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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아이는 죄가 없다

  • 임수연은 하늘을 잠시 바라보았다.
  • 해가 서쪽에서 떴나?
  • “필요 없어요.”
  • 그녀는 본능적으로 거부했다.
  • 아까부터 표정이 좋지 않던 심유찬의 얼굴이 더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 “여기서 택시 잡기 힘들어. 애랑 같이 찬바람을 맞겠다는 거야?”
  • 물론 임수연은 그럴 생각 따위 없었다. 차를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유라를 뒷좌석에 눕히고 운전하자니 걱정스럽기도 했다.
  •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심유찬의 차로 다가갔다.
  • 그의 손에 난 상처를 본 그녀는 그가 운전석에 오르려 하자 담담하게 그를 제지했다.
  • “운전은 내가 할게요. 당신은 뒤에서 유라 좀 안고 있어요.”
  • “당신 운전할 줄 알아?”
  • 심유찬이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 그의 그런 반응이 우스웠다. 같은 집에서 4년이나 살았는데 얼마나 무시했으면 운전할 줄도 모른다고 생각했을까.
  • 더 말하기 귀찮아진 임수연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손에서 차키를 받았다.
  • 심유찬도 말없이 차에 올랐다.
  • 임수연이 그에게 아이를 건네자 그는 약간 어쩔 바를 몰라 허둥지둥했다.
  • “애 머리만 잘 받쳐주면 돼요.”
  • 임수연은 그의 팔을 잡으며 자세를 고쳐 주었다.
  • 그는 경직된 자세로 감히 움직일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 아이의 보송보송한 볼이 자신의 가슴에 닿자 이상한 느낌이 들면서 저절로 미소가 나오려고 했다.
  • 임수연은 말없이 운전석에 올라 차에 시동을 걸었다.
  • 그에게 자신의 거처를 알리기 싫었던 그녀는 택시가 잘 잡히는 곳까지 가서 차를 세웠다.
  • “도착했어요. 고마웠어요, 심 대표님.”
  • 말을 마친 그녀는 심유찬의 품에서 유라를 받아 안고 걸음을 옮겼다.
  • “임수연!”
  • 심유찬이 뒤에서 그녀를 불렀다.
  • “유라한테 못 해준 거 천천히 보상해 줄 거야. 하지만 내 딸은 다른 아빠는 필요 없어. 이게 내가 참아줄 수 있는 한계야!”
  • “도대체 그 보상을 어떻게 해줄지 궁금하긴 하네요.”
  • 걸음을 멈춘 임수연이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 “내일 이혼 철회한다고 기사 발표할 거야. 당신은 집으로 돌아와. 나는 유라한테 최대한 시간을 내볼게.”
  • “이혼을 철회할 거예요?”
  • 임수연이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 “그 결정, 한은정 씨와 상의는 한 거예요? 한은정 씨가 동의했나요?”
  • “걔 동의가 왜 필요해?”
  • 임수연과 대화만 하면 심유찬은 짜증이 치밀었다.
  • “두 사람 약혼한 사이잖아요. 이런 일은 약혼자한테 먼저 상의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 “약혼?”
  • 심유찬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을 재촉했다.
  •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돼! 다른 건 상관할 필요 없어!”
  • 임수연은 이러는 그의 태도에 진절머리가 났다.
  •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 “나를 사랑해서 이혼을 철회한다는 거예요?”
  • “내가 하는 모든 건 유라를 위한 거야! 유라가 온전한 가정에서 자라게 하고 싶어서!”
  • 심유찬은 고민도 없이 경고 섞인 대답을 했다.
  • ‘이럴 줄 알았지!’
  • 임수연은 가소로운 미소를 지었다.
  • “부모가 옆에 있는 게 아이한테 가장 좋을 거라고 생각하나 보죠? 하지만 이혼 가정에서 자라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 없이 아빠랑 둘이 살았지만 한 번도 불행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아빠는 나에게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줬고 나만 즐거우면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거든요. 우리는 4년이나 같이 살았고 유라도 올해 벌써 세 살이네요. 유라한테 행복했었냐고 물어볼 자신은 있어요? 당신 눈치 보느라, 당신 어머니 눈치 보느라, 당신 동생 눈치 보느라 유라는 항상 긴장감을 늦추지 못했어요. 당신들이 기분이 언짢으면 나한테 시비를 거니까! 당신들 비위를 맞추려고 그 나이에 좋아하는 춤까지 포기했어요, 유라는! 이런 숨 막히는 환경에서 계속 생활하라고 하는 게 유라한테 더 잔인한 일 아닌가요?”
  • 울분을 토하듯 말을 마친 임수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 “앞으로 변할 수 있는 것들이야.”
  • 심유찬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 “환경이 변하면 뭐가 달라져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잖아요? 유라가 자라면서 어떤 생각을 할 것 같아요? 자신의 존재 때문에 내가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한다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까요?”
  • 심유찬은 말문이 막혔다.
  • 그는 이혼을 철회하고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게 유라한테 가장 좋다고 확신했다.
  • “유라는 내가 잘 보살필 테니까 심 대표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 임수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이고는 밖으로 향했다.
  • 그날 심유찬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한은정의 거처에 들렀다.
  • 한은정은 심유찬을 보자 눈을 반짝이며 반갑게 그를 맞아주었다.
  • “유찬아, 어서 들어와.”
  • 심유찬은 무표정한 얼굴로 핸드폰을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 “SNS에 올린 이 사진들 전부 삭제해 줘.”
  • 한은정은 고개를 숙이고 약혼을 암시하는 듯한 자신의 게시물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 “미안해, 유찬아. 그냥 예전이 너무 그리워서 그만… 사진에 조회수가 이렇게 많이 몰린지도 몰랐어.”
  • 말을 마친 그녀는 조심스럽게 심유찬의 눈치를 살폈다.
  • “이게 다 임수연 그 여자 때문이잖아. 그 여자가 그때 나를 곤란하게 하지만 않았어도 우리…”
  • “우리 사이의 일에 임수연 끌어들이지 마.”
  • 심유찬이 차갑게 경고했다.
  • 오늘만큼은 다시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이었다.
  • “그리고 우리 사이, 4년 전에 이미 끝났어. 지금은 그냥 친구일 뿐이고.”
  • 할 말을 다 한 그는 미련 없이 밖으로 향했다.
  • 등 뒤에 선 한은정은 손바닥에 피가 나도록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예쁘장한 얼굴이 이미 보기 싫게 일그러져 있었다.
  • 돌아온 뒤로 다시 만나자는 의사는 전혀 밝히지 않고 조심스럽게 그의 주변을 떠돌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그의 마음을 다시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 그도 자신과 같은 생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차갑게 두 사람의 관계를 정의해 버릴 줄은 몰랐다.
  • ‘임수연 때문일까?’
  • 이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 한은정은 짜증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내가 무슨 소식 들었는지 알아? 글쎄 그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유성그룹 심유찬이 전처랑 이혼을 철회하겠다고 했다는 거야. 네가 모르고 있을 것 같아서 일부러 전화했어. 너의 백마 탄 왕자님은 멀리 도망갈 생각만 하고 있는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