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런 실력이 있었으면 진작 유찬이를 유혹했겠지. 그런 여자를 저 댄서랑 비교하다니! 저 댄서를 모욕하는 말이야.”
심유찬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들고 무대 위 여자의 가녀린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임수연이랑 많이 닮기는 했네.’
하지만 유성그룹 안주인 자리를 위해 전전긍긍하던 그녀가 이런 곳에 와서 춤을 출 리 없었다.
심유찬은 레스토랑에서 만났을 때 그녀가 보였던 반응을 떠올리고 구석으로 가서 집에 전화를 했다.
“사모님 집에 있어?”
“그게… 아침에 나가셔서 아직 안 돌아오셨습니다.”
고용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심유찬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남자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이런 얄팍한 수법으로 내 연민을 사려나 보군! 임수연, 너한테 속는 건 한 번이면 족해!’
심유찬은 다시 평소의 냉담한 표정으로 돌아와서 룸으로 돌아갔다.
친구가 다가오며 말했다.
“유찬아, 애초에 임수연 같은 여자랑 말도 섞는 게 아니었어. 그냥 돈 주고 꺼지라고 했으면 됐잖아! 이제 봐! 네 앞에서는 그냥 사고였다고 추궁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기자들한테 너희 약혼한 사이라고 떠벌렸잖아! 어떻게 그런 파렴치한 여자가 있을까? 막장 드라마도 요즘은 이렇게 안 나와!”
아픈 곳을 정확히 찌르는 친구의 말에 심유찬은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너도 그만해.”
맞은편에 앉은 친구가 말렸다.
“아무리 사고였다고 해도 유찬이도 남자인데 너무 무책임하게 행동할 수는 없었어. 관계를 해놓고 사고였다고 돈이나 뿌려주면 상대를 모욕하는 것밖에 더 돼?”
“유찬이한테 물어봐! 그게 정말 사고였을까? 임수연 그 여자가 일부러 계획한 게 아니라?”
“그 여자가 계획한 거라고 해도 나중에 그 일만 없었어도…”
친구는 말을 하다 말고 어색한 표정으로 심유찬의 눈치를 살폈다.
심유찬은 음침한 표정으로 술만 들이켜고 있었다. 룸 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그의 친우가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유찬아, 결혼생활 4년 동안 너는 그 여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신경 써서 보지도 않았을 거야. 그렇다면 일찌감치 차버리는 게 나아. 아까운 시간을 그런 여자한테 낭비할 수는 없잖아.”
“너랑 이혼하면 여자에 눈이 먼 영감들이나 그 여자한테 접근하겠지! 그 여자와 딱 어울리는 조합이잖아!”
룸에 비웃음 소리가 가득 찼다.
한편 밖에서 소리를 듣고 있던 진유는 시뻘게진 얼굴로 주먹을 꽉 쥐더니 당장이라도 달려 들어가려고 했다.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는데 이런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다.
임수연은 그런 친구를 뜯어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이거 놓으라니까? 저 나쁜 자식들이 너한테 뭐라고 하는지 너도 들었잖아! 이걸 어떻게 참아!”
진유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임수연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마치 남의 일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이혼까지 했는데 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말하든 무슨 상관이야.”
이혼하기 전에는 어떻게든 오해를 풀려고 그의 친구들을 잡고 설명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그때는 화목한 가정을 위해 자존심을 굽혔지만 이제 모두 필요 없어졌으니 사람들의 비난도 딱히 와닿지 않았다.
진유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거렸다.
“그 인간을 위해 자존심 굽히고 산 세월이 몇 년이야? 너 안 믿는 것까지는 그렇다고 쳐. 네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기도 싫다니! 게다가 뭐라고? 너한테는 여자에 환장한 영감들이 딱 어울린다잖아! 내가 저놈들한테 네가 얼마나 잘났는지 너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어떤 사람들인지 똑똑히 보여줄 거야!”
임수연은 홧김에 한 소리라고 생각하고 별생각 없이 밖으로 나갔다.
다음날, 임수연은 본가에 중요한 물건을 두고 온 것이 생각나 저택으로 향했다.
그녀는 집으로 들어가는 대신, 고용인에게 전화해서 밖으로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통화가 끝나기 바쁘게 자가용 한 대가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똥 씹은 얼굴을 한 심유찬이 차에서 내리더니 짜증스럽게 그녀를 힐끗 보았다.
‘어젯밤 그 난리를 피우더니 역시 집에 돌아왔네.’
“소란 다 피웠으면 빨리 안으로 들어가!”
그가 명령조로 차갑게 말했다.
임수연은 멈칫하다가 다시 초연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내가 자기한테 미련이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담담하게 대꾸했다.
“심유찬 씨,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네요. 우리 어제 이혼했잖아요.”
심유찬이 불쾌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이만큼 참아줬으면 알아서 기어야지. 끝까지 가면 결국 다치는 건 당신일 텐데!”
참아줬다?
입만 열면 온갖 모욕에 협박이면서 어떻게 참았다고 표현하는 걸까?
임수연이 뭐라고 하려는데 등 뒤에서 갑자기 폭죽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거대한 현수막이 보였다.
[임수연, 이혼한 거 축하해! 이제 꽃길만 걷자!]
현수막뿐이 아니었다. 옆에는 작은 플랜카드도 보였다.
[잘했어, 임수연!]
갑작스러운 상황에 임수연 본인마저 입이 떡 벌어졌다.
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장미꽃다발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수연 누나, 이제 나한테도 기회가 온 거 맞지?”
고개를 들자 미모의 남자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180이 넘는 훤칠한 키와 황금비율을 자랑하는 다부진 몸매까지! 누구나 꿈꾸는 완벽한 남자친구의 모습이었다.
그녀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상대가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많은 걸 약속할 수는 없어. 하지만 함께하는 매 순간 누나만을 바라보고 아껴줄 거야. 누나가 하는 말은 전부 믿을 거고 영원히 누나를 외롭게 하는 일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