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윤, 그 남자 내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너한테 손 댄 거 후회하게 해줄 테니까.”
말을 마친 그는 홱하고 뒤돌아 떠났다. 프로젝트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않은 채 말이다.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사라지자 한지윤은 배서영에게 매달리며 배고프다 칭얼댔다. 배서영은 유경험자라 그녀의 목에 새겨진 키스마크가 뭘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지윤아, 너 남자친구 생겼어?”
“남자친구요? 그건 아니긴 한데.”
어른들에게 제 사생활로 걱정을 끼쳐드리기 싫었던 한지윤은 대충 둘러댔다.
“엄마는 걱정 안 해도 돼요. 저 지금 제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요. 지금처럼 머리가 선명했던 적도 없어요.”
배서영은 그래도 조금쯤 아쉬운 마음이 남았다.
“너 차 서방이랑 다시 화해할 가능성은 없는 거야? 아까 보니까 차 서방은 너 그래도 계속 신경 쓰는 눈치던데.”
여태 말을 안 하고 있었던 이문희가 곁에서 작게 소리를 냈다.
“왜 화해해야 되죠? 제 앞에 얼마나 드넓은 숲이 펼쳐져 있는데 굳이 한 그루 나무에만 매달릴 필요 없잖아요.”
“지윤이 잘했어. 우리 한 씨 가문의 여자들은 과감히 내려놓을 줄도 아는 사람이야. 할머니는 너 응원한다.”
한지윤은 할머니를 끌어안으며 뽀뽀를 쪽 남겼다.
“역시 우리 할머니야. 너무 영명하세요.”
흉흉한 기세로 한 씨 저택에서 나오는 차진우를 본 박우영이 재빨리 차 문을 열었다.
허리 굽혀 차에 올라탄 차진우는 쉴틈 없이 지시했다.
“한지윤이랑 가깝게 지내는 남자 지금 당장 다 찾아내.”
응? 프로젝트 건으로 여기까지 찾아온 거 아니었나? 갑자기 웬 남자? 의문이 들었지만 차진우가 뿜어내는 노기가 워낙 짙어 박우영은 물어볼 생각도 못하고 알겠다 대답했다.
차에 시동을 걸자마자 오희민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진우 오빠, 지윤 언니가 도와주겠대요?”
차진우는 그제야 화를 내느라 여기로 온 목적을 하나도 해결 못 했음을 알았다.
할머니와 어머니랑 같이 점심을 먹은 뒤 한지윤은 새로 옷을 갈아입고 회사로 출근했다. 오후에 영상 미팅이 잡혀 있었는데 혜성 그룹 산하의 한 투자회사에 문제가 조금 생겼기 때문이다.
미팅이 시작되고 연달아 이어지는 직원들의 책임전가에 한지윤은 손을 내저었다.
“고작 이 정도 문제도 해결 못하는 걸 보니 다들 혜성 그룹에 남아있을 자격이 없는 듯합니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자진 사퇴하시면 위약금 외에도 반 년치 월급을 별도로 더 드리겠습니다.”
영상 속 사람들이 일제히 멍한 눈빛을 했다.
그리고 두 시간 뒤, 새로운 계획서가 짠하고 나타났다.
영상 미팅이 끝난 후 비서실장 주민식이 서류를 안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대표님, 여기 성남 프로젝트 계약서입니다. 한번 보시죠. 그리고 상일 프로젝트 책임자가 대표님을 10분이라도 좋으니 만나뵙고 싶어 하십니다.”
상일 프로젝트가 바로 차진우가 그녀의 손에서 뺏어가 자신의 내연녀인 오희민에게 넘겨준 그 프로젝트였다.
“시간 없다고 하세요. 그리고 저희쪽 문제가 아니면 인정할 필요 없으니 굳이 사서 남의 걱정하지 말라고들 전하세요. 상일 프로젝트가 오희민 씨 손에서 적자 나면 차 대표님한테서 프로젝트를 다시 가져올 방법이 차고 넘치니까. 그런데 만약 저희쪽 문제가 맞다면 관련된 사람들은 이제 회사에 필요 없으니 다들 짐 싸고 나가라고 하세요.”
주민식은 한지윤의 곁에서 일 년여를 일하면서 상대가 일적으로 얼마나 단호한 사람인지를 잘 알았다. 고작 20대 초반인 그녀는 사업장에 있어 그 수단이 절대 남자 못지 않았다. 심지어 어떨 때 보면 남자보다도 더 일을 깔끔하게 잘 처리했다.
비록 혜성 그룹에서 일하면서 업무적으로 스트레스는 많이 받지만 그래도 대우는 업계에서 좋기로 소문나 불만있을 이유가 없었다.
주민식은 별다른 말 없이 한지윤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전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송세희가 들어왔다.
“대표님, 송민규 씨 건강검진 다 마쳤습니다. 이제 더팰리스로 가라고 할까요, 아니면…”
“벌써요?”
한지윤이 놀라서 반문했다.
당연히 빠를 수밖에 없는 게, 한지윤이 송민규의 스폰을 제안하고 나서부터 일루젼 전체가 부러움에 휩싸였다. 필경 돈 많은 사모님은 널렸을지 몰라도, 예쁘게 생긴데다가 나이까지 어린 사모님은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들 한지윤이 얼마 전에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제 그녀의 눈에 들기만 하면 송민규는 평생, 아니, 어쩌면 다다음 생까지도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라며 다들 부러워했다.
더팰리스는 한지윤의 개인 거처였기에 외부 사람을 들이기 꺼려했다. 그녀는 대충 지시했다.
“코히스 별장을 정리해서 거기에서 당분간 살라고 하세요.”
“네.”
한지윤은 곧바로 이 사실을 잊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는 일이 너무나도 바빴기 때문이다.
바로 당일날 저녁, 한지윤은 비행기를 타고 남쪽 도시로 출장을 갔다가 3일 뒤에야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더팰리스로 돌아와 샤워를 하면서 깨끗해진 목덜미를 본 후에야 문득 송민규를 떠올린 한지윤은 그대로 코히스 별장으로 향했다.
저녁이 다가오고 있는 시각, 별장에 들어선 한지윤은 하얀 셔츠를 입은 채 정원에서 물을 주고 있는 키 크고 마른 남자를 발견했다. 호스를 손에 들고 허리를 조금 굽힌 남자의 옆모습이 많이 슬림해 보였다. 손목도 그녀의 손목보다 크게 굵어 보이지 않았다.
예쁜 아몬드 눈이 가늘게 접혔다.
뭐야… 저 몸으로 나를 이리저리 돌렸다고? 그날밤의 역삼각형 몸매보단 조금 말라 보이는 것 같은데, 설마 옷태가 좋아서 그런 것이고 벗으면 잔근육이 박힌 몸매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