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연은 차를 몰고 나윤도와 함께 회사로 갔다. 회사에 거의 도착했을 때 나윤도가 말했다.
“옆에 세워줘, 난 먼저 내릴게. 사람들이 한낱 경호원이 네 차 타고 같이 출근하는 거 보면 뭐라고 하겠어.”
일부러 그렇게 얘기하는 그였다.
가끔 보면 이 남자도 속이 좁을 때가 있다. 분명 정희연이 지금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꼭 이렇게 한마디를 해야 할까.
정희연은 어쩔 줄 몰랐다. 자신이 지나치게 행동한 건 사실이라 이를 악물며 말했다.
“괜찮아.”
나윤도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농담한 거야. 나 볼일 있어서, 차 세워줘.”
이상함을 느낀 정희연이 물었다.
“네가 무슨 볼 일이 있어?”
나윤도는 어쩐지 자신을 얕잡아 보는 것 같아 발끈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난 뭐 볼 일 있으면 안되는 건가?”
“정말이야?”
“당연히 진짜지.”
정희연이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세웠다.
나윤도가 차에서 내리자 그녀도 다시 출발했다.
사실 볼 일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그는 그녀와 함께 들어가기 싫었다. 체면을 무척 중요시 여기는 정희연이라, 자신은 괜찮았지만 그녀가 경호원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 무척 난감할 게 뻔했다.
더욱이 어제 대표님과 그런 일까지 있었으니 당연했다.
나윤도는 가끔 막 나가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한편, 회사에 도착한 정희연은 바로 송연아에게 불려갔다.
송연아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전에 희연 씨가 추천할 경호팀장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설마 그게 나윤도인가요? 둘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어제는 내가 제대로 묻지 않았는데, 이 사람의 품행에 문제가 있다면 우린 절대 쓸 수 없어요.”
깜짝 놀란 정희연이 말했다.
“그 사람의 행실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작은 오해가 있었는데 이미 풀었습니다.”
무언가 알아챈 송연아는 더 묻지 않았다.
“그래요, 그럼 일단 지켜보고 괜찮다 싶으면 경호팀장으로 고용하죠.”
정희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대표님. 말씀 끝나셨으면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송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윤도는 재수가 없게도 지각을 했다. 그것도 한참 후에 알았다. 오늘 양문수와 그 일행들 때문에 지체된 데에다 차에서 내린 후 늘쩡늘쩡 아침까지 먹고 온 그였다.
볼일을 다 끝내고 보니 30분이나 지각했다.
한낱 직장인에게 30분 지각은 큰 일이었다.
나윤도가 얼른 경호실로 가자 경호팀장도 있었다. 경호팀장인 하 씨는 조영호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나윤도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젊은 사람들은 잠이 많다니까. 다음부터는 늦지 말아요.”
나윤도는 얼른 공손하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형님, 다음부터 절대 늦지 않겠습니다.”
그때, 뒤에서 조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 팀장님 정말 너그러우시네요. 30분이나 지각을 했는데 그 한마디가 끝인가요?”
나윤도가 고개를 돌리니 검은색 딱 붙는 치마를 입은, 무척이나 섹시한 조수연이 있었다.
하지만 조수연의 태도는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나윤도는 그런 조수연의 가슴을 힐끗 쳐다봤다. 분명 어제 일로 그녀에게 미움을 산 게 분명하다 생각하는 그였다.
나윤도는 얼른 손을 비비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조 부장님 안녕하세요,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당신은 잘릴 준비나 해.”
조수연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하 씨가 얼른 입을 열었다.
“조 부장님, 이 사람이 젊어서 아직 뭘 몰라 그럽니다. 한번만 기회를 주죠. 지각은 월급을 깎으면 됩니다.”
나윤도도 거들었다.
“그래요, 그래요.”
조수연은 하 씨를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하 팀장님, 제 말 아직 안 끝났습니다. 신인이 지각을 했는데 그냥 넘어가다니요, 이런 상사가 어디 있습니까? 팀장 직을 맡기 싫으신가요?”
하 씨는 작게 직위를 맡고 있지만 그의 나이도 50대가 넘어가 일자리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조수연은 송연아가 눈여겨보는 인재였다. 하여 그들은 감히 그녀에게 밉보이지 못하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어쩔 줄 모르는 눈빛으로 나윤도를 볼 뿐이었다.
나윤도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조 부장님, 홍보팀 부장께서 왜 저희의 출석을 체크하시는 겁니까. 이건 명백한 월권 아닙니까, 인사팀 일인데 말이죠.”
조희연이 차갑게 대꾸했다.
“내가 지금 쓸데없는 일에 참견한다는 거야?”
나윤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말, 부장 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조수연은 열 받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한낱 경호원이 간이 배밖으로 나왔나.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에 조수연은 이를 갈며 말했다.
“당신 기다려, 내가 지금 인사팀에 갈 거니까.”
말을 마친 그녀는 바로 나갔다.
방금 휴게실을 나서는데 뒤에서 나윤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다려요!”
조희연은 속으로 냉소하며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이제서야 두려운 가봐? 얼른 빌어. 그래도 봐주지 않을 거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려 수그리는 나윤도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윤도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조 부장님, 단추 열렸습니다.”
조수연은 얼른 고개를 숙여 확인했다.
나윤도는 이 재밌는 상황을 두고두고 떠올릴 것 같았다.
사납게 구는 조수연이지만 허점이 보였다. 대단한 여자였다. 이것도 여자로서 그녀의 능력이었다.
조수연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얼른 몸을 돌려 단추를 잠갔다.
그때 나윤도가 느긋하게 말했다.
“조 부장님, 절 해고하시면 앞으로 괴롭히지 못하실 텐데요? 전 다른데 일자리 알아보면 그만이지만, 여기 있으면 적어도 그쪽이 내 상사인데.”
조수연은 바로 움찔했다.
“그래, 고정된 일자리도 아닌데. 안돼, 자르면 안돼. 천천히 괴롭혀야지.”
그 생각을 한 조수연은 고개를 돌려 단호하게 말했다.
“어떻게 하든 내 마음이야.”
말을 마친 그녀는 복도 쪽으로 가버렸다.
그러다 발을 삐끗한 그녀는 그대로 미끄러졌다.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매끄러운 대리석으로 된 바닥은 자칫 넘어지면 큰일이었다.
그때, 그녀는 눈 앞에 누군가 스쳐 지나온 걸 발견했다.
그러면서 그의 몸 위로 쓰러졌다.
당연히 나윤도였다. 그녀가 나윤도를 덮치는, 야릇한 자세가 되었다.
원래 나윤도는 조수연을 바로 잡을 생각이었으나, 일을 좀 더 벌리기 위해 바로 누웠던 것이었다.
조수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나윤도는 당당하게 말했다.
“조수연 씨, 전 괜찮습니다. 안 아파요.”
능글맞은 본색이 또 나왔다.
조수연은 도와준 그를 탓하기도 뭐해 그저 매섭게 노려보다 일어났다.
나윤도도 따라서 일어났다. 몸에는 조수연의 향기가 배어 그를 자극했다.
조수연은 급히 자리를 떠났다. 부끄러운 게 분명했다.
허허 웃은 나윤도가 고개를 돌리자 하 씨와 다른 이들이 이 장면을 훔쳐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하씨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나윤도, 이 자식 빠른데? 보기도 전에 바닥으로 누워 버렸어요?”
다른 한 경호원인 이씨가 장난스레 말했다.
“윤도형, 조수연 밑에 깔린 느낌이 어때? 부럽네!”
나윤도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뒤에서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이제 더 이상 아무 말이나 할 수 없다 생각하는 그였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웃어 넘겼다.
이 사건은 이대로 넘어갔다.
나윤도는 경호원 유니폼을 바꿔 입고 전기 곤봉을 들어 마구 흔들었다. 도처를 찾아다니며 안전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했다.
LY회사엔 대부분 직원이 여성이었다.
패션 사업을 하는 회사인 만큼 직원들의 옷차림도 무척 예뻤다. 하여 나윤도의 대부분 주의력은 미인들을 보는데 있었다. 어딜 보아도 예쁜 사람들이었다.
걸어 다니는 내내 새로운 세상을 보는 듯 두근거렸다.
외국에 있는 동안엔 거친 나날들을 보내다 보니 매일 정신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나윤도는 이곳으로 돌아온 뒤 보내는 평온한 하루들을 좋아했다. 자유롭고 아무런 속박이 없었다.
오후, 나윤도는 휴게실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때, 하 씨가 벌컥 문을 열며 모두에게 말했다.
“다들 대표실로 가죠.”
나윤도는 움찔했다. 송연아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전기 곤봉을 챙길 틈도 없이 빠르게 휴게실을 나와 사무실로 달려갔다.
하 씨와 남은 사람들은 그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4층 대표 사무실, 밖에는 조수연이 불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입니까?”
나윤도가 조수연에게 물었다.
그를 본 조수연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녀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경안 그룹의 제윤슬이 부하를 데리고 대표님과 독대하고 있어. 안에 무슨 일이라도 날까 무서워서 불렀어. 혹시나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바로 들어가.”
나윤도는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하고 말했다.
“대표님 혼자 만나는 겁니까?”
조수연이 말했다.
“아니. 마케팅 팀 단예진 본부장과 함께 있어.”
나윤도는 잠깐 생각하다 조수연에게 말했다.
“내가 들어가서 대표님 곁에 있을 게야.”
말을 마친 그는 바로 문을 두드렸다.
조수연은 할말을 잃었다. 이 남자는 왜 이리도 무모한 걸까,
안에선 송연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나윤도가 바로 대답했다.
“대표님, 경호 팀 나윤도입니다. 조 부장님 분부로 왔습니다. 비즈니스를 논하는데 옆에 시킬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상황을 지켜보던 조수연도 나섰다.
“네, 대표님.”
사무실에 있던 송연아와 단예진은 내심 기뻤다. 제윤슬과 염이안은 너무 오만했다. 두 여자가 기세에 눌리던 찰나 마침 나윤도가 온 것이었다.
송연아는 바로 말했다.
“네, 들어와요.”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간 나윤도는 문을 다시 닫았다.
사무실은 무척 넓고 환했고, 제윤슬과 마주보고 있는 송연아의 옆엔 단예진이 있었다. 염이안은 차가운 표정으로 제윤슬의 뒤를 지키고 있었다.
짙은 화장에 매혹적이게 생긴 제윤슬이 차갑게 말했다.
“송 대표님, 제 조건은 같습니다. LY회사와, 당신이 전에 책임졌던 디자인 시안과 저작권 모두 나에게 넘기세요. 100억 드리죠, 그 돈이면 평생 먹고 놀기 충분할 겁니다.”
송연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흥분한 단예진이 먼저 화가 나 말했다.
“제 대표님, 저희 회사 연간 이익만 30억이예요. 회사 총 가치는 250억이 넘어가고요. 거기다 저흰 이미 세계적인 회사 아뜰리에와 계약을 한 상태입니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시가 가치가 적어도 배로 뛸 텐데, 주식 상장도 가능하게 될 겁니다. 근데, 고작 100억에 사겠다니요, 너무한 것 아닙니까?”
민머리인 염이안은 건장한 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의 본명을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는 해빈시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가 차린 흑수 보안업체 회사에 소속된 인물들은 하나같이 대단했고, 염이안은 그 가운데서도 제왕이라 불리는 사나이였다.
염이안은 단예진을 보고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
“단예진 씨, 대표님들 대화에 그쪽이 끼어들지는 맙시다. 아직 나이도 어린데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아깝잖아요.”
단예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누가 봐도 분명한 협박을 그녀가 모를리 없었다.
염이안은 다시 송연아를 보며 말했다.
“송 대표님, 옛말에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빈해시엔 거물들이 득실거리고,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데, 거기다 여성분이시니 적당히 몸을 사리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안 그러면 돈과 목숨 둘 다 잃을 테니까요. 물론, 협박하는 건 아닙니다. 충고를 드리는 겁니다.”
분명한 협박이었다! 계속 침착함을 유지하던 송연아도 여자인지라 무서워졌다.
하지만 빠르게 숨을 가다듬은 그녀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LY회사는 내가 피땀으로 일군 회사입니다. 얼마를 준다고 해조 팔지 않습니다. 전 그래도 법으로 다스리는 한, 함부로 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윤슬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송 대표님 아직 소녀시네. 꿈에서 깨지 못했어. 현실이 얼마나 잔혹한지도 모르고 말이예요.”
“이만 가 주세요.”
송연아는 인내심이 바닥이 난 듯 차갑게 말했다.
그러자 제윤슬이 말했다.
“송연아 씨, 다시 잘 생각해보는 게 좋을 텐데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송연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제윤슬이 또 뭐라고 하려는데 나윤도가 입을 열었다.
“당신들 단체로 귀먹었어? 송 대표님이 이만 가라는데, 왜 아직도 있는 거야.”
그 말에 모두가 조용해졌다.
송연아와 단예진은 입까지 벌어졌다. 한낱 경호원이 제윤슬과 염이안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다니!
당황한 건 제윤슬과 염이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정신을 차린 둘은 화가 났다.
제윤슬이나 염이안 둘 다 해빈시에서 알아주는 인물이거늘, 어찌 한낱 경호원에게 모욕을 당하고만 있을까.
제윤슬은 서늘한 눈빛을 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나윤도를 바라보며 염이안에게 말했다.
“이안 오빠, 보아하니 손 좀 봐줘야 할 것 같은데.”
염이안도 서늘하게 나윤도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래. 이렇게 면전에다 대놓고 모욕을 주는 사람은 또 오랜만이네.”
나윤도는 코를 슥 만지며 멋쩍게 웃었다.
“대단한 사람인가 보네요. 제가 아직 어려서 뭘 모릅니다.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때리세요!”
“이 새끼가!”
염이안은 두 눈에 서늘한 살기를 뿜으며 발을 굴렀고, 그 힘에 매끄러운 대리석 타일에 금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