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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돈으로는 아무한테도 지지 않아

  • “매장에 있는 미디움 사이즈의 옷들, 전부 포장해 주세요!”
  • “네?”
  • 매장을 인수하는데는 실패했지만 심유월은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그녀의 옷 사이즈가 미디움이었다!
  • 진유는 그녀에게 이 매장에서 쇼핑할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 “네, 알겠습니다.”
  • 고객이 옷을 구매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기에 그들은 심유월의 눈 밖에 날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어마어마한 실적의 유혹이 너무 컸다.
  • 한 디자인에 사이즈는 하나씩만 나왔지만 모두 구매한다면 적어도 4억 정도였다. 한적한 시골에 괜찮은 집 한 채 정도는 구매하고도 남을 돈이었다.
  • 심유월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임수연을 위해 대범하게 돈을 쓰는 진유를 보자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 “아무 상관도 없는 여자 때문에 돈을 헛되이 쓰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
  • 밖으로 나온 임수연이 정색해서 말했다.
  • 심유월의 말에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던 그녀였다.
  • 하지만 진유는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 “네 앞에서 재수 없게 굴잖아. 어차피 저 여자도 유성그룹 믿고 저러는 건데, 너한테 돈이 부족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어! 아니, 애초에 네가 부자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돈으로 혼내줬으면 저 인간들 4년 동안 네 발밑에서 기어 다녔을걸?”
  • 진유는 임수연이 4년 동안 겪은 수모를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렸다.
  • 사실 임수연은 천만 팬을 보유한 유명 비제이이자, 스타업 엔터의 대표였다.
  • 진유는 그녀의 대리인일 뿐이었다.
  • 임수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사실을 심유찬에게 말하려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도 채 듣지 않고 자리를 떠나는 심유찬이었기에 그럴 기회가 없었다.
  •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다 보니 말을 꺼내기도 귀찮아졌다.
  • 그날 밤, 심유찬은 장문혁의 집으로 갔다.
  • 이날은 한 달 전 출산한 장문혁 누나가 딸의 탄생 파티를 여는 날이었다.
  • 심유찬은 소파에 앉아 장문혁의 매형이 아이를 안고 달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남자는 비싼 정장이 구겨지든 말든 서툴게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갑자기 딸 유라가 떠올랐다.
  • 그러고 보면 그는 한 번도 딸의 기저귀를 갈아준 적 없었다.
  • 그런 비열한 방법으로 결혼을 강요한 임수연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 그녀가 임신했다는 소식은 그의 분노를 더 키웠을 뿐이었다. 그래서 모든 시간을 일에 쏟아붓다 보니 딸과 가까워질 시간이 없었다.
  • “나는 아빠로서 자격이 없는 사람인 걸까?”
  • 그가 장문혁에게 물었다.
  • 느긋하게 술을 마시던 장문혁이 잔을 내려놓고 정색해서 말했다.
  • “남편 노릇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
  • 심유찬은 멈칫하며 친구를 바라보다가 이내 발끈하며 말했다.
  • “내가 결혼하자고 부탁한 게 아니잖아!”
  • 그는 임수연이 자신에게 저지른 짓만 생각하면 지금도 분노가 치밀었다!
  • 장문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그렇지. 네가 결혼하자고 조른 적은 없지. 하지만 생판 모르는 남이라도 힘든 상황에 처한 걸 보면 도와주는 게 당연하잖아. 네 마누라 출산할 때 과다출혈로 죽을 뻔하고 애까지 죽음의 문턱에 갔다가 돌아왔어. 그때 네 마누라 얼굴을 봤는데 얼굴에 핏기도 없는 아이를 안고 의사 앞에 무릎 꿇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더라. 의사가 가망이 없다고 하니까 바닥에 머리까지 조아렸어.”
  • “그런 일이 있었다고?”
  • 심유찬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장문혁을 바라보았다.
  • “내가 거짓말을 하겠어? 유라는 감염 때문에 투석을 해야 했는데 하필이면 희귀 혈액형이었잖아. 병원 혈액 저장실에는 RH 혈액형이 없었고. 겨우 기증자를 찾아서 해결했어. 유라 그때 죽을 뻔했어. 수혈을 받지 못하면 죽을 상황이었기 때문에 임수연 씨가 그렇게 절망했던 거야.”
  • 그때 다른 일로 병원을 방문했던 장문혁이었기에 그때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처음에는 그도 임수연에게 별로 호감을 느끼지 못했지만 그 모습을 보고 점차 그녀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 그 말을 들은 심유찬은 한참이고 말이 없었다.
  • 그날 저녁 임수연에게서 왔던 수많은 부재중 전화가 떠올랐다. 그때는 또 전화해서 헛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했기에 받지 않았었다.
  • 그 뒤로는 이 일을 까맣게 잊었다.
  •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아마 그녀가 출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을 것이다!
  • 그녀는 그때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일까? 유라를 살려달라고?
  • ‘그래서 오늘 그런 말을 했던 거였어?’
  • 갑자기 가슴 근처가 저릿하게 아팠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밖으로 달려 나갔다.
  • “유찬아!”
  • 마침 곽지훈과 함께 이쪽으로 오던 한은정이 그를 보고 다급히 불렀다.
  • 하지만 심유찬은 본 척도 하지 않고 그녀를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 “어떻게 된 거야? 너 유찬이한테 무슨 말을 했기에 애가 저래?”
  • 곽지훈이 씩씩거리며 장문혁에게 다가가서 따졌다.
  • 장문혁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 “할 말이 뭐가 있어? 임수연 과거에 대한 일이었지.”
  • “너는 정말!”
  • 곽지훈이 어이없다는 듯이 그를 비난했다.
  • “은정이가 누구 때문에 돌아왔는지 알면서 그런 말은 왜 했어?”
  • “유찬이가 자기 마음을 똑바로 들여다보길 바랐을 뿐이야! 같은 잘못을 두 번 반복하게 할 수 없어서!”
  • 장문혁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한은정을 힐끗 바라보며 대답했다. 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 한은정은 심유찬이 앉았던 빈자리를 일렁이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한편, 자신의 이혼 때문에 유라가 상처받았을까 봐, 임수연은 며칠 동안 유라와 붙어 있다가 오늘에야 유치원에 보냈다.
  • “엄마, 다녀올게!”
  • 유라는 발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인사하고는 아장아장 유치원으로 향했다.
  • 귀여운 딸의 모습을 보자 임수연은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 유라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그녀는 뒤돌아섰다. 멀지 않은 곳에 심유찬이 서 있었다.
  • 아이 유치원에는 한 번도 방문한 적 없던 그였는데 오늘은 어찌 된 일로 왔을까?
  • 임수연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 “여긴 어떤 일이에요, 심 대표님?”
  • 심유찬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에 와서야 그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 손바닥 만한 작은 얼굴과 군더더기 없이 완벽한 이목구비.
  • 참 예쁜 여자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그에 비해 몸에 살이 너무 없었다.
  • “유라 태어났을 때 당신 과다출혈 때문에 고생했다면서? 유라는 투석하다가 죽을 뻔하고. 왜 한 번도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어?”
  • 그가 정색해서 물었다.
  • 임수연은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에게서 이런 질문이 나올 줄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 “나에게 당신이 필요할 때 오지 않았잖아요. 이제 와서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죠?”
  • 그녀는 일부러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속상한 마음을 몰래 감추었다.
  • 심유찬은 그 말을 듣고 한참 침묵하다가 지갑에서 지표 한 장을 꺼내 건넸다.
  • “그때 돌봐주지 못한 보상이라고 생각해.”
  • 임수연은 셀 수 없는 0이 붙은 그 지표를 한참 바라보았다.
  • ‘통은 참 크네.’
  • 그가 이 일을 알고 어떤 태도를 보일지 생각해 본 적 있었다.
  • 그래도 아이를 위해 사과 한마디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돈으로 해결하겠다니?
  • ‘내가 또 헛된 기대를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