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이안 씨는 지금의 나를 만난 걸 행운으로 여겨야 해요. 만약 반 년 전의 나였다면 당신은 이미 죽었어요. 나한텐 그럴 능력이 있어요, 믿으세요.”
나윤도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염이안은 순간 식은땀이 흘렀다. 나윤도가 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윤도가 또다시 말했다.
“난 당신의 체면을 충분히 살려줬고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오늘 찾아온 건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경고하기 위해서예요. 내 뒤에서 다시는 딴짓하지 말아요. 돈이 좋기는 하지만 그것도 목숨이 붙어 있어야 쓰지 않겠어요? LY 회사는 생각도 하지 마세요. 말로 하는 건 여기 까집니다. 만약 충고를 듣지 않는다면 다음엔 죽여버릴 거예요!”
마지막 한마디에 한기가 가득해 염이안은 몸서리를 쳤다.
나윤도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고 몸을 일으켜 자리를 떠났다.
염이안은 멍한 표정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순간 나윤도가 마시던 와인잔에 시선이 닿은 염이안은 놀라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와인잔의 밑바닥이 옆에 있던 나무 탁자에 박혀 있었다.
기척도 없이 무디고 여린 와인잔을 나무에 박아 넣은 나윤도의 힘이 공포스러웠다.
나윤도는 사방이 화려한 조명으로 반짝거리는 번화한 거리를 걸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나윤도는 여기는 국내이고 외국과 달라서 행동을 자제해야 한다고 매 순간마다 스스로를 타일렀다.
외국에 있을 때는 실력이 모든 것을 판가름했고 감히 도전을 해오는 사람은 바로 죽여버리면 되기에 번거로운 일이 많지 않았지만 국내는 달랐다. 그래서 나윤도는 이번에 겁을 주는 수단을 사용했다.
평소에 껄렁해 보여도 실제로 나윤도는 수완이 매우 좋은 사람이었다. 눈동자를 한번 굴리기만 해도 수많은 계략을 생각해냈다.
예를 들면 대머리를 속여 차를 잘못 부수게 하고 여정이 차를 돌려주게 만드는 일 등이다.
상식적으로 나윤도가 이렇게 겁을 주고 난 이후 염이안은 틀림없이 얌전해질 것이다. 두 사람의 실력이 같은 수준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윤도가 계산을 잘못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염이안의 신분이다. 염이안은 노산내관의 제자로 그에게는 대단한 선배와 후배들이 있었다.
군림해 있는 것에 익숙해진 염이안은 계속해서 나윤도에게 당하자 견디기 힘들었고 더구나 엄청나게 큰 수치였다.
나윤도가 떠난 후 염이안은 곧바로 큰형님 부동노한(不动罗汉)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님!”
염이안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전화기 너머에서 냉담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형님, 성가신 일이 생겼습니다.”
염이안이 말했다.
“무슨 일?”
남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담했다.
큰형님 부동노한(不动罗汉)은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뼛속까지 차가운 냉기를 풍겼다. 염이안은 늘 큰형님이 너무 오만하다고 여겨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닌 이상 큰형님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큰형님이 절대적인 존재라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크게 심호흡한 염이안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해빈 시에서 고수를 만났습니다.”
부동노한(不动罗汉)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국에는 숨어 있는 고수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네가 건드리지 않는다면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야?”
“하지만 제가 이미 건드렸어요. 그 사람과 저는 현재 누구 한 명 죽기 전까지 끝나지 않는 상황이에요. 형님이 나서 주지 않으시면 저는 화를 피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도와주세요!”
침묵하던 부동노한(不动罗汉)이 한참 뒤에 물었다.
“그 고수 이름이 뭐야? 어느 정도로 대단해?”
“나윤도라고 아프리카에서 왔어요. 아마 과거에 용병이나 킬러였을 확률이 높아요. 바로 오늘……”
염이안은 나윤도가 한 손으로 와인잔을 나무에 박아 넣던 실력을 이야기했다. 나윤도가 겁을 주기 위해 한 행동이라고 말하지 않고 자신에게서 돈을 강탈하기 위해 몰아붙인 행동이라고 말했다.
“형님, 모레 나윤도에게 5억을 주지 않으면 나윤도가 절 죽일 거예요. 제가 노산내관의 제자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은데 만약 제가 정말로 굴복하게 되면 이 일이 퍼져 나가서 우리 노산내관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겠어요?”
“술잔을 나무에 박다니!”
부동노한(不动罗汉)이 이어서 말했다.
“확실히 고수야. 바로 갈게.”
말을 마친 부동노한(不动罗汉)이 전화를 끊었다.
염이안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에 큰형님이 나섰고 자신에게 많은 인맥과 인력이 있으니 염이안은 나윤도가 결코 무섭지 않았다.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서 큰형님이 알게 된다 해도 염이안은 두렵지 않았다.
큰형님이 이미 온 이상 거짓말이라는 것이 들통나도 손 놓고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나윤도는 잡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월세방에 돌아오자마자 금세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느긋한 성격의 나윤도는 자연스럽게 또다시 지각했다.
유엽별장 앞에서 나윤도는 두 명의 아름다운 미녀를 차에 태웠다. 차에 탄 단예진이 원망 어린 목소리로 나윤도에게 말했다.
“시간 좀 잘 지킬 수 없어?”
나윤도가 웃으면서 말했다.
“다음엔 꼭 정각에 올게.”
“퍽이나.”
단예진이 나윤도를 흘겨봤다.
그에 반해 송연아는 조용했다. 나윤도를 어찌할 방법이 없었고 또 그를 너무 질책할 수도 없었다.
“예진아, 내일부터 우리가 운전해서 출근하자.”
단예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답하던 단예진이 난처한 얼굴로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염이안이랑 문성아 쪽은?”
나윤도가 곧바로 대답했다.
“안심해, 염이안이랑 문성아는 이제 더 이상 제멋대로 굴지 못할 거야.”
“왜?”
단예진과 송연아가 동시에 묻자 나윤도가 운전을 하면서 이야기했다.
“아, 그게 어제 내가 염이안을 찾아가서 이치에 맞게 설명했더니 나중에는 결국 내 말에 감동받아서 철저하게 자기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더라고. 울면서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약속했어.”
나윤도의 말을 들은 단예진과 송연아는 어느정도 상황을 이해했다. 나윤도가 허튼소리를 늘어놓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그의 말에서 어젯밤 염이안과 나윤도가 틀림없이 모종의 합의를 이뤘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염이안의 일을 겪으면서 단예진과 송연아는 나윤도를 자기 사람으로 여겼다. 게다가 송연아는 2000만 원이 들어있는 은행 카드를 나윤도에게 상으로 주었다.
나윤도는 송연아가 참 괜찮은 사람에 좋은 사장님이라고 생각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카드를 받았다.
송연아는 순진하긴 하지만 바보가 아니었다. 나윤도가 값을 매길 수 없는 사람임을 알고 있어 그에게 잘해주며 포섭하려 했다. 송연아는 BMW 차량을 나윤도가 계속 몰고 다닐 수 있게 해주고 아침에 자신들을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만약 나윤도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퇴근시간에도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송연아는 나윤도의 주거문제에 신경을 썼다.
“나한테 계속 비워 두고 있는 오래된 집이 있는데 너만 괜찮다면 그곳에 살아도 돼. 거실 두 개에 방이 두 개라서 정리만 하면 괜찮을 거야.”
번거로운 것이 싫은 나윤도는 곧바로 정당한 이유를 대며 거절했다.
“대표님, 나는 내 힘으로 집을 마련해서 살고 싶어. 나는 남자고 사내대장부니까 줏대가 있어야지.”
잠시 멈칫하던 송연아가 이어서 말했다.
“네가 자강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좋네. 그럼 됐어. 강요하지 않을 게.”
단예진이 의심하며 말했다.
“이 자식 설마 이사하기 귀찮아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하하!”
나윤도는 웃음으로 어색함을 감추었다. 다들 나윤도가 대표님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나윤도는 이제 출근이 한결 편했다. 다른 아가씨들도 나윤도를 눈여겨봤고 그 속에서 나윤도는 물 만난 물고기 같았다.
LY 회사의 대표님이 송연아이긴 하지만 사실 대주주는 단예진이다.
송연아 스스로도 이 회사를 차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첫 번째로 송연아는 천재적인 재능이 있어 패션 디자인에 대한 조예가 높았고 두 번째로 송연아 이모부의 인맥과 재력의 도움이 있기 때문이다.
단예진의 본가는 불산에 있었다. 그녀의 외할아버지 곽천수는 불산에 유명한 칭호가 있는데 바로 불산무왕(佛山武王)이다.
곽천수는 불산에 개관하여 제자를 받았고 그의 문하에 있는 제자들 대부분이 명문가의 후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외국에서 자란 단예진은 외할아버지의 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예전에 송연아도 해외에서 유학을 했기에 두 사람은 외국에서 만나 학업을 마친 뒤 돌아와 회사를 차렸다.
당시에 단예진은 불산으로 가서 외할아버지를 찾아뵙고 회사를 차린다는 이야기를 언급했다. 외손녀를 아끼는 곽천수는 즉시 무조건적으로 지지했다.
단예진의 배경에 대해서 외부인들은 알기 어려웠다. 단예진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할뿐더러 불산무왕(佛山武王)이라는 칭호가 유명하긴 하지만 단지 무술계 내부에 국한되어 있었다.
마치 문예에는 문예계가 있고 오락에는 연예계, 작가에게는 작가들만의 범위가 있듯이 무술에도 무술계가 있었다.
염이안과 같은 사람들은 이런 관계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알았더라면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을 것이다.
점심에 나윤도는 먼저 정희연의 사무실을 들렀다. 요 며칠 나윤도는 정희연과 거의 교류를 하지 않았고 사적으로도 연락하지 않았다. 지난번 정희연에게 식사 초대를 했다가 거절당한 뒤로 나윤도는 더 이상 스스로 망신당하는 일을 찾아 하지 않았다.
정희연은 소파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간 나윤도는 눈요기할 만한 장면을 볼 수 있을지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정희연은 경계심 가득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그녀는 두 다리를 모으고 소파 안쪽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의 검은색 투피스 아래 감춰진 엉덩이가 더욱 섹시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나윤도는 다가가 한번 움켜쥐고 싶었지만 상상에 그쳐야 했다.
바로 이때 정희연이 잠에서 깨어나 곧바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첫눈에 나윤도를 발견한 정희연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내 사무실에는 왜 왔어? 그리고 노크할 줄 몰라?”
“하하!”
웃음 지은 나윤도가 말했다.
“희연아, 우리 사이에 노크할 필요 있어?”
“내가 네 아내라고 해도 노크는 해야 돼!”
정희연이 화를 냈다.
“알았어. 네가 내 아내라고 해도 다음번엔 꼭 노크할게.”
나윤도는 속으로 싱글벙글하면서 입으로도 정희연에게서 이득을 얻는 것을 잊지 않았다.
분노와 부끄러움이 겹쳐 한꺼번에 몰려왔다. 정희연도 자신이 말을 너무 빨리해서 나윤도에게 틈을 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 군말 없이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무 일도 없어. 네가 담요를 덮었는지 보려고 들어왔어. 감기 걸릴까 봐!”
나윤도가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지금 아주 좋으니까 나가도 돼.”
정희연이 축객령을 내렸다.
울적해진 나윤도는 코를 만지작거렸다. 때로는 불처럼 열정적이고 때로는 얼음처럼 차가운 정희연을 도통 헤아릴 수 없었다.
“알았어!”
무안해진 나윤도가 몸을 돌려 사무실을 벗어났다.
나가는 나윤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정희연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윤도에게 심하게 군 것 같았다.
나윤도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를 대체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정희연은 아직 생각을 정하지 못했다. 자신과 나윤도의 관계를 어떻게 직시해야 할지도 막막해서 갈등하던 정희연은 냉담함을 선택했다.
정희연은 자신이 나윤도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것은 아닐지 걱정되었지만 사실 그녀의 걱정은 불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