만 부자인 줄 아나 봐! 이번 스타업 자선 경매 행사는 네가 직접 가! 가서 그놈 콧대 좀 찍어 눌러줘!”
  • 행동력 빠른 진유는 몇 분 지나지도 않아 임수연이 직접 자선 경매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마케팅 부서에 전했다. 동시에 행사에 가기 위한 옷과 남자 파트너까지 준비했다.
  • “이번 파트너는 네 남자친구라는 신분으로 참석할 거야. 걱정하지 마. 그날 심유찬은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거니까!”
  • 며칠이 지나 행사장 입구에서 진유가 보낸 ‘남자친구’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임수연은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 ‘심유찬이 땅을 치기 전에 내가 사라지게 생겼는데?’
  • ‘남자친구’는 다름 아닌 백현이었다.
  • 팬들은 자신들의 왕자님이 이혼녀와 만난다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받아들일까?
  • 흰 셔츠에 진청색 정장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백현은 마치 동화속에서 금방 나온 왕자님 같은 모습이었다.
  • 그는 쑥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와서 꽃을 건넸다.
  • “수연 누나.”
  • “백현아…”
  • 임수연은 어색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 ‘지금 ‘남자친구’를 갈아치우면 늦었을까?’
  •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 맞은편에서 심유찬과 한은정이 한창 기자들의 질문 세례를 받고 있었다.
  • 그녀와 백현을 본 한은정은 일부러 걸음을 멈추며 백현에게 말을 건넸다.
  • “백현 씨, 이분 소개 좀 해주시겠어요? 저번에 연습장에서 봤는데 두 분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던데요.”
  • ‘얄미운 여자네!’
  •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는데 한은정의 입을 통해 만천하에 드러나게 생겼다.
  • “제 여자친구예요.”
  • 백현은 진유의 지시를 받았는지 영업 미소를 지으며 쑥스럽게 대답했다.
  • “여자친구요?”
  • 한은정이 놀란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세상에! 그런데 이분은…”
  • 그녀는 일부러 말끝을 흐리며 임수연과 백현을 번갈아보았다.
  • 아이가 딸린 이혼녀인 임수연을 어떻게 여자친구로 받아들였냐는 질문이었다.
  • 백현은 여전히 당당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네. 보신 대로예요.”
  • 말을 마친 그는 한은정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임수연에게 말했다.
  • “누나, 우리 가요.”
  • “그래.”
  • 한낱 운동선수인 백현이지만 그 인기는 유명 연예인 못지않았다. 출중한 외모도 한몫했지만 타고난 방송 재능 때문에 전 세계에서 수많은 팬을 보유한 글로벌 스타였다.
  • 한은정을 취재하려고 왔던 기자들은 기대하지도 않았던 특종에 곧바로 두 사람을 에워쌌다.
  • “백현 씨, 두 분 어떻게 만났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 “두 분 참 잘 어울리시는데 결혼은 언제 하실 거예요?”
  • “백현 씨는 이제 스물셋인데 공개 연애라니… 조금 이른 감이 있지 않나요? 팬들이 이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 “백현 씨…”
  • “제 여자친구는 일반인이라 살살 다뤄주세요.”
  • 백현은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도 짜증 난 기색이 전혀 없이 부드럽게 기자들을 달래며 임수연의 어깨를 감쌌다.
  • 임수연도 많이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얼굴을 감추었다.
  • 그러는 사이 곁눈질로 심유찬의 표정이 보였다.
  • 그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 입가에 가득한 비웃음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마치 이혼해도 잘나간다고 호언장담했던 말이 다른 남자로 갈아탔기 때문이냐고 비난하는 것 같기도 했다!
  • 그를 철저히 무시하기로 다짐했지만 저 눈빛만큼은 불편하고 기분 나빴다.
  • 백현의 선한 이미지 때문이었는지 기자들은 더는 그들을 난처하게 하지 않았다.
  • 경매장에 진입하자 임수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미안해, 백현아. 진유가 너를 내보낼 줄은 몰랐어. 걱정하지 마. 회사 돌아가면 바로 정정 기사 낼 거야.”
  • 이렇게 순수 그 자체인 백현을 이 진흙탕에 끌어들였다는 생각에 임수연은 큰 죄책감을 느꼈다.
  • 다행히 비공개 경매 행사였기에 기자들은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 “괜찮아요, 누나.”
  • 백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이렇게라도 누나 남자친구 역할을 할 수 있어서 기뻐요. 내가 누나에게 한참 부족한 사람이란 건 알지만…”
  • “아니야, 너 하나도 부족하지 않아!”
  • 착하기만 한 이 아이는 분명 나이 많은 임수연이 꿀리는데도 자신이 부족하다고 얘기한다.
  • ‘너무 착해서 탈이야.’
  • 임수연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느라 백현의 눈동자에 담긴 진심과 씁쓸함을 보지 못했다.
  • 하지만 그걸 정확히 알아본 사람이 있었다.
  • 그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온 심유찬은 계속 안 보이는 곳에서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 그래서 두 사람의 대화도 똑똑히 들었다.
  • 임수연이 어린 남자를 꼬신 게 아니라 남자가 먼저 고백했다니!
  • 심유찬은 이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오히려 백현이 여자 보는 눈이 없다고 비웃었다.
  • 하지만 그러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허전하고 불편했다.
  • 머릿속에는 어느새 올곧은 눈빛으로 임수연만 바라보던 백현의 표정으로 가득 찼다.
  • 백현은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자 스타업 엔터에서 가장 주목받는 비제이였다. 그런 그가 경매 행사에 나왔다는 건 스타업 엔터 전체를 대표한다는 뜻이었기에 아무도 임수연의 진짜 신분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 임수연도 인기 검색어에 오른 적 있지만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했고 심유찬과 결혼한 뒤에 거의 외출이 없었으므로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 진유가 의도한 것일지는 모르나 그들의 좌석에는 백현의 이름만 적혀 있었다.
  • 백현은 자리에 앉고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에게 불려 나갔고 임수연은 고개를 숙이고 행사에 나올 경매품들을 체크했다.
  • “도대체 얼마나 돈 많은 남자를 꼬시고 싶었으면 이런 행사까지 빠지지 않아?”
  • 귓가에서 불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