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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이거나, 길들여지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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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울

Last update: 2023-07-21

제1화 더럽혀진 남자

  • “유찬 씨, 부탁이에요. 나랑 집에 돌아가요.”
  • 시내의 한 룸살롱, 임수연은 주변의 비웃음 가득한 시선도 무시한 채, 한 남자에게 매달려 애원하고 있었다.
  • 그녀의 남편 심유찬이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 남자는 그녀를 데리고 빈방으로 들어가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 “나는 당신이랑 결혼기념일 따위 같이 축하할 생각 없으니까 이거 가져가서 쇼핑이나 해!”
  • 그는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지갑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그녀의 앞에 던졌다.
  • 볼일을 마친 남자는 미련 없이 밖으로 나갔다.
  • “유찬 씨!”
  • 임수연은 애처로운 표정으로 그의 옷깃을 잡으며 물었다.
  • “그때 약속을 안 지킨 거… 나를 위한 게 아니라면 당신은 믿어줄 거예요?”
  • “그걸 믿겠어?”
  • 심유찬이 비아냥거리듯 되물었다.
  • “그럼 그 모든 게 나를 위한 것이었단 말이야?”
  • ‘당신을 위한 거 맞아요!’
  • 그가 과거에 있었던 일을 조금만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보면 알게 될 사실이었다.
  •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 그녀가 아무리 해명하려고 해도 모양만 우스워질 뿐이었다.
  • 임수연은 절망한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 핸드백에서 알람 소리가 구슬프게 울렸다.
  • 열두 시, 그들의 결혼기념일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이 났다!
  • 그녀가 오늘까지 안 되면 포기하기로 자신과 약속했던 시간도 다가왔다.
  • 임수연은 마지막까지 노력해 보기로 했다.
  • “유찬 씨…”
  • 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핸드폰 알림이 떴다.
  • 고개를 숙여 확인해 보니 남녀가 침대에서 같이 잠들어 있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 그리고 사진 속 주인공이 바로 그녀의 남편이었다.
  • ‘하! 기분 더럽네! 더러워서 못 해 먹겠어!’
  • “우리 이혼해요.”
  • 임수연은 드디어 큰 결심을 내린 듯했다.
  • 그녀는 말없이 잡고 있던 남자의 옷깃을 놓았다.
  • 심유찬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임수연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애처롭게 결혼기념일만 같이 지내자고 애원하던 여자였다. 그랬던 그녀가 갑자기 이혼 얘기를 꺼냈다는 게 잘 믿기지 않았다.
  • 심유찬은 임수연처럼 탐욕스러운 여자가 유성그룹 안주인 자리를 쉽게 내놓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 “비밀번호는 0 네 자리야!”
  • 말을 마친 심유찬은 휑하니 사라져 버렸다.
  • 임수연은 고개를 숙여 손에 쥔 카드를 바라보다가 씁쓸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 그녀는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이 사랑한 건 심유찬 본인이라고, 절대 유성그룹 안주인이라는 타이틀이 탐난 게 아니라고 증명해 보였다.
  • 그리고 그가 가정과 사랑하는 여자 사이에서 선택을 하도록 2주를 기다려 주었다.
  • 결과는 그녀의 처참한 패배였다!
  • 그녀는 할 만큼 했고 이제는 주었던 마음을 거두어야 할 때!
  • 임수연은 빠르게 달려 나가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심유찬을 따라잡았다. 그녀는 미리 준비해둔 이혼서류를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 “이혼하겠다는 말은 진심이었어요. 아무것도 필요 없고 맨몸으로 나갈 거예요. 유성그룹에서 어떤 지원이나 위자료도 받지 않을 거예요!”
  • 그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이혼서류가 쓰레기통으로 처박혔다.
  • “주제 파악 좀 하고 미친 소리를 지껄여!”
  • 그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 ‘당신 가문과 당신은 아무런 배경도, 이렇다 할 학력도 없는 내가 유성그룹을 떠나면 버티지 못할 거라 생각하겠지!’
  • “걱정하지 마세요. 나 이래 뵈도 주제 파악은 잘하거든요.”
  • 그녀는 허리를 숙여 이혼서류를 다시 집어 들고는 그에게 건넸다.
  •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아침 아홉 시에 법원 앞에서 만나요.”
  • 말을 마친 그녀는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 걸음을 돌렸다.
  • 아래층으로 내려온 임수연은 지친 기색으로 벽에 등을 기댔다.
  • 그의 앞에서는 항상 눈치만 보다가 갑자기 당당하게 나가자니 용기가 필요했다.
  • 툭!
  • 미지근한 액체가 그녀의 볼을 타고 흘렀다.
  • 십 년의 짝사랑이 이로써 끝이 났다. 미련 없이 털어버리고 싶었으나 가슴에서는 피가 흘렀다.
  •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녀는 유리창에 비친 나약해 빠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 4년하고도 보름이라는 시간 동안 그 남자는 절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걸 증명했으니 이보다 더 밑지는 장사가 있을까.
  • 다음 날 아침, 임수연은 아침 일찍 법원을 찾았다.
  • 하지만 열한 시까지 기다려도 심유찬은 나타나지 않았다.
  • 전화도 여러 번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 그가 바쁘다는 것을 알기에 그녀는 그의 회사로 찾아갔다. 어떻게든 오늘 끝장을 봐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 유성그룹 본사 건물 앞에 도착하자 한 여자의 손을 잡고 뒷좌석 차 문을 열어주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 여자는 남자의 품에 몸을 기댄 채, 조심스럽게 차에 타고 있었다.
  • 여자가 고개를 돌리자 임수연은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확인할 수 있었다. 심유찬이 잊지 못해 안달하던 그 첫사랑이었다.
  • 임수연의 입가에 비웃음 가득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 회사 업무로 바빠서 약속 시간에 늦은 줄 알았는데 첫사랑과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었다니.
  • 그녀가 돌아온 뒤로 심유찬은 매일 외박을 하며 그녀와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좋을까?
  • 여자를 태운 차가 떠난 뒤, 임수연은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 “오전 내내 기다렸어요. 아무리 바빠도 이혼서류 제출할 시간 정도는 있잖아요.”
  • 그녀를 본 심유찬의 얼굴에서 부드러운 표정이 사라지고 짜증과 불만이 가득 찼다.
  • “회사는 지금 중요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어. 이혼 스캔들 때문에 차질이 생기면 곤란해!”
  • 황당한 이유에 임수연은 헛웃음만 나왔다.
  • ‘이혼 스캔들보다 외간 여자랑 바람피우는 장면이 뉴스에 나는 게 더 곤란하지 않은가?’
  • 그녀가 뭐라고 하려는데 심유찬의 비서가 다가와서 중요한 회의가 있다면서 그를 재촉했다.
  • 그와 비서는 바쁘게 자리를 떴고 그 뒤로 심유찬은 또 종적을 감추었다.
  •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 임수연은 그에게 문자를 보내 4년이나 같이 살았는데 헤어질 때도 좋게 정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약속 시간도 같이 적었다.
  • 그날 오후, 그녀가 법원 앞에 도착했을 때, 아니나 다를까 심유찬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 차 문에 비스듬히 기댄 채 핸드폰을 보는 그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우아했다.
  • 이혼을 결심한 임수연이었지만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 하지만 그것도 잠시, 씁쓸한 기분이 설렘을 대체했다.
  • 만약 두 사람이 이 지경까지 올 줄 알았더라면 그녀는 다른 선택을 했을까?
  • 임수연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왼쪽 눈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녀의 왼쪽 눈이 실명 상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 그녀는 복잡한 마음을 안고 그에게 다가가서 이혼서류를 건넸다.
  • “저는 이미 사인했어요. 유찬 씨만 사인하고 제출하면 돼요.”
  • 심유찬은 잠시 놀라는가 싶더니 말없이 서류에 사인했다.
  • 절차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모든 절차를 마무리한 직원이 말했다.
  • “앞으로 한 달의 숙려 기간이 주어집니다. 한 달 사이에 이혼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신청을 철회할 수 있습니다.”
  • 직원은 바로 이혼 도장을 찍는 대신 숙려 기간이 주어졌다고 말했다.
  • “숙려 기간 따위는 필요 없으니까 오늘 마무리하면 안 될까요?”
  • 임수연은 하루빨리 이 절차를 끝내고 싶었다.
  • “안 됩니다.”
  • 직원이 머리를 흔들었다.
  • 임수연은 고개를 돌려 심유찬의 눈치를 살폈다. 상황을 들은 심유찬은 말없이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서류를 건네받아 거기에 사인했다.
  • 한 달이라는 시간이 주어져도 심유찬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절차를 마무리하는 시간이 지연되었을 뿐이다.
  • 사인을 마친 그녀는 심유찬을 쫓아가며 말했다.
  • “그럼 심유찬 씨, 한 달 뒤에…”
  • 그녀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심유찬은 쾅 하고 차 문을 닫았다.
  • 곧이어 그의 차가 찬바람을 일으키며 현장을 떴고 남겨진 임수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 ‘쪼잔하게 마지막까지 저러네.’
  • 그 자리에 잠시 서 있던 그녀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 “나 이혼했어. 이쪽으로 좀 와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