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안 대표가 정말로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일이 잘못되면 그는 정말로 안 대표님의 말대로 Y시티에서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안 대표님의 세력으로 그 같은 단역을 해결하는 건 몇 분이면 충분하다.
다만 그는 임예향이 우준과 그런 관계가 있으면서 왜 작은 회사의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비록 그의 마음속은 의문투성이였지만 안 대표님의 말은 전혀 의심할 수 없었다.
“임예향 씨,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유해산은 빠른 걸음으로 뛰어나가 임예향을 따라잡았다.
“뭐하려고요?”
임예향은 경계하며 유해산을 쳐다보았다. 방에서 나왔으니 유해산은 감히 손찌검을 하지 못할 것이다.
“임예향 씨, 정말 죄송해요. 아까는 제가 어리석었어요. 당신의 신분을 몰랐어요. 저를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당장 계약을 체결할게요.”
유해산은 쫄개 마냥 굽신거리며 억지로 웃고 있었다.
“네?”
임예향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유해산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 하는지 몰랐다.
“이렇게 하죠. 가격은 당신들이 제시했던 원가로 해요.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지금 당장 홀에 자리를 잡고 계약을 체결합시다.”
임예향이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을 보자 유해산은 다급해졌다.
안 대표님은 불호령을 내리셨다. 그가 만약 당장 이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면 큰 코를 다칠 것이다.
“유 매니저님, 진심인가요?”
임예향은 어리둥절해 하며 유해산을 쳐다보았다. 설마 방금 뺨을 맞고 정신이 어떻게 된 건 아니겠지.
“임예향 씨, 내가 농담하는 것처럼 보이나요? 사실 아까 그 전화는 우리 안 대표님이 하신 건데 이 업무를 무조건 당신에게 주라고 하셨어요. 임예향 씨, 큰 인물을 알고 있으면서 왜 일찍 말하지 않으셨나요, 진작 말을 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유해산은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큰 인물을 안다구요? 당신네 안 대표님이요? 저는 그 분을 모르는데요.”
임예향도 어리벙벙했다. 그녀가 정말 큰 인물을 안다면 이렇게까지 어렵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 대표님이 아니라 안 대표님도 무조건 체면을 세워줘야 할 대단한 인물이요.”
유해산은 엄지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키며 상대는 Y시티의 제일 갑부라고 표현했지만 아쉽게도 임예향은 전혀 그의 뜻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임예향이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관건은 임예향은 끝내 고개를 끄덕이며 계약을 하기로 결정했다.
임예향은 계약을 체결한 뒤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건 정말 큰 계약이다. 판명이가 한 달 넘게 따라다녀도 따내지 못한 큰 계약!
그런데 그녀가 따내다니?
그녀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 계약을 따내면 판명은 그녀의 200만 원 상당의 상여금을 차감할 이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녀는 1000만 원 좌우의 인센티브까지 받을 수 있다.
다만, 그녀는 도대체 누가 뒤에서 그녀를 도와주었는지 정말 알지 못했다.
판명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자기가 해결하지 못하는 업무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겠는가? 그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진작 이 계약을 따냈을 것이다.
그럼 누굴까?
임예향은 한참 동안을 고민했지만 끝내 누가 자신을 도와줬는지 생각해내지 못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는 전혀 우진이가 이 일을 도와줬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됐어, 나중에 기회가 되어 누군지 알아내면 그때 가서 제대로 고맙다는 인사를 드려야지.”
임예향은 누군지 알아내지 못하고 흥분한 마음으로 회사로 복귀했다.
임예향이 계약을 체결하고 떠난 뒤 유해산은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곧바로 안 대표님께 전화하여 상황을 보고했다.
비록 안 대표님은 또 그를 한바탕 훈계했지만 다행히 안 대표님의 말투는 그리 딱딱하지 않아 그는 한시름을 놓았다.
유해산은 생각해 보더니 또 판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판명, 네 이놈이 고의로 나를 골탕 먹인 거 맞지?”
전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유해산은 뱃속에 가득 찬 화를 판명에게 쏟아 부었다.
앞서 판명은 그와 미리 짜고 그의 마음에 들 만한 업무원을 보낸다고 약속했다. 미녀가 온 것은 맞다, 게다가 보기 드문 절색 미녀였다.
그러나 온 여자는 그들 대표님조차도 건드리지 못하는 사람인데 이건 그를 골탕 먹이는 것이 분명하다.
“네? 유 매니저님께서 왜 그렇게 말씀하시나요?”
판명은 얼떨떨해서 유해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판명, 우리 떳떳한 사람끼리 뒷공론을 하지 말자. 그 임예향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야? 왜 우씨 갑부도 그녀의 편을 드는 거야?”
유해산은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별 특별한 것 없고 그저 보통 업무원인데요. 그녀는 아마 우씨 갑부를 만나본 적도 없을 거예요.”
판명은 이해가 안 되는 듯 말했다.
“판명, 네 이 X자식, 이맘때쯤 됐는데 넌 아직도 내 앞에서 시치미를 떼는 거야? 그녀가 우씨 갑부와 상관없다면 우씨 갑부가 친히 우리 안 대표님에게 전화를 했겠니? 판명, 내가 경고하는데 너 때문에 내가 안 대표님한테 해고당할 뻔 했으니 넌 앞으로 우리 회사의 업무를 따낼 생각 하지 마!”
유해산은 씩씩 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한편 판명은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다.
임예향과 우씨 갑부가 아는 사이라고?
우씨 갑부가 안 대표님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이 일을 얘기했다고?
그는 이 사실을 전혀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아무리 궁리 해봐도 합리적인 해석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임예향에 대해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우진이가 전에 했던 말이 생각나자 판명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우진이가 무슨 수를 써서 도와준 건가?
우씨 갑부기는 개뿔, 우진 그놈이 사칭한 것이 틀림없다.
유해산아 유해산, 너는 정말 똥멍청이구나, 남한테 농락당한 줄도 모르다니. 너 같은 놈이 어떻게 그린 시티 부동산 프로젝트 매니저라는 자리에 올랐는지 정말 의심스럽구나.
판명은 고개를 저으며 경멸의 눈빛을 내비쳤다.
...
임예향이 그린 시티의 부동산 업무를 따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회사에 퍼졌다.
특히 영업팅에서 많은 사람들은 믿지 못했다.
그것은 판명 본부장님께서 한 달 넘게 따라다녀도 따오지 못한 큰 계약이다.
이 업무는 인센티브만 해도 1000만 원 정도라 누가 따내도 몇 달은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예향아, 너 참 대단하구나. 판 본부장님께서 두 달 가까이 못 따온 계약을 네가 이틀 만에 따내다니, 역시 얼굴이 예쁘면 유리하네.”
한 남자 사무원이 다른 뜻을 품고 칭찬했다.
“그러게, 그래서 예쁜 여자가 이 일을 하면 무조건 남자보다 유리하다니까.”
또 다른 남자 업무원이 괴상야릇하게 말했다.
“너희들 그게 무슨 뜻이야? 이 업무는 내가 스스로의 능력으로 따낸 거야, 재간 있으면 너희도 가서 따오지 그래?”
임예향은 당연히 두 사람의 말 속에 담긴 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그러니까, 계약을 따낼 수만 있다면 상대방과 잠자리를 갖는 것도 우리 여자들의 능력이야. 업무를 원한다면 너희들도 가서 잠자리를 같이 하면 되잖아.”
다른 여자 종업원도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비록 두 남자 사무원을 향해 한 말이지만 사실 임예향을 풍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임예향은 어이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바로 화를 내려고 했다.
바로 그때, 하 대표님의 비서가 서류뭉치를 들고 영업팅에 와서 판명과 임예향에게 각각 한 부씩 건넸다.
“임예향 씨, 축하드립니다. 회사에서 연구한 결과 당신의 업무 능력이 남보다 월등히 뛰어나기에 당신을 영업팅의 팀장으로 임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참, 하 대표님께서 당신더러 계속 열심히 노력하여 회사를 위해 더 많은 업무를 끌어오길 바란다며 독려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