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이안은 노산내관의 수제자였다. 노산내관은 그 명성이 자자했다. 특히나 노산내관의 창설자이자 관장인 임문용은 전하는데 의하면 그 내공이 이미 고수를 능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또 어디에선 그가 소림권법을 배웠다고 하는데, 자신의 내공을 곁들여 진화시킨 그것은 실로 공포에 떨게 한다고 했다.
염이안이 하려는 건 응조철포삼(鹰爪铁布衫)이었다.
그 또한 대단한 기술이었다.
그 시각, 빠르게 나윤도의 앞에 다가온 그는 매서운 손아귀로 나윤도의 복부를 가격했다.
명백한 살의로 공격한 것이었다. 옆에서는 구경을 하고 둘은 서로를 파악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나윤도도 이쪽 세계 인물이라 한눈에 염이안이 고수인 걸 알아차렸다. 빠른 속도로 다가온 그가 시야를 가리며 공격해오는 주먹이 매서웠다. 맞은 곳이 지끈거렸다. 피하긴 늦은 것 같았다.
상대는 빨라도 너무 빨랐다.
그때, 나윤도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특기인 영양패각(羚羊挂角)을 선보였다.
영양패각이란, 흔적도 없는 걸 뜻했다.
영양이 산에서 뛰어다니듯 자유로운 것이었다.
염이안이 나윤도의 옷깃을 잡았을 때, 나윤도는 잽싸게 옆으로 비켜가며 손등으로 쳐냈다.
참으로 신통하게 피했다.
송연아, 단예진, 제윤슬의 눈에 나윤도는 형체 없는 그림자 같았다.
순식간에 염이안의 오른쪽으로 넘어온 나윤도는 바로 루요각초(搂腰割草)를 시전했다. 손을 염이안의 허리로 가져가 단숨에 안아 들었다.
이건 형의권(形意拳)중 하나의 기술이었다. 농민이 잡초를 베듯 허리를 꺾는 기술이었다.
허리를 잡힌 염이안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강렬한 힘이 그를 옥죄여오며 사지의 힘이 풀렸다.
염이안이 기침을 했다.
나윤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진짜 때리시네! 그럼 제대로 상대해 드려야지.”
말을 마친 그는 신발을 공중에 날려 손으로 낚아챈 뒤 그걸로 염이안을 때렸다.
한번 한번 무겁게 들어오는 공격에 염이안이 괴성을 질렀다.
제윤슬, 송연아, 단예진, 셋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염이안이 어떤 인물인가, 해빈시에서 악랄하기 그지없다는 자가 아니던가! 그런 그가 지금 한낱 경호원에게 신발로 엉덩이를 맞고 있었다. 말이 안되었다. 이 일이 새어 나가면 염이안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것이었다.
나윤도는 분이 다 풀릴 때까지 때리고서야 염이안을 휙 던져 버렸다.
바닥에 쓰러진 염이안의 얼굴은 눈물 콧물 범벅이었다. 겨우 바닥에서 일어난 그는 말없이 그대로 도망쳤다.
제윤슬도 도망치는 그를 보며 당황했다.
나윤도는 제윤슬을 보고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내가 당신 엉덩이까지 때려야 갈 건가?”
제윤슬은 비명을 지르며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도망갔다.
상황이 끝나서야 나윤도는 신발을 챙겨 신었다. 여전히 멍하니 있는 두 여자를 보고 말했다.
“송 대표님, 단 본부장님,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바로 자리를 떴다.
나윤도가 해서 별 것 아닌 것 같은 것들이 사실은 엄청난 수련의 결과물이었다.
염이안과 같은 고수는 확실히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사무실을 나서자 조수연과 하 씨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 씨는 나윤도를 외계인 보듯 했고, 경호원 한명이 중얼거렸다.
“나윤도 씨 대단한데? 신발로 제왕의 엉덩이를 때리다니!”
추켜 세우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윤도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제왕은 훈련을 열심히 한 것뿐이지 내공이 좋다는 건 아니죠. 전 군인이었으니 때리는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제서야 다들 이유를 알았다.
조수연은 나윤도를 보는 눈빛이 확연히 달라졌다. 그녀는 나윤도가 정말 남자답다고 생각했다.
“다들 각자 돌아가시죠.”
나윤도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하 씨와 일행들은 그 말을 듣고 흩어졌다. 얼떨결에 나윤도의 위엄이 형성되었다.
나윤도도 그들을 따라 자리를 떠났다.
경호원 휴게실로 들어온 뒤 하 씨는 줄곧 무언가 감추는 것 같았다.
나윤도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하 씨, 무슨 생각을 합니까? 혹시 제가 보안팀장 자리를 빼앗기라도 할까 걱정하는 겁니까? 걱정 마세요. 지각한 것도 봐줬는데 그만 두면 그만 뒀지, 밥그릇은 안 뺏죠.”
하 씨는 정말로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이 자식.”
다른 경호원들도 나윤도에게 호감이 생겨, 다 함께 웃고 떠들 수 있었다.
30분 뒤, 마케팅 팀 본부장인 단예진이 직접 경호원 휴게실로 왔다. 나윤도는 당직이 아닌 경호원들과 떠들고 있었다.
“예전에 베트남 숲에서 적들이 숨어 있었는데 엄청 찾기 어려웠어요. 게다가 그들 무기는 우리 것보다 훨씬 좋았죠. 그러다 한번은 제가 하마터면 안에 걸릴 뻔했는데, 다행히……”
모두들 집중해서 듣고 있을 때, 단예진이 헛기침했다.
나윤도와 사람들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단예진은 블루계열의 드레스를 입고, 하얀 목에는 다이아 목걸이를 하고 있어 무척 분위기가 있어 보였다.
단예진은 줄곧 경호원들 앞에서 무표정으로 일관하여 상사다운 면모를 보였었다.
하여 다들 그녀 앞에서 함부로 어쩌지 못했다.
하지만 나윤도는 그녀를 보고 히죽 웃으며 말했다.
“본부장님, 오늘 예쁘게 입으셨네요. 본부장님이 오시니까 여기가 환해졌어요!”
단예진의 굳어 있던 표정이 나윤도의 넉살 좋은 말에 풀렸다. 원래는 그를 죽도록 미워하던 그녀였다. 어제 그가 한 짓이 있으니까.
하지만 오늘 나윤도의 행동이 그녀의 생각을 바꾸었다.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고 웃음을 참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따라와. 대표님이 보자고 하셔.”
나윤도가 말했다.
“그래그래, 금방 가.”
하면서 엉거주춤 뒤 따랐다.
“호오, 본부장. 이 팔찌 예쁜데? 어디 좀 봐봐.”
나윤도는 걸어가며 그녀의 손을 잡고 살폈다.
단예진도 자리에 멈춰 서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요리조리 살피던 나윤도는 맞닿는 살결에 쾌재를 불렀다.
“뭔지 알겠어?”
단예진이 덤덤하게 물었다.
나윤도는 아쉬운 듯 그녀의 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옥돌로 된 팔찌인 것 같아. 음, 비싼 거네! 단예진, 너 같은 미인은 이런 걸 해야 분위기가 돋보인다고.”
그는 능글맞은 언변으로 사이를 좁히며 자연스럽게 이름까지 불렀다.
“그냥 길 가다가 산 거야. 2000원짜리.”
단예진이 덤덤하게 말하며 앞장섰다.
나윤도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었다. 이게 무슨 경우지!
나윤도는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라 얼른 다시 단예진을 따라갔다. 단예진은 이 상황이 무척 웃겼다. 나윤도에겐 다른 사람과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나윤도가 다가오자 그녀는 웃음을 거두고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단예진, 나 궁금한 거 있어.”
나윤도가 다시 말했다.
단예진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뭐가 궁금한데?”
“혹시 뽕 넣었어?”
멈칫한 단예진이 발끈했다.
“이게 어딜 봐서 뽕으로 보여!”
나윤도가 느긋하게 말했다.
“오호, 난 또 안에 뭘 넣은 줄 알았는데. 자연산이었네.”
단예진은 얼굴을 붉혔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윤도 같은 변태와는 아예 말을 섞지 않으려는 단예진이었다.
두 사람은 빠르게 대표 사무실로 도착했다.
송연아는 책상 앞에서 재무보고서를 살피고 있었지만, 제대로 집중하는 것 같진 않았다.
단예진이 문을 닫으며 송연아에게 말했다.
“송 대표, 나윤도 왔어.”
송연아는 서류를 닫고는 몸을 일으켜 소파로 가서 앉았다. 단예진은 그녀의 옆에 앉았다.
“나윤도 씨 예의 차릴 필요……”
송연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윤도는 이미 성큼성큼 소파로 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예의가 뭔가?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송연아는 어이가 없었다.
이 사람은 뭐가 이렇게 자연스럽지?
오히려 나윤도는 송연아의 말에 머쓱해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송연아는 은은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고수일 줄은 몰랐어요. 그런 사람을 그만두게 할 뻔했으니.”
나윤도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전 세계 3위밖에 되지 않아요.”
송연아와 단예진 둘 모두 당황하며 할 말을 잃었다. 겸손이 지나치게 없었다.
송연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분이 왜 여기 와서 경호원을 하고 있는 거죠?”
나윤도가 바로 대답했다.
“여긴 미인이 많으니까요!”
송연아와 단예진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솔직해도 너무 솔직했다.
송연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겨우 그것 때문에요?”
나윤도가 이해가 되지 않다는 듯 되물었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송연아는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좋아요. 그럼 전엔 무슨 일을 했나요?”
송연아는 지금 나윤도를 승진시키고 싶었지만 혹여 무슨 스파이라도 될까 묻는 것이었다.
나윤도가 말했다.
“전 군인이었습니다. 지금은 부대를 나왔죠.”
송연아가 말했다.
“어느 부대요?”
헛소리일 뿐이지만 두 여자를 놀리기 위해 능글맞게 말했다.
“경기도에서 육군 특전사 부대로 있었습니다.”
송연아가 말했다.
“그렇다면 퇴직할 때 돈도 두둑하게 받았을 것 같은데요. 이런 인재이시니까.”
나윤도가 말했다.
“퇴직금 2천만원은 죽은 내 전우 가족에게 줬습니다.”
그 말을 들은 두 여자는 나윤도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제법 남자답고 의리 있다 생각했다.
나윤도가 이렇게 얘기한 건 송연아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수행 경호원을 할 수 있으니까!
송연아는 잠깐 멈칫하다 다시 말했다.
“그래요 나윤도 씨, 경호팀장 직을 맡길 게요.”
나윤도는 얼른 거절하며 말했다.
“그건 안됩니다. 하 씨는 제 형님입니다. 경호 팀장을 할 바엔 차라리 그만 두겠습니다.”
송연아가 물었다.
“하 씨가 누군가요?”
나윤도는 당황하여 말했다.
“지금 경호 팀장이요!”
송연아와 단예진은 상황을 파악했다. 나윤도를 그만두게 할 수 없었던 송연아가 말했다.
“그럼 앞으로 저와 예진이 수행 비서 겸 경호원을 하는 건 어때요?”
나윤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원하던 바였다. 그는 일부러 돈을 밝히는 척 물었다.
“문제는 없습니다만, 월급은 인상해 주셔야 합니다!”
송연아와 단예진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송연아가 말했다.
“월급 천만원 줄게요. 어때요?”
나윤도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됩니다, 당연히 되죠!”
“좋아요, 일 보러 가세요. 저녁에 집에 데려다 주는 거 잊지 말고.”
송연아가 말했다.
목적을 달성한 나윤도는 자연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하여 군말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오후 5시, 송연아와 단예진은 LY회사 건물을 나왔다.
나윤도도 불려 왔다.
송연아는 차키 여러 개를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운전 면허는 있죠?”
나윤도가 대답했다.
“네.”
송연아의 차량은 BMW로, 가격은 대략 2억 정도 되었다.
나윤도는 둘에게 차 문을 열어주어 안으로 모시고, 자신은 운전석에 올랐다.
능숙하게 후진도 하고 코너도 도는 나윤도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운전했다. 그 모습을 본 송연아와 단예진은 자신들이 인재를 찾았다 싶었다.
둘은 함께, 유엽 별장에서 살았다.
나윤도가 집까지 데려다 주자 송연아가 말했다.
“차는 그쪽이 운전해요. 내일 아침 7:30까지 여기로 와요.”
나윤도는 알겠다 대답하고는 핸들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유엽 별장의 경비시설은 꽤나 좋았다. 곳곳에 설치한 카메라를 보며 송연아의 안전에 마음을 놓는 나윤도였다.
유엽 별장을 떠나 집으로 온 나윤도는 차에 대해서 특별히 생각하지도 않았고, 어디 드라이브 갈 생각도 없었다.
예전에 이런 외제차쯤은 흔히 만져본 거니까.
돌아오는 길에 정희연에게서 전화가 왔다. 감사의 인사를 전할 겸 자신의 집에서 식사하라는 연락이었다.
그녀의 집에 간다는 말에 기회다 싶은 그였다.
하여 그는 흔쾌히 승낙했다.
30분 뒤, 해가 떨어지고 나윤도는 북호 아파트로 도착했다. 바로 주영과 다른 경비들이 보였다.
“윤도 형 대단하네, 이젠 BMW도 몰고 다니고. 거기다 최신형이야!”
주영과 경비들은 부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대단하긴 무슨. 우리 대표님 차야. 난 운전 기사일 뿐이고.”
나윤도는 허풍 떠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차 문을 내리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대단하죠. 대표님 차도 다 운전하고.”
그들은 여전히 감탄을 했다.
“됐어, 그만 얘기하고 길 좀 열어줘. 오늘 약속이 있어서.”
나윤도가 말했다.
“하하, 윤도형, 미인이랑 좋은 시간 보내십쇼!”
주영이 말했다.
“하하, 고맙다!”
나윤도도 스스럼없이 말했다.
주차를 한 뒤 나윤도는 곧장 정희연이 있는 29층으로 향했다.
그가 도착하자 정희연이 문을 열어주었다. 문을 열어줄 때 그녀는 앞치마를 두르고, 약간은 흐트러진 머리를 하고 있어, 온화한 아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걸 본 나윤도의 마음도 간질거렸다. 이런 아내와 어떻게 이혼을 한단 말인가!
정희연은 나윤도의 눈길을 알아채고 얼굴이 붉어지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나윤도를 집으로 불러 밥을 먹자고 한 게 잘못이란 걸 깨달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되돌릴 수는 없었다.
“들어와.”
정희연이 말했다.
나윤도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희연아, 직접 요리하는 거야? 먹을 수는 있어?”
정희연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먹고 죽어 그냥!”
“남편 죽이려고?”
나윤도가 막 소리 쳤다.
정희연은 나윤도를 흘겨보았다.
그의 망나니 같은 성격에 할말을 잃었다. 원래는 고마운 마음에 대접하려고 했지만,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냉장고에서 아무거나 꺼내 마셔. 난 요리해야 돼.”
정희연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나윤도는 슬리퍼로 갈아 신고 안으로 들어가며 적극적으로 말했다.
“도와줄게.”
“됐어. 거실에 앉아 있어. 그게 도와주는 거야.”
나윤도도 예의상 한 말이라 허허 웃으며 그대로 따랐다.
한 20분 정도 지났을까, 정희연이 음식을 세팅했다.
한상 가득 차림에 시원한 맥주까지 있었다.
“맥주 먹을래, 소주 먹을래?”
자리에 앉은 정희연이 나윤도에게 물었다.
나윤도가 대답했다.
“맥주면 돼! 근데 같이 마셔야지. 혼자 마시면 재미없어.”
정희연은 이상하다는 눈길로 나윤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술 먹이고 무슨 짓 하려는 건 아니지?”
“내가 그럴 사람이야?”
나윤도는 무척이나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녀가 정확히 간파했다!
정희연이 말했다.
“됐어. 안 그럴 거라고 믿어. 근데 나 한병밖에 못 마셔.”
“그래.”
나윤도도 흔쾌히 대답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술을 들이켰다.
술은 좋은 것이었다.
정희연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 나름대로 고초가 있었다. 특히나 오늘 전 남편에게 그런 일을 당할 뻔한 뒤로 그녀는 자신이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다 생각되었다.
하여 단번에 맥주를 들이키자 그녀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나윤도도 차마 더 술을 권하지 못하고 말했다.
“희연아, 못 마시겠으면 그만 마셔.”
“누가 그래 못 마신다고, 더 먹을 거야.”
정희연이 말했다.
“… 왜 이래, 아깐 안 마신다며. 이젠 말려도 안 듣네. 내가 뭔 짓 할까 무섭지 않은가 봐?”
나윤도가 말했다.
“당신이 뭘 알아,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정희연은 또다시 술을 쭉 들이키며 잔을 비웠다. 그리고 나윤도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
“나, 이 정희연이 말이야. 겉으로는 화려해 보여도, 사실… 멍청이야.”
나윤도도 그녀가 술주정을 부린다는 걸 알아챘다. 그녀의 속엔 말 못한 사정들이 많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윤도가 당황스러운 건, 이 여자가 왜 자신에게 삿대질을 하며 스스로를 멍청이라 하는 지였다.
왜 이렇게 이상하지?
정희연이 또다시 술을 마시려 하자 나윤도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됐어. 그만 마셔.”
정희연은 그의 손을 뿌리치며 단번에 잔을 비웠다. 이미 잔뜩 취한 그녀가 말했다.
“어릴 때부터 예쁘고, 공부도 잘해서, 유치원부터 지금까지 줄곧 공주대접을 받았어. 그래서 난 내가 공주인 줄 알았어. 엄마 아빠도 다 날 예뻐했으니까. 그래서 더 고집 부렸어. 엄마 아빠가 허락하지 않아도 기어코 그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했어. 머리에 물이 들어찬 거지. 지금 이렇게 된 건 결국, 자업자득이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