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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두려움에 떨다

  • 나윤도는 와인잔을 집어 스스로 와인을 따른 후 유유자적하게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말했다.
  • “염이안 씨는 지금의 나를 만난 걸 행운으로 여겨야 해요. 만약 반 년 전의 나였다면 당신은 이미 죽었어요. 나한텐 그럴 능력이 있어요, 믿으세요.”
  • 나윤도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염이안은 순간 식은땀이 흘렀다. 나윤도가 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 나윤도가 또다시 말했다.
  • “난 당신의 체면을 충분히 살려줬고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오늘 찾아온 건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경고하기 위해서예요. 내 뒤에서 다시는 딴짓하지 말아요. 돈이 좋기는 하지만 그것도 목숨이 붙어 있어야 쓰지 않겠어요? LY 회사는 생각도 하지 마세요. 말로 하는 건 여기 까집니다. 만약 충고를 듣지 않는다면 다음엔 죽여버릴 거예요!”
  • 마지막 한마디에 한기가 가득해 염이안은 몸서리를 쳤다.
  • 나윤도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고 몸을 일으켜 자리를 떠났다.
  • 염이안은 멍한 표정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순간 나윤도가 마시던 와인잔에 시선이 닿은 염이안은 놀라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 와인잔의 밑바닥이 옆에 있던 나무 탁자에 박혀 있었다.
  • 기척도 없이 무디고 여린 와인잔을 나무에 박아 넣은 나윤도의 힘이 공포스러웠다.
  • 나윤도는 사방이 화려한 조명으로 반짝거리는 번화한 거리를 걸었다.
  • 작게 한숨을 내쉰 나윤도는 여기는 국내이고 외국과 달라서 행동을 자제해야 한다고 매 순간마다 스스로를 타일렀다.
  • 외국에 있을 때는 실력이 모든 것을 판가름했고 감히 도전을 해오는 사람은 바로 죽여버리면 되기에 번거로운 일이 많지 않았지만 국내는 달랐다. 그래서 나윤도는 이번에 겁을 주는 수단을 사용했다.
  • 평소에 껄렁해 보여도 실제로 나윤도는 수완이 매우 좋은 사람이었다. 눈동자를 한번 굴리기만 해도 수많은 계략을 생각해냈다.
  • 예를 들면 대머리를 속여 차를 잘못 부수게 하고 여정이 차를 돌려주게 만드는 일 등이다.
  • 상식적으로 나윤도가 이렇게 겁을 주고 난 이후 염이안은 틀림없이 얌전해질 것이다. 두 사람의 실력이 같은 수준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윤도가 계산을 잘못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염이안의 신분이다. 염이안은 노산내관의 제자로 그에게는 대단한 선배와 후배들이 있었다.
  • 군림해 있는 것에 익숙해진 염이안은 계속해서 나윤도에게 당하자 견디기 힘들었고 더구나 엄청나게 큰 수치였다.
  • 나윤도가 떠난 후 염이안은 곧바로 큰형님 부동노한(不动罗汉)에게 전화를 걸었다.
  • “형님!”
  • 염이안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 전화기 너머에서 냉담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무슨 일이야?”
  • “형님, 성가신 일이 생겼습니다.”
  • 염이안이 말했다.
  • “무슨 일?”
  • 남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담했다.
  • 큰형님 부동노한(不动罗汉)은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뼛속까지 차가운 냉기를 풍겼다. 염이안은 늘 큰형님이 너무 오만하다고 여겨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닌 이상 큰형님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 큰형님이 절대적인 존재라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 크게 심호흡한 염이안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 “해빈 시에서 고수를 만났습니다.”
  • 부동노한(不动罗汉)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하국에는 숨어 있는 고수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네가 건드리지 않는다면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야?”
  • “하지만 제가 이미 건드렸어요. 그 사람과 저는 현재 누구 한 명 죽기 전까지 끝나지 않는 상황이에요. 형님이 나서 주지 않으시면 저는 화를 피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도와주세요!”
  • 침묵하던 부동노한(不动罗汉)이 한참 뒤에 물었다.
  • “그 고수 이름이 뭐야? 어느 정도로 대단해?”
  • “나윤도라고 아프리카에서 왔어요. 아마 과거에 용병이나 킬러였을 확률이 높아요. 바로 오늘……”
  • 염이안은 나윤도가 한 손으로 와인잔을 나무에 박아 넣던 실력을 이야기했다. 나윤도가 겁을 주기 위해 한 행동이라고 말하지 않고 자신에게서 돈을 강탈하기 위해 몰아붙인 행동이라고 말했다.
  • “형님, 모레 나윤도에게 5억을 주지 않으면 나윤도가 절 죽일 거예요. 제가 노산내관의 제자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은데 만약 제가 정말로 굴복하게 되면 이 일이 퍼져 나가서 우리 노산내관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겠어요?”
  • “술잔을 나무에 박다니!”
  • 부동노한(不动罗汉)이 이어서 말했다.
  • “확실히 고수야. 바로 갈게.”
  • 말을 마친 부동노한(不动罗汉)이 전화를 끊었다.
  • 염이안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에 큰형님이 나섰고 자신에게 많은 인맥과 인력이 있으니 염이안은 나윤도가 결코 무섭지 않았다.
  •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서 큰형님이 알게 된다 해도 염이안은 두렵지 않았다.
  • 큰형님이 이미 온 이상 거짓말이라는 것이 들통나도 손 놓고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 나윤도는 잡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월세방에 돌아오자마자 금세 잠이 들었다.
  • 다음 날 아침, 느긋한 성격의 나윤도는 자연스럽게 또다시 지각했다.
  • 유엽별장 앞에서 나윤도는 두 명의 아름다운 미녀를 차에 태웠다. 차에 탄 단예진이 원망 어린 목소리로 나윤도에게 말했다.
  • “시간 좀 잘 지킬 수 없어?”
  • 나윤도가 웃으면서 말했다.
  • “다음엔 꼭 정각에 올게.”
  • “퍽이나.”
  • 단예진이 나윤도를 흘겨봤다.
  • 그에 반해 송연아는 조용했다. 나윤도를 어찌할 방법이 없었고 또 그를 너무 질책할 수도 없었다.
  • “예진아, 내일부터 우리가 운전해서 출근하자.”
  • 단예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 “좋아!”
  • 대답하던 단예진이 난처한 얼굴로 이어서 말했다.
  • “그런데 염이안이랑 문성아 쪽은?”
  • 나윤도가 곧바로 대답했다.
  • “안심해, 염이안이랑 문성아는 이제 더 이상 제멋대로 굴지 못할 거야.”
  • “왜?”
  • 단예진과 송연아가 동시에 묻자 나윤도가 운전을 하면서 이야기했다.
  • “아, 그게 어제 내가 염이안을 찾아가서 이치에 맞게 설명했더니 나중에는 결국 내 말에 감동받아서 철저하게 자기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더라고. 울면서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약속했어.”
  • 나윤도의 말을 들은 단예진과 송연아는 어느정도 상황을 이해했다. 나윤도가 허튼소리를 늘어놓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그의 말에서 어젯밤 염이안과 나윤도가 틀림없이 모종의 합의를 이뤘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 두 사람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염이안의 일을 겪으면서 단예진과 송연아는 나윤도를 자기 사람으로 여겼다. 게다가 송연아는 2000만 원이 들어있는 은행 카드를 나윤도에게 상으로 주었다.
  • 나윤도는 송연아가 참 괜찮은 사람에 좋은 사장님이라고 생각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카드를 받았다.
  • 송연아는 순진하긴 하지만 바보가 아니었다. 나윤도가 값을 매길 수 없는 사람임을 알고 있어 그에게 잘해주며 포섭하려 했다. 송연아는 BMW 차량을 나윤도가 계속 몰고 다닐 수 있게 해주고 아침에 자신들을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 만약 나윤도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퇴근시간에도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되었다.
  • 그것도 모자라 송연아는 나윤도의 주거문제에 신경을 썼다.
  • “나한테 계속 비워 두고 있는 오래된 집이 있는데 너만 괜찮다면 그곳에 살아도 돼. 거실 두 개에 방이 두 개라서 정리만 하면 괜찮을 거야.”
  • 번거로운 것이 싫은 나윤도는 곧바로 정당한 이유를 대며 거절했다.
  • “대표님, 나는 내 힘으로 집을 마련해서 살고 싶어. 나는 남자고 사내대장부니까 줏대가 있어야지.”
  • 잠시 멈칫하던 송연아가 이어서 말했다.
  • “네가 자강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좋네. 그럼 됐어. 강요하지 않을 게.”
  • 단예진이 의심하며 말했다.
  • “이 자식 설마 이사하기 귀찮아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 “하하!”
  • 나윤도는 웃음으로 어색함을 감추었다. 다들 나윤도가 대표님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나윤도는 이제 출근이 한결 편했다. 다른 아가씨들도 나윤도를 눈여겨봤고 그 속에서 나윤도는 물 만난 물고기 같았다.
  • LY 회사의 대표님이 송연아이긴 하지만 사실 대주주는 단예진이다.
  • 송연아 스스로도 이 회사를 차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첫 번째로 송연아는 천재적인 재능이 있어 패션 디자인에 대한 조예가 높았고 두 번째로 송연아 이모부의 인맥과 재력의 도움이 있기 때문이다.
  • 단예진의 본가는 불산에 있었다. 그녀의 외할아버지 곽천수는 불산에 유명한 칭호가 있는데 바로 불산무왕(佛山武王)이다.
  • 곽천수는 불산에 개관하여 제자를 받았고 그의 문하에 있는 제자들 대부분이 명문가의 후손이었다.
  • 어렸을 때부터 외국에서 자란 단예진은 외할아버지의 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예전에 송연아도 해외에서 유학을 했기에 두 사람은 외국에서 만나 학업을 마친 뒤 돌아와 회사를 차렸다.
  • 당시에 단예진은 불산으로 가서 외할아버지를 찾아뵙고 회사를 차린다는 이야기를 언급했다. 외손녀를 아끼는 곽천수는 즉시 무조건적으로 지지했다.
  • 단예진의 배경에 대해서 외부인들은 알기 어려웠다. 단예진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할뿐더러 불산무왕(佛山武王)이라는 칭호가 유명하긴 하지만 단지 무술계 내부에 국한되어 있었다.
  • 마치 문예에는 문예계가 있고 오락에는 연예계, 작가에게는 작가들만의 범위가 있듯이 무술에도 무술계가 있었다.
  • 염이안과 같은 사람들은 이런 관계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알았더라면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을 것이다.
  • 점심에 나윤도는 먼저 정희연의 사무실을 들렀다. 요 며칠 나윤도는 정희연과 거의 교류를 하지 않았고 사적으로도 연락하지 않았다. 지난번 정희연에게 식사 초대를 했다가 거절당한 뒤로 나윤도는 더 이상 스스로 망신당하는 일을 찾아 하지 않았다.
  • 정희연은 소파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간 나윤도는 눈요기할 만한 장면을 볼 수 있을지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정희연은 경계심 가득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그녀는 두 다리를 모으고 소파 안쪽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 덕분에 그녀의 검은색 투피스 아래 감춰진 엉덩이가 더욱 섹시해 보였다.
  • 그 모습을 본 나윤도는 다가가 한번 움켜쥐고 싶었지만 상상에 그쳐야 했다.
  • 바로 이때 정희연이 잠에서 깨어나 곧바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첫눈에 나윤도를 발견한 정희연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 “내 사무실에는 왜 왔어? 그리고 노크할 줄 몰라?”
  • “하하!”
  • 웃음 지은 나윤도가 말했다.
  • “희연아, 우리 사이에 노크할 필요 있어?”
  • “내가 네 아내라고 해도 노크는 해야 돼!”
  • 정희연이 화를 냈다.
  • “알았어. 네가 내 아내라고 해도 다음번엔 꼭 노크할게.”
  • 나윤도는 속으로 싱글벙글하면서 입으로도 정희연에게서 이득을 얻는 것을 잊지 않았다.
  • 분노와 부끄러움이 겹쳐 한꺼번에 몰려왔다. 정희연도 자신이 말을 너무 빨리해서 나윤도에게 틈을 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 군말 없이 물었다.
  • “무슨 일이야?”
  • “아무 일도 없어. 네가 담요를 덮었는지 보려고 들어왔어. 감기 걸릴까 봐!”
  • 나윤도가 뻔뻔스럽게 대답했다.
  • “걱정해 줘서 고마워. 지금 아주 좋으니까 나가도 돼.”
  • 정희연이 축객령을 내렸다.
  • 울적해진 나윤도는 코를 만지작거렸다. 때로는 불처럼 열정적이고 때로는 얼음처럼 차가운 정희연을 도통 헤아릴 수 없었다.
  • “알았어!”
  • 무안해진 나윤도가 몸을 돌려 사무실을 벗어났다.
  • 나가는 나윤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정희연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윤도에게 심하게 군 것 같았다.
  • 나윤도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를 대체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정희연은 아직 생각을 정하지 못했다. 자신과 나윤도의 관계를 어떻게 직시해야 할지도 막막해서 갈등하던 정희연은 냉담함을 선택했다.
  • 정희연은 자신이 나윤도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것은 아닐지 걱정되었지만 사실 그녀의 걱정은 불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