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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그 남자 누군데?

  • 응? 잠깐 멈칫한 송세희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 “알겠습니다.”
  • 한지윤은 짧은 지시를 마친 뒤 더는 생각을 않고 자러 방으로 돌아갔다.
  • 전화 너머의 남자는 답장을 받지 못했으나 얇은 입술에 애정 어린 호도를 그렸다.
  • ……
  •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 “대표님께서 모처럼 돌아오셨다고 회장님께서 크게 연회를 여실 생각이십니다. 그 자리를 빌어 대표님을 가문의 친인척분들께 얼굴을 읽힐 겸 소개를 시켜드릴 예정이라고 하셨습니다.”
  • 남자의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내가 한국으로 들어온 일은 잠시 알리지 말자고 해. 연회도 나중에 다시 안배한다 하고. 그리고 돌아가는 시간도 좀 더 미뤄 줘. 잠시 사적인 일을 처리해야 될 게 있어서, 날짜는 정해지면 알려줄게.”
  • 비서는 전혀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 “네. 지금 바로 안배하겠습니다.”
  • ……
  • 한잠 푹 자고 일어났을 때 밖은 이미 훤한 대낮이었다. 오후에 돼야 스케줄이 있는 탓에 송세희는 일부러 그녀를 깨우지 않았다.
  • 계단을 내려오는 한지윤을 발견한 송세희가 다가와 말을 했다.
  • “대표님, 사모님께서 지금 당장 들어오시랍니다.”
  • “무슨 일인데요?”
  • “차 대표님께서 건너가신 것 같습니다.”
  • 한지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쓰레기 새끼, 결국은 나한테 뒤치다꺼리를 시키기 위해 그런 거잖아.’
  • 예전에는 명절 때에도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았던 사람이, 내연녀 때문에 이혼한 전처의 본가까지 방문하는 정성을 아끼지 않는 모습에 한지윤은 신물이 났다.
  • 이혼하면 이제 두 사람이 얽힐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왜서인지 이혼 전보다 더 자주 만나는 것 같았다. 사람의 속을 뒤집어 놓는데 정말 타고난 재능을 가진 차진우였다.
  • 본가에 도착했을 땐 마침 점심식사 때였다.
  • 한지윤의 하이힐 소리가 거실의 어색한 분위기를 깨뜨리자 한 씨 가문의 두 여자는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한 씨 가문에는 남자가 없었다. 한지윤의 할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난지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나셨고, 그녀의 아버지도 한지윤이 18살이 되던 해에 차 사고로 돌아가셨다. 때문에 한 씨 가문의 모든 짐을 그녀가 짊어졌다.
  • 한지윤의 할머니와 어머니는 그녀를 보더니 한시름 덜은 표정을 했다.
  • “갑자기 우리 집엔 왜 왔어?”
  • 차진우의 방문 이유를 알았지만 일부러 쌀쌀맞게 물었다.
  • 이혼 후의 한지윤은 마치 온몸에 가시를 두른 것 같았다. 차진우의 미간이 주름을 만들었다.
  • 두 사람이 다툴까 봐 걱정되었던지 배서영이 얼른 나서며 분위기를 수습했다.
  • “지윤아, 차 서방이 우리 보러 왔대. 그래도 손님인데 말투 좀 이쁘게 해.”
  • 배서영은 본디 성격이 유한 사람이었다. 결혼 전에는 부모님의 사랑을, 결혼 후에는 시어머니와 남편의 사랑을, 남편이 사라진 후에는 딸의 사랑을 듬뿍 받아 세상 물러터져 가을 떨어지는 낙엽을 봐도 눈물을 훔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의 앞에서 한지윤은 아무리 성질이 나는 상황이어도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 차진우는 바로 그런 점을 잘 알고 본가로 쳐들어와 그녀를 핍박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 도우미가 가져다 준 슬리퍼로 갈아신고 외투를 벗은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어머니의 부탁대로 ‘이쁜 말투’를 시전할 생각이었다.
  • 그러나 그녀가 미처 입을 떼기도 전에 차진우가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의 팔을 확 낚아챘다. 그의 시선이 눈앞의 목덜미에 꼿꼿이 내리꽂히며 눈동자가 커졌다.
  • “너 목에 그거 뭐야?”
  • 간밤에 새겨진 키스마크가 하루가 지났는데도 사라지지 않고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 한지윤은 그의 반응에 웃음이 나왔다.
  • “뭐야, 왜 그렇게 흥분해? 너랑 뭔 상관인데?”
  • 아무렇지 않은 그녀의 태도에 차진우는 더 화를 냈다.
  • “한지윤, 너 목에 난 거 뭐냐고 물었다?”
  • “맞춰 봐.”
  • 차진우가 궁금해 할수록 한지윤은 더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 웃기기도 하지. 결혼하고 나서 그녀를 역겹다는 이유로 내버려두고 신혼 첫날밤부터 내연녀를 안고 밖에서 뒹군 주제에, 어디 이제 와서 신경 쓰이는 척한단 말인가. 결혼생활 내내 그녀를 독수공방하게 만든 장본인이 누군데.
  • “너 어떻게 감히…”
  • 차진우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찢어발길 기세로 쏘아봤다.
  • “한지윤, 네가 어떻게 감히 나한테 이래? 누구야, 그 남자 누군데?”
  • 한지윤은 어이없다는 듯 그의 손을 내쳤다.
  • “못 할 게 뭐 있어. 네가 뭔데?”
  • 아침도 못 먹은 한지윤은 그저 배가 고파 빨리 눈앞의 사람을 치워버리고 식사하고픈 마음뿐이었다.
  • “다시 한 번 정중히 얘기하는데,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겼으면 그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찾아가. 우리 혜성 그룹의 문제면 우리쪽 책임자한테 직접 연락하라고 해. 나 바쁜 사람이야. 조그만 문제가 생겼다고 다 사장인 나한테 들고와서 따지면 그 많은 직원들을 내가 왜 먹여 살려야 되는데?”
  • 빠르게 말을 내뱉은 한지윤이 손님 배웅을 지시했다.
  • “아줌마, 손님 배웅해 드리세요.”
  • 차진우의 시선은 상대의 목에 새겨진 키스마크에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마치 그렇게 하면 그 피부를 불태울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 차진우 자신도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계속 벗어나고 싶었던 여인이고, 지금은 드디어 그의 소원대로 벗어나게 됐는데도 그녀의 목에 남겨진 다른 남자의 흔적을 보고 있노라니, 차진우는 그 남자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치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