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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후안무치

  • 염이안은 노산내관의 수제자였다. 노산내관은 그 명성이 자자했다. 특히나 노산내관의 창설자이자 관장인 임문용은 전하는데 의하면 그 내공이 이미 고수를 능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 또 어디에선 그가 소림권법을 배웠다고 하는데, 자신의 내공을 곁들여 진화시킨 그것은 실로 공포에 떨게 한다고 했다.
  • 염이안이 하려는 건 응조철포삼(鹰爪铁布衫)이었다.
  • 그 또한 대단한 기술이었다.
  • 그 시각, 빠르게 나윤도의 앞에 다가온 그는 매서운 손아귀로 나윤도의 복부를 가격했다.
  • 명백한 살의로 공격한 것이었다. 옆에서는 구경을 하고 둘은 서로를 파악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 나윤도도 이쪽 세계 인물이라 한눈에 염이안이 고수인 걸 알아차렸다. 빠른 속도로 다가온 그가 시야를 가리며 공격해오는 주먹이 매서웠다. 맞은 곳이 지끈거렸다. 피하긴 늦은 것 같았다.
  • 상대는 빨라도 너무 빨랐다.
  • 그때, 나윤도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 자신의 특기인 영양패각(羚羊挂角)을 선보였다.
  • 영양패각이란, 흔적도 없는 걸 뜻했다.
  • 영양이 산에서 뛰어다니듯 자유로운 것이었다.
  • 염이안이 나윤도의 옷깃을 잡았을 때, 나윤도는 잽싸게 옆으로 비켜가며 손등으로 쳐냈다.
  • 참으로 신통하게 피했다.
  • 송연아, 단예진, 제윤슬의 눈에 나윤도는 형체 없는 그림자 같았다.
  • 순식간에 염이안의 오른쪽으로 넘어온 나윤도는 바로 루요각초(搂腰割草)를 시전했다. 손을 염이안의 허리로 가져가 단숨에 안아 들었다.
  • 이건 형의권(形意拳)중 하나의 기술이었다. 농민이 잡초를 베듯 허리를 꺾는 기술이었다.
  • 허리를 잡힌 염이안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강렬한 힘이 그를 옥죄여오며 사지의 힘이 풀렸다.
  • 염이안이 기침을 했다.
  • 나윤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진짜 때리시네! 그럼 제대로 상대해 드려야지.”
  • 말을 마친 그는 신발을 공중에 날려 손으로 낚아챈 뒤 그걸로 염이안을 때렸다.
  • 한번 한번 무겁게 들어오는 공격에 염이안이 괴성을 질렀다.
  • 제윤슬, 송연아, 단예진, 셋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 염이안이 어떤 인물인가, 해빈시에서 악랄하기 그지없다는 자가 아니던가! 그런 그가 지금 한낱 경호원에게 신발로 엉덩이를 맞고 있었다. 말이 안되었다. 이 일이 새어 나가면 염이안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것이었다.
  • 나윤도는 분이 다 풀릴 때까지 때리고서야 염이안을 휙 던져 버렸다.
  • 바닥에 쓰러진 염이안의 얼굴은 눈물 콧물 범벅이었다. 겨우 바닥에서 일어난 그는 말없이 그대로 도망쳤다.
  • 제윤슬도 도망치는 그를 보며 당황했다.
  • 나윤도는 제윤슬을 보고 히죽 웃으며 말했다.
  • “내가 당신 엉덩이까지 때려야 갈 건가?”
  • 제윤슬은 비명을 지르며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도망갔다.
  • 상황이 끝나서야 나윤도는 신발을 챙겨 신었다. 여전히 멍하니 있는 두 여자를 보고 말했다.
  • “송 대표님, 단 본부장님,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 말을 마치고 바로 자리를 떴다.
  • 나윤도가 해서 별 것 아닌 것 같은 것들이 사실은 엄청난 수련의 결과물이었다.
  • 염이안과 같은 고수는 확실히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 사무실을 나서자 조수연과 하 씨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 하 씨는 나윤도를 외계인 보듯 했고, 경호원 한명이 중얼거렸다.
  • “나윤도 씨 대단한데? 신발로 제왕의 엉덩이를 때리다니!”
  • 추켜 세우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윤도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 “제왕은 훈련을 열심히 한 것뿐이지 내공이 좋다는 건 아니죠. 전 군인이었으니 때리는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 그제서야 다들 이유를 알았다.
  • 조수연은 나윤도를 보는 눈빛이 확연히 달라졌다. 그녀는 나윤도가 정말 남자답다고 생각했다.
  • “다들 각자 돌아가시죠.”
  • 나윤도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 하 씨와 일행들은 그 말을 듣고 흩어졌다. 얼떨결에 나윤도의 위엄이 형성되었다.
  • 나윤도도 그들을 따라 자리를 떠났다.
  • 경호원 휴게실로 들어온 뒤 하 씨는 줄곧 무언가 감추는 것 같았다.
  • 나윤도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 “하 씨, 무슨 생각을 합니까? 혹시 제가 보안팀장 자리를 빼앗기라도 할까 걱정하는 겁니까? 걱정 마세요. 지각한 것도 봐줬는데 그만 두면 그만 뒀지, 밥그릇은 안 뺏죠.”
  • 하 씨는 정말로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 “이 자식.”
  • 다른 경호원들도 나윤도에게 호감이 생겨, 다 함께 웃고 떠들 수 있었다.
  • 30분 뒤, 마케팅 팀 본부장인 단예진이 직접 경호원 휴게실로 왔다. 나윤도는 당직이 아닌 경호원들과 떠들고 있었다.
  • “예전에 베트남 숲에서 적들이 숨어 있었는데 엄청 찾기 어려웠어요. 게다가 그들 무기는 우리 것보다 훨씬 좋았죠. 그러다 한번은 제가 하마터면 안에 걸릴 뻔했는데, 다행히……”
  • 모두들 집중해서 듣고 있을 때, 단예진이 헛기침했다.
  • 나윤도와 사람들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 단예진은 블루계열의 드레스를 입고, 하얀 목에는 다이아 목걸이를 하고 있어 무척 분위기가 있어 보였다.
  • 단예진은 줄곧 경호원들 앞에서 무표정으로 일관하여 상사다운 면모를 보였었다.
  • 하여 다들 그녀 앞에서 함부로 어쩌지 못했다.
  • 하지만 나윤도는 그녀를 보고 히죽 웃으며 말했다.
  • “본부장님, 오늘 예쁘게 입으셨네요. 본부장님이 오시니까 여기가 환해졌어요!”
  • 단예진의 굳어 있던 표정이 나윤도의 넉살 좋은 말에 풀렸다. 원래는 그를 죽도록 미워하던 그녀였다. 어제 그가 한 짓이 있으니까.
  • 하지만 오늘 나윤도의 행동이 그녀의 생각을 바꾸었다.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고 웃음을 참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 “따라와. 대표님이 보자고 하셔.”
  • 나윤도가 말했다.
  • “그래그래, 금방 가.”
  • 하면서 엉거주춤 뒤 따랐다.
  • “호오, 본부장. 이 팔찌 예쁜데? 어디 좀 봐봐.”
  • 나윤도는 걸어가며 그녀의 손을 잡고 살폈다.
  • 단예진도 자리에 멈춰 서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 요리조리 살피던 나윤도는 맞닿는 살결에 쾌재를 불렀다.
  • “뭔지 알겠어?”
  • 단예진이 덤덤하게 물었다.
  • 나윤도는 아쉬운 듯 그녀의 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 “옥돌로 된 팔찌인 것 같아. 음, 비싼 거네! 단예진, 너 같은 미인은 이런 걸 해야 분위기가 돋보인다고.”
  • 그는 능글맞은 언변으로 사이를 좁히며 자연스럽게 이름까지 불렀다.
  • “그냥 길 가다가 산 거야. 2000원짜리.”
  • 단예진이 덤덤하게 말하며 앞장섰다.
  • 나윤도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었다. 이게 무슨 경우지!
  • 나윤도는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라 얼른 다시 단예진을 따라갔다. 단예진은 이 상황이 무척 웃겼다. 나윤도에겐 다른 사람과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 나윤도가 다가오자 그녀는 웃음을 거두고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 “단예진, 나 궁금한 거 있어.”
  • 나윤도가 다시 말했다.
  • 단예진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 “뭐가 궁금한데?”
  • “혹시 뽕 넣었어?”
  • 멈칫한 단예진이 발끈했다.
  • “이게 어딜 봐서 뽕으로 보여!”
  • 나윤도가 느긋하게 말했다.
  • “오호, 난 또 안에 뭘 넣은 줄 알았는데. 자연산이었네.”
  • 단예진은 얼굴을 붉혔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 나윤도 같은 변태와는 아예 말을 섞지 않으려는 단예진이었다.
  • 두 사람은 빠르게 대표 사무실로 도착했다.
  • 송연아는 책상 앞에서 재무보고서를 살피고 있었지만, 제대로 집중하는 것 같진 않았다.
  • 단예진이 문을 닫으며 송연아에게 말했다.
  • “송 대표, 나윤도 왔어.”
  • 송연아는 서류를 닫고는 몸을 일으켜 소파로 가서 앉았다. 단예진은 그녀의 옆에 앉았다.
  • “나윤도 씨 예의 차릴 필요……”
  • 송연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윤도는 이미 성큼성큼 소파로 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예의가 뭔가?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 송연아는 어이가 없었다.
  • 이 사람은 뭐가 이렇게 자연스럽지?
  • 오히려 나윤도는 송연아의 말에 머쓱해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 송연아는 은은하게 웃으며 말했다.
  • “당신이 고수일 줄은 몰랐어요. 그런 사람을 그만두게 할 뻔했으니.”
  • 나윤도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 “과찬이십니다. 전 세계 3위밖에 되지 않아요.”
  • 송연아와 단예진 둘 모두 당황하며 할 말을 잃었다. 겸손이 지나치게 없었다.
  • 송연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런 분이 왜 여기 와서 경호원을 하고 있는 거죠?”
  • 나윤도가 바로 대답했다.
  • “여긴 미인이 많으니까요!”
  • 송연아와 단예진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솔직해도 너무 솔직했다.
  • 송연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 “겨우 그것 때문에요?”
  • 나윤도가 이해가 되지 않다는 듯 되물었다.
  • “그걸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 송연아는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 “좋아요. 그럼 전엔 무슨 일을 했나요?”
  • 송연아는 지금 나윤도를 승진시키고 싶었지만 혹여 무슨 스파이라도 될까 묻는 것이었다.
  • 나윤도가 말했다.
  • “전 군인이었습니다. 지금은 부대를 나왔죠.”
  • 송연아가 말했다.
  • “어느 부대요?”
  • 헛소리일 뿐이지만 두 여자를 놀리기 위해 능글맞게 말했다.
  • “경기도에서 육군 특전사 부대로 있었습니다.”
  • 송연아가 말했다.
  • “그렇다면 퇴직할 때 돈도 두둑하게 받았을 것 같은데요. 이런 인재이시니까.”
  • 나윤도가 말했다.
  • “퇴직금 2천만원은 죽은 내 전우 가족에게 줬습니다.”
  • 그 말을 들은 두 여자는 나윤도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제법 남자답고 의리 있다 생각했다.
  • 나윤도가 이렇게 얘기한 건 송연아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수행 경호원을 할 수 있으니까!
  • 송연아는 잠깐 멈칫하다 다시 말했다.
  • “그래요 나윤도 씨, 경호팀장 직을 맡길 게요.”
  • 나윤도는 얼른 거절하며 말했다.
  • “그건 안됩니다. 하 씨는 제 형님입니다. 경호 팀장을 할 바엔 차라리 그만 두겠습니다.”
  • 송연아가 물었다.
  • “하 씨가 누군가요?”
  • 나윤도는 당황하여 말했다.
  • “지금 경호 팀장이요!”
  • 송연아와 단예진은 상황을 파악했다. 나윤도를 그만두게 할 수 없었던 송연아가 말했다.
  • “그럼 앞으로 저와 예진이 수행 비서 겸 경호원을 하는 건 어때요?”
  • 나윤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원하던 바였다. 그는 일부러 돈을 밝히는 척 물었다.
  • “문제는 없습니다만, 월급은 인상해 주셔야 합니다!”
  • 송연아와 단예진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송연아가 말했다.
  • “월급 천만원 줄게요. 어때요?”
  • 나윤도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됩니다, 당연히 되죠!”
  • “좋아요, 일 보러 가세요. 저녁에 집에 데려다 주는 거 잊지 말고.”
  • 송연아가 말했다.
  • 목적을 달성한 나윤도는 자연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하여 군말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 오후 5시, 송연아와 단예진은 LY회사 건물을 나왔다.
  • 나윤도도 불려 왔다.
  • 송연아는 차키 여러 개를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 “운전 면허는 있죠?”
  • 나윤도가 대답했다.
  • “네.”
  • 송연아의 차량은 BMW로, 가격은 대략 2억 정도 되었다.
  • 나윤도는 둘에게 차 문을 열어주어 안으로 모시고, 자신은 운전석에 올랐다.
  • 능숙하게 후진도 하고 코너도 도는 나윤도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운전했다. 그 모습을 본 송연아와 단예진은 자신들이 인재를 찾았다 싶었다.
  • 둘은 함께, 유엽 별장에서 살았다.
  • 나윤도가 집까지 데려다 주자 송연아가 말했다.
  • “차는 그쪽이 운전해요. 내일 아침 7:30까지 여기로 와요.”
  • 나윤도는 알겠다 대답하고는 핸들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 유엽 별장의 경비시설은 꽤나 좋았다. 곳곳에 설치한 카메라를 보며 송연아의 안전에 마음을 놓는 나윤도였다.
  • 유엽 별장을 떠나 집으로 온 나윤도는 차에 대해서 특별히 생각하지도 않았고, 어디 드라이브 갈 생각도 없었다.
  • 예전에 이런 외제차쯤은 흔히 만져본 거니까.
  • 돌아오는 길에 정희연에게서 전화가 왔다. 감사의 인사를 전할 겸 자신의 집에서 식사하라는 연락이었다.
  • 그녀의 집에 간다는 말에 기회다 싶은 그였다.
  • 하여 그는 흔쾌히 승낙했다.
  • 30분 뒤, 해가 떨어지고 나윤도는 북호 아파트로 도착했다. 바로 주영과 다른 경비들이 보였다.
  • “윤도 형 대단하네, 이젠 BMW도 몰고 다니고. 거기다 최신형이야!”
  • 주영과 경비들은 부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 “대단하긴 무슨. 우리 대표님 차야. 난 운전 기사일 뿐이고.”
  • 나윤도는 허풍 떠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차 문을 내리고 웃으며 말했다.
  • “그래도 대단하죠. 대표님 차도 다 운전하고.”
  • 그들은 여전히 감탄을 했다.
  • “됐어, 그만 얘기하고 길 좀 열어줘. 오늘 약속이 있어서.”
  • 나윤도가 말했다.
  • “하하, 윤도형, 미인이랑 좋은 시간 보내십쇼!”
  • 주영이 말했다.
  • “하하, 고맙다!”
  • 나윤도도 스스럼없이 말했다.
  • 주차를 한 뒤 나윤도는 곧장 정희연이 있는 29층으로 향했다.
  • 그가 도착하자 정희연이 문을 열어주었다. 문을 열어줄 때 그녀는 앞치마를 두르고, 약간은 흐트러진 머리를 하고 있어, 온화한 아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 그걸 본 나윤도의 마음도 간질거렸다. 이런 아내와 어떻게 이혼을 한단 말인가!
  • 정희연은 나윤도의 눈길을 알아채고 얼굴이 붉어지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나윤도를 집으로 불러 밥을 먹자고 한 게 잘못이란 걸 깨달았다.
  •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되돌릴 수는 없었다.
  • “들어와.”
  • 정희연이 말했다.
  • 나윤도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 “희연아, 직접 요리하는 거야? 먹을 수는 있어?”
  • 정희연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 “먹고 죽어 그냥!”
  • “남편 죽이려고?”
  • 나윤도가 막 소리 쳤다.
  • 정희연은 나윤도를 흘겨보았다.
  • 그의 망나니 같은 성격에 할말을 잃었다. 원래는 고마운 마음에 대접하려고 했지만,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 “냉장고에서 아무거나 꺼내 마셔. 난 요리해야 돼.”
  • 정희연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 나윤도는 슬리퍼로 갈아 신고 안으로 들어가며 적극적으로 말했다.
  • “도와줄게.”
  • “됐어. 거실에 앉아 있어. 그게 도와주는 거야.”
  • 나윤도도 예의상 한 말이라 허허 웃으며 그대로 따랐다.
  • 한 20분 정도 지났을까, 정희연이 음식을 세팅했다.
  • 한상 가득 차림에 시원한 맥주까지 있었다.
  • “맥주 먹을래, 소주 먹을래?”
  • 자리에 앉은 정희연이 나윤도에게 물었다.
  • 나윤도가 대답했다.
  • “맥주면 돼! 근데 같이 마셔야지. 혼자 마시면 재미없어.”
  • 정희연은 이상하다는 눈길로 나윤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 “술 먹이고 무슨 짓 하려는 건 아니지?”
  • “내가 그럴 사람이야?”
  • 나윤도는 무척이나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 하지만 사실은 그녀가 정확히 간파했다!
  • 정희연이 말했다.
  • “됐어. 안 그럴 거라고 믿어. 근데 나 한병밖에 못 마셔.”
  • “그래.”
  • 나윤도도 흔쾌히 대답했다.
  • 그렇게 두 사람은 술을 들이켰다.
  • 술은 좋은 것이었다.
  • 정희연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 나름대로 고초가 있었다. 특히나 오늘 전 남편에게 그런 일을 당할 뻔한 뒤로 그녀는 자신이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다 생각되었다.
  • 하여 단번에 맥주를 들이키자 그녀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나윤도도 차마 더 술을 권하지 못하고 말했다.
  • “희연아, 못 마시겠으면 그만 마셔.”
  • “누가 그래 못 마신다고, 더 먹을 거야.”
  • 정희연이 말했다.
  • “… 왜 이래, 아깐 안 마신다며. 이젠 말려도 안 듣네. 내가 뭔 짓 할까 무섭지 않은가 봐?”
  • 나윤도가 말했다.
  • “당신이 뭘 알아,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 정희연은 또다시 술을 쭉 들이키며 잔을 비웠다. 그리고 나윤도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
  • “나, 이 정희연이 말이야. 겉으로는 화려해 보여도, 사실… 멍청이야.”
  • 나윤도도 그녀가 술주정을 부린다는 걸 알아챘다. 그녀의 속엔 말 못한 사정들이 많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윤도가 당황스러운 건, 이 여자가 왜 자신에게 삿대질을 하며 스스로를 멍청이라 하는 지였다.
  • 왜 이렇게 이상하지?
  • 정희연이 또다시 술을 마시려 하자 나윤도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 “됐어. 그만 마셔.”
  • 정희연은 그의 손을 뿌리치며 단번에 잔을 비웠다. 이미 잔뜩 취한 그녀가 말했다.
  • “어릴 때부터 예쁘고, 공부도 잘해서, 유치원부터 지금까지 줄곧 공주대접을 받았어. 그래서 난 내가 공주인 줄 알았어. 엄마 아빠도 다 날 예뻐했으니까. 그래서 더 고집 부렸어. 엄마 아빠가 허락하지 않아도 기어코 그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했어. 머리에 물이 들어찬 거지. 지금 이렇게 된 건 결국, 자업자득이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