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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경험자

  • 오늘은 계약서를 쓰는 날이었다.
  • 하지만 협력사 대표인 기우철은 열 시가 되어서야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 지각한 것도 기가 막힌데 그는 품에 갓 태어난 딸까지 안고 나왔다.
  • “미안해요. 애 분유 먹이느라 좀 늦었네요.”
  • 기우철은 자신을 기다린 사람들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 하지만 미안한 표정보다는 딸이 예뻐죽겠다는 표정이 더 선명했다.
  • 말을 마친 그는 품에 아이를 안은 채, 계약서를 훑었다.
  • 아이는 불편한지 손발을 바둥거리며 칭얼거렸다.
  • 기우철은 바로 계약서를 내려놓고 아이의 등을 부드럽게 다독여 주었다.
  • 맞은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유찬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 “그렇게 잘나가는 JY그룹에 애 돌봐줄 베이비시터도 없어?”
  • 그 말에 기우철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쏘아붙였다.
  • “야, 너는 그래도 경험자잖아. 같은 아빠끼리 애랑 떨어지기 싫은 심정 좀 이해해 줄 수는 없어?”
  • 경험자라는 말에 심유찬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 이미 3년 전에 아빠가 된 그였지만 한 번도 유라를 제대로 보살핀 적이 없었다.
  • 처음에는 일 때문에 바빴고 나중에는 아이가 자라면서 그를 피했다.
  • 평생 아무에게도 빚지고 살지 않았다고 자부하던 심유찬이었지만 유라에게는 많은 빚을 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내 생각에는 아이를 봐서라도 너희 이혼하는 게 아니었어.”
  • 계약서에 사인한 뒤, 장문혁이 옆에서 속을 긁어댔다.
  • “어찌 됐든 네 아이잖아. 부모가 이혼하면 얼마나 상처가 크겠어? 누가 친아빠처럼 아이를 아껴줘?”
  • “이미 이혼한 마당에 그런 소리까지 해야겠어?”
  • 심유찬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 “재혼이라는 경우도 있잖아.”
  • “그걸 잘 알아서 임수연도 대범하게 이혼을 제기한 거야.”
  • 장문혁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옆에 있던 곽지훈이 끼어들었다.
  • 그는 뭐가 그렇게 분한지 손으로 소파를 치며 씩씩거렸다.
  • “뉴스 봤지? 임수연 그 여자가 백현과는 그냥 친한 누나 동생 사이라고 해명하고 나섰잖아! 하여간 대단한 여자야!”
  • 그 말에 장문혁도 다급히 핸드폰을 들었다.
  • 아니나 다를까, 임수연의 해명 기사가 인기 검색어에 올라와 있었다.
  • “내가 장담하는데 내일 기업가 모임에 임수연 그 여자 무조건 나올 거야. 재혼을 노리고 유찬이에게 접근하겠지.”
  • 곽지훈은 진해준, 백현이 대놓고 임수연에게 호감을 표시했지만 전부 심유찬을 자극하기 위한 임수연의 자작극이라고 생각했다.
  • “정말 그렇다면 유찬이 너도 기회를 줘.”
  • 장문혁은 진지한 표정으로 심유찬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 “조금 영악한 면이 있지만 그래도 결혼한 뒤에는 얌전하게 내조나 하고 살았잖아.”
  • 곽지훈의 말 때문이었는지, 다음 날 기업가 모임에 심유찬의 주변 친구들이 대거 참석했다.
  • 장문혁과 기우철, 곽지훈을 제외하고도 해외에서 귀국한 친구들도 있었다.
  • 그들의 예상대로 임수연은 파티에 나타났다!
  • 오늘 그녀의 컨셉은 청순가련형이었다.
  • 무릎까지 오는 하얀색 원피스와 같은 색상의 하이힐로 길고 쭉 뻗은 다리 라인을 강조했다.
  • 그녀는 마른 편이었기에 안아주고 싶을 만큼 보호 욕구를 자극하는 모습이었다.
  • 곽지훈이 가소롭다는 듯이 입을 삐죽였다.
  • “내가 뭐랬어! 저 여자, 5분 안에 유찬이한테 올 거야.”
  • 말을 마친 그는 비웃음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 심유찬은 조용히 술만 마시고 있었다.
  • 뭐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임수연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저도 모르게 잔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 섬세한 사람들은 그가 예전처럼 한은정과 동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 임수연이 그에게 다가가자 주변 사람들은 재미난 연극을 기대하며 눈을 반짝였다.
  • 심유찬은 습관적으로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 임수연이 어떤 얼굴로 자신의 잘못을 사과할지 보고야 말겠다는 생각이었다!
  • “오래 기다렸어.”
  • 오늘 입은 옷이 문제인 걸까, 임수연은 약간 울먹이며 누군가에게 말을 했고 그래서 더욱 보호 욕구를 자극하는 모습이었다.
  • 심유찬은 냉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 “누구랑 얘기하는 거야? 경고하는데 진심으로 사과할 거 아니면…”
  • 꺼지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임수연은 그를 지나쳐 한 남자에게 다가갔다!
  • ‘나에게 온 게 아니었어?’
  • “미안해. 오다가 차가 좀 막혔어.”
  • 성숙한 매력을 느끼는 남자가 임수연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사람들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임수연과 고우송을 바라보았다.
  • 그는 다름이 아닌 진유의 약혼자이자 임수연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 세 사람의 오랜 우정은 이미 친구를 넘어서서 가족에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 그래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때 더 각별한 사이로 보였다.
  • 고우송에게 신경 쓰느라 오는 실에 심유찬이 있었다는 것도 보지 못했던 임수연이었다.
  • 졸지에 무시당한 심유찬은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 “여기 조금 시끄럽네. 안으로 가서 얘기하자.”
  • 고우송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함께 자리를 떴다.
  • 비록 손을 잡거나 어깨를 감싸는 신체적 접촉은 없었지만 사이가 유난히 각별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사람들은 벙찐 표정을 지었다.
  • 심유찬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고 손에 들고 있던 잔이 깨진 것도 몰랐다.
  • 유리 파편이 피부에 박히며 통증이 느껴져서야 그는 고개를 숙였다.
  • “다쳤잖아!”
  • 누군가가 심유찬의 손을 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 “좀 조심하지 그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