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많고 성과급도 없어. 남이 휴가에 놀 때 나는 야근했고. 그런데 직업 군인이 뭐가 좋아?”
정희연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을 이었다.
“그럼 경호원도 나을 게 없잖아?”
나윤도는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
“최소한 생명의 위협은 없잖아.”
정희연은 나윤도가 과거 일을 꺼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아무렇게나 둘러대며 어물쩍 넘어가려는 것이 뻔히 보였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참, 윤도야. 우리 회사에 경호팀장 자리가 비는데 몸놀림 좋은 네가 우리 회사에 오는 건 어때. 우리 아파트보다 낫잖아.”
나윤도는 바로 흥미가 생겼다. 오늘 조영호를 때렸으니 그 아파트 단지에서 편하게 지내긴 글렀다. 그래서 그는 단번에 미끼를 물었다.
“월급은 어때요?”
“당연히 거기 있는 것보다 낫지!”
정희연이 말했다.
나윤도 역시 월급에 연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냥 놀고 있기 그래서 일을 찾는 것이었으니까.
“그럼 좋아요.”
기분이 좋아진 정희연이 바로 말했다.
“그럼 그렇게 결정하는 거다. 언제 출근할 수 있어?”
“내일요.”
나윤도가 말했다.
정희연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여기서 월급 다 못 받아도 그냥 내버려둬. 우리 쪽에서 채워줄게.”
나윤도는 그녀의 말에 정희연의 신분에 흥미가 생겼다. 그가 물었다.
“희연 누나, 거기는 뭐 하는 회사예요? 누나 명의로 된 회사예요?”
정희연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회사를 세워. 일개 회사원일 뿐이지. 근데 내가 회사 대표랑 친구야. 그래서 내 말이 제법 통하거든.”
나윤도가 말했다.
“아. 근데 전 아직도 뭐 하는 회사인지 모르는데요.”
정희연이 말했다.
“패션 디자인!”
나윤도는 문득 깨달았다.
그들은 무척 유쾌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했다. 나윤도는 모든 사람과의 대화를 잘 이끌 수 있었다. 그래서 이따금씩 정희연이 배꼽을 잡고 웃게 만들었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이미 밤 열 시였다.
꽤 오래 식사를 한 편이었다.
두 사람 모두 술을 마셔서 운전할 수가 없었다. 정희연은 아예 길가의 주차장에 차를 버려두었다. 아파트에서 멀지 않은 곳이기에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맥주를 두 병 마신 정희연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게다가 술을 마신 그녀는 더욱 진한 향을 풍기고 있었다.
한참 걷던 그녀는 묶은 머리가 거추장스러운지 머리핀을 뺐다. 순간, 새까만 머리카락이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그 찰나의 아름다움과 광채에 나윤도는 멍해졌다.
전설 속의 요정이 지상에 강림한 것 같았다.
정희연은 멍해진 나윤도를 보고 이상한 듯 물었다.
“왜 그래?”
나윤도는 진심으로 말했다.
“희연 누나, 누난 어떻게 이렇게 예쁘고 아름다울 수가 있어. 누나 같은 여자와 결혼할 수 있다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이혼하지 않을 거야!”
저도 모르게 그 말을 꺼낸 나윤도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희연이 이혼한 일은 남들에게 들은 것인데 왜 말했을까?
역시나 정희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별다른 말없이 간단하게 대꾸했다.
“가자. 얼른. 시간도 늦었어.”
말을 마친 정희연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사과하려고 했던 나윤도는 그녀의 행동에 그걸 잊어버렸다. 그도 정말 소갈머리 없는 녀석이다.
나윤도는 이내 빠른 걸음으로 정희연을 따라잡았다.
“희연 누나, 미안해.”
나윤도는 서둘러 말했다.
정희연도 덤덤히 대꾸했다.
“괜찮아.”
두 사람은 이런 이상한 분위기 속에서 아파트 단지로 돌아왔다.
나윤도가 일하는 아파트 단지의 이름은 북호 아파트다.
정희연은 나윤도 때문에 속상한 일이 떠올랐다. 그래서 오는 길 내내 나윤도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윤도에게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금방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는데 갑자기 검은 실루엣이 스쳐 지나갔다.
정희연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무심코 나윤도를 안았다. 어제 금방 괴한이 쳐들어오는 일을 겪어서 지금 무척 예민했다.
나윤도 역시 그 검은 실루엣을 보았다.
그 검은 실루엣은 다름 아닌 나윤도의 룸메이트 주영이었다.
주영은 이상야릇한 표정으로 서로를 안고 있는 나윤도와 정희연을 보았다.
“콜록!”
나윤도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희연 누나, 저 사람은 내 동료야. 이름은 주영.”
그 말을 들은 정희연은 너무나도 창피했다. 야들야들한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나윤도의 품을 떠나더니 고개를 돌려 주영을 마주했다.
“안녕하세요!”
그렇게 인사를 건네는 정희연은 대범하고 예의 있어 보였다. 방금 전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었으니까.
주영은 여신 같은 정희연을 마주하자 오히려 긴장해서 얼굴까지 빨개졌다.
나윤도는 주영이 입구 컷을 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이렇게 물었다.
“왜 그래, 주영아?”
주영은 바로 그 일을 떠올리고 나윤도의 옆에 다가와 나지막이 말했다.
“윤도 형, 빨리 가는 게 좋겠어. 조영호가 오늘 밤에 형을 괴롭히려고 준비한대.”
나윤도는 곧바로 대꾸했다.
“난 또 무슨 일이라고. 깜짝 놀랐네.”
그는 주영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걱정 마. 조영호 그 망나니는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니까.”
“윤도 형, 그래도…”
주영은 어이가 없었다. 그가 더 설득하려고 했지만 나윤도가 이미 정희연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희연 누나, 가자. 바래다줄게.”
정희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윤도와 아파트 단지에 들어선 정희연은 이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무슨 일이야. 조영호는 너희 경호팀장이잖아? 왜 널 괴롭힌다는 거야?”
정희연은 조영호를 본 적이 있었다. 날티가 나는 그는 좋은 사람 같지 않았다.
나윤도는 웃으며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점심에 내가 좀 혼내줬거든. 누나도 그 망나니 봤지. 어린 게 콧대만 높아서 범 무서운 줄 모르잖아. 그래서 걔네 부모님 대신해서 손 좀 봐줬어.”
정희연은 나윤도의 말에 동의했다. 그 조영호는 얻어맞기 딱 좋은 상이긴 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나윤도에게 물었다.
“왜 때렸는데?”
그녀는 남자가 늘 다른 사람이랑 싸우는 건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정희연은 성숙하고 일에 대한 성취욕이 강한 남자를 좋아했다. 그녀는 나윤도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하는 것뿐이었고 꽤 재밌는 사람 같아서 누나 동생 하자고 한 것이었다. 나윤도 같은 경호원은 그녀의 배우자 선택 범위에 없었다. 이혼은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도도했으니까.
나윤도가 대답했다.
“오늘 저녁 당직이었는데, 희연 누나랑 밥 먹기로 했잖아? 그래서 휴가를 내려고 찾아갔어. 근데 그 사람이 아무 이유도 없이 허락할 수 없다는 거야. 그래서 허락하든 말든 난 통보했다고 말했더니 그 자식이 날 때리려고 하길래 살짝 반격했지. 결국 그 자식이 날 손 봐줄 능력이 없어서 내가 손 봐준 꼴이 되어버렸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