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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된통 당한 기분

  • 한은정이었다.
  • 그녀를 마주한 심유찬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 “넌 어떻게 왔어?”
  • “나는…”
  • “일단 상처 좀 처리할게.”
  • 인내심을 잃은 그는 한은정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 “네가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야. 너 안 돌아왔으면 내가 진유 때문에 미칠 것 같아.”
  • 조용한 곳에서 임수연은 자신의 옷차림을 가리키며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 오늘 컨셉도 진유가 강력하게 추천한 것이었다.
  • 남자는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여자한테 이런 이미지로 파티에 참석한 청년 재벌들의 주의를 끌 거라나...
  • 진유의 엉뚱한 성격을 잘 아는 고우송은 못 말린다는 미소를 지었다.
  • “진유랑 유라는 지금 어디 있어?”
  • “곧 도착해.”
  • 임수연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복도 끝 쪽에서 유라와 진유의 모습이 보였다.
  • 고우송을 본 유라가 반가운 표정으로 달려왔다.
  • “아저씨한테 인사해야지?”
  • 임수연이 말했다.
  • 유라는 대범하게 고우송의 손을 잡으며 인사했다.
  • “안녕하세요, 아빠.”
  • 임수연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유라의 뜻밖의 호칭에 놀란 고우송도 멍한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 진유만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그래, 아빠 맞지. 유라 잘했어.”
  • 그녀는 자신이 유라의 양엄마이니 고우송이 양아빠인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 “아빠, 저랑 저쪽에 가서 놀아요!”
  • 진유까지 괜찮다고 하자 유라는 앞에 있는 반짝이는 놀이터를 가리키며 고우송에게 말했다.
  • 고우송도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안아 들었다.
  • “그래. 우리 저쪽으로 가서 놀자.”
  • 임수연은 진유가 아이를 너무 오냐오냐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 그녀가 뒤따라가려는데 똥 씹은 표정을 한 심유찬이 다가왔다.
  • 그는 음침한 눈빛으로 임수연을 죽일 듯이 쏘아보며 말했다.
  • “당신은 애 교육을 어떻게 하는 거야? 당신이랑 만나는 모든 남자를 아빠라고 불러?”
  • 저번에 백현에게도 아빠라고 하던 유라의 모습이 떠올랐다.
  • 일부러 그녀와 다른 남자의 애정행각이나 구경하려고 다가온 건 아니었다.
  • 그냥 손의 상처를 처리하려고 나왔을 뿐인데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이야!
  • “그건 오해예요.”
  • 그의 날이 선 말투에 임수연은 저도 모르게 해명하려고 애썼다.
  • “유라는 그냥…”
  • “헤프게 살려면 당신 혼자 살아. 애까지 망치지 말고!”
  • 심유찬이 냉랭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 그제야 임수연은 정신을 차렸다.
  • 한 번도 그녀를 믿어준 적 없는 그인데 해명한다고 믿어줄까?
  • ‘내가 그 집에서 노예근성이 생겨버렸네.’
  • 그녀는 미소를 거두고 차가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 “유라가 왜 남자만 보면 아빠라고 부르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당신이 유라한테 아빠라는 호칭을 허락하지 않았으니까요. 유라는 다른 애들처럼 아빠의 사랑을 받기를 갈망해요. 그래서 만나는 남자마다 친근하게 아빠라고 부르는 거예요.”
  • “무슨 헛소리야? 내가 언제 유라한테 아빠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어?”
  • 심유찬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반박했다.
  • 임수연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잊었어요? 과거 유라가 갓 말을 시작할 때 당신에게 달려가서 아빠라고 불렀는데 당신은 뭐라고 했죠?”
  • 출생 당시 큰 병을 알았던 유라는 다른 아이들보다 발육이 한참 늦었다. 말문도 두 살이 된 뒤에야 트였다.
  • 아이가 똑똑한 발음으로 아빠를 불렀을 때, 그녀는 기쁜 마음에 아이를 안고 심유찬에게 다가갔다.
  • 하지만 그는 그녀의 바람처럼 아이를 칭찬하거나 예뻐하지 않았다.
  • 오히려 유라를 보자마자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꺼지라고 소리쳤다.
  • 그 기억이 너무 충격이었던 탓인지, 유라는 심유찬만 보면 긴장하면서 다시는 그를 아빠라고 부르지 않았다.
  • 다 지나간 일이지만 임수연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프고 속이 쓰렸다.
  • 그 얘기를 듣자 심유찬도 그날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 그는 단지 임수연에게 짜증이 났을 뿐, 유라가 같이 있다는 사실조차 간과했던 것이다.
  • “다른 사람에게 아빠라고 부르는 버릇이 좋다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심 대표님도 입장을 똑바로 하셔야죠. 애한테 아빠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으면 애가 다른 사람을 아빠라고 부르는 거 비난할 자격은 없잖아요!”
  • 슬픔을 뒤로 숨긴 그녀가 정색해서 말했다.
  • 할 말을 마친 그녀는 더 이상 볼 일이 없는 사람처럼 진유 일행이 사라진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 심유찬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손의 통증도 이제 느껴지지 않고 가슴에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무거웠다.
  • 숨이 막히고 머리가 아찔했다.
  • 진유는 유라랑 한참 놀아주다가 고우송의 성화에 못 이겨 집으로 돌아갔다.
  • 인터넷 방송계를 쥐락펴락하는 진유이지만, 그래서 많은 소년, 소녀팬들도 보유한 능력자였지만 고우송 앞에만 서면 얌전한 고양이가 되어버렸다.
  • 사고만 치고 다니던 진유가 드디어 사라지자 임수연은 그제야 지끈거리는 미간을 마사지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 사실 이런 사업가 모임에 관심도 없었던 그녀였다. 그래서 두 사람이 자리를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라를 안고 밖으로 향했다.
  • 진유랑 한참이나 놀며 체력을 소진한 유라는 눈을 비비며 끄덕끄덕 졸더니 어느새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버렸다.
  • 임수연은 사랑스러운 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주차장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했다.
  •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길가에 서 있는 심유찬이 먼저 보였다.
  • 그도 돌아가는 길이었다.
  • 그녀는 그를 못 본 것처럼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 이때 심유찬이 그녀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 “내가 데려다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