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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신혼집을 팔다

  • 비틀거리며 밖에서 돌아온 한지윤을 보며 차진우는 미간을 불쑥 구겼다.
  • “술 마셨어?”
  • 한지윤은 그의 물음을 무시한 채 하이힐을 차버리고는 외투를 꼭 여미며 푹신한 소파 속으로 몸을 던졌다. 이미지라고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 차진우라고 뭐 그녀의 이런 천하디 천한 꼴보기 싫은 모습들을 처음 본 건 아니었다. 우아하면서도 지적이든, 아니면 거칠고 오만하든 차진우는 더는 그녀에게 눈길 하나 주고 싶지 않았다.
  • 이미 이혼까지 한 마당에 하고 싶은 대로 하라지.
  • 한지윤은 정말 너무 힘들고 피곤한 나머지 전남편과 실랑이질을 하고 싶은 마음이 일도 없었다.
  • “뭔데, 얘기해.”
  • 척 보기에도 파티에 놀러갔다가 방금 들어온 게 알리는, 완벽한 메이크업이 되어있는 여인을 보며 차진우는 속이 복잡해졌다. 충격을 받고 의기소침해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잘 살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편감을 삼키며 차진우는 제가 온 목적을 얘기했다.
  • “우리 같이 협력하고 있는 그 프로젝트 있잖아. 그거 문제가 좀 생겨서 그러는데 네가 나중에 좀 해결…”
  •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지윤에게서 차가운 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 “나보고 해결하라고? 차 대표님 머리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그 프로젝트 책임자가 네가 그렇게 아껴마지않는 네 자기잖아.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고 네 전처한테 와서 해결하라고 하는 거, 말이 된다고 생각해?”
  • 얘기하다 보니 한지윤은 문득 화가 치밀었다.
  • 이 프로젝트는 그녀가 팀을 이끌고 정말 힘겹게 따낸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그걸 차진우가 중간에서 가로채서 자신의 애인한테 홀랑 갖다바쳤다.
  • 그 일로 한지윤은 완전히 상심하게 되었고 끝내 이혼을 결심하게 됐다. 아무리 따뜻하게 품고 있어도 데워지지 않는 이 돌 같은 남자를 떠나기로 마음 먹은 것이었다.
  • 이런 상황에서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겼다고 쭐레쭐레 달려와서 전처한테 도움을 요청하는 꼴이라니, 그것도 이렇게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아직도 저를 예전의 차진우밖에 모르던 한지윤으로 보는 그의 모습에 한지윤은 소파에서 일어나 미련없이 떠나려 했다.
  • 그때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젊은 여성 뒤로, 한 쌍의 중년부부가 뒤따르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낯선 사람들의 방문에 차진우의 잘생긴 미간에 주름이 새겨졌다.
  • “당신들 누구시죠? 어떻게 저희 집 키를 갖고 있는 겁니까?”
  • 한지윤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 “이분은 부동산 중개사야. 내가 이 집 내놨거든.”
  • 차진우는 제가 들은 게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 “뭐라고? 너 지금 우리 신혼집 팔겠다는 거야?”
  • 한지윤이 눈썹을 위로 들썩였다.
  • “아니면, 이혼까지 했는데 집은 남겨둬서 볼 때마다 속 썩이게?”
  • 그녀는 이곳에 얽힌 사람과 물건 모두를 버릴 생각이었다.
  • 신혼집에서 나온 한지윤은 차마 본가에 갈 수가 없었다. 돌아가면 어머니의 눈물을 마주할 생각하니 무서웠기 때문이다.
  • 한지윤은 송세희한테 부탁해서 자기를 더팰리스에 데려다 달라고 했다. 거긴 한지윤의 어머니인 배서영이 결혼할 때의 혼수로 지금은 그녀한테 물려줬다.
  • 집사는 돌아온 한지윤을 직접 마중하며 그녀의 외투를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도우미한테 지시해서 목욕물을 받게 했다. 한지윤이 제일 좋아하는 아로마 향초를 켜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 한지윤은 계단을 오르며 귀걸이를 떼어내 송세희한테 건네줬다. 나른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저 너무 피곤해서 그런데 마사지 좀 안배해 주세요.”
  • 송세희는 두 손으로 그녀의 귀걸이, 시계, 반지 등 액세서리들을 받아들며 공손하게 얘기했다.
  • “이따가 뜨거운 우유 한 잔도 같이 올리겠습니다.”
  • 한지윤은 또 느른한 말투로 ‘네’하고 대답했다.
  • 간단히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마사지 침대에 누운 한지윤은 마사지사에게 몸을 맡겼다. 마사지사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정성들여 그녀의 전신을 마사지했다.
  • 이 마사지사는 한지윤이 직접 부리고 있는 사람으로 오직 그녀의 마사지만 책임지고 있는 한지윤 전담 마사지사였다. 마사지사는 그녀의 몸을 뒤덮고 있는 흔적에도 잠시 멈칫했을 뿐 잘 교육된 사람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꼼꼼한 마사지를 끝낸 후 마지막 전신관리까지 들어갔을 땐, 한지윤은 이미 잠든 뒤였다.
  • 그 순간 휴대폰 벨소리가 마사지실에 울려 퍼졌다.
  • 혜성 그룹의 대표로서 한지윤의 휴대폰 두 개는 24시간 항시 대기상태였다. 방금 울린 건 그녀의 개인용 휴대폰이었다.
  • 낯선 번호에서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 “약속했던 별 다섯 개는요?”
  • 한지윤은 발갛게 물든 손가락으로 휴대폰 화면을 터치했다.
  • “별 다섯 개?”
  • 2초 뒤, 그녀의 기억속으로 힘 있는 팔뚝이 불쑥 쳐들어왔다.
  • 한지윤은 곁에 있던 송세희에게 물었다.
  • “어제 그 사람 이름 뭐였죠? 송…”
  • 송세희와 성씨가 같기 때문에 간신히 상대의 이름 첫 글자가 떠올랐다.
  • “송민규입니다. 대표님께서 그분 이름이 얼굴처럼 잘생겼다고 칭찬까지 하셨습니다.”
  • 예쁜 한지윤의 아몬드 눈이 곱게 접혔다.
  • “그랬나요? 기억이 전혀 안 나요.”
  • 어제 김주현이 그녀의 이혼을 축하한다고 일루젼에 데려가 젊고 잘생긴 남자들로 한 줄 쫘악 룸에 불러들였다. 그중에서 한지윤은 마지막으로 송민규 하나만 남기고 다 돌려보냈다.
  • 송민규는 갓 이곳에 발을 들인 대학생이라 자신을 소개했으며 전체적으로 깔끔하게 생긴 편이었다. 딱 보기에도 복잡한 사회물에 아직 더렵혀지지 않은 태가 났다.
  • 그렇게 술자리가 이어졌고 한지윤은 빠르게 취해갔다. 결국 남자와 잠자리까지 하게 될 줄은 그녀로써도 예상 못한 일이었다.
  • 뭐, 될대로 되라지. 어차피 한지윤은 재혼할 생각이 없었다. 차진우 하나 때문에 그녀는 사랑과 결혼에 대한 모든 로망이 완벽하게 사라져 버렸다. 차라리 파트너를 찾아 사랑 받고 예쁨 받다가 말을 잘 안 들으면 또 새걸로 바꾸는 게 더 낫지 않나?
  •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한지윤은 송세희에게 말했다.
  • “내일 송민규한테 찾아가서 제가 스폰하겠다고 전해 주세요. 그리고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 시키고. 아 참, 담배는 무조건 끊으라고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