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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아내 역할

  • 그녀는 감전된 듯 그의 손을 뿌리치고 벌떡 일어났다.
  • “안 가.”
  • 창녀로 오해받고 침대로 끌려간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그러니 이씨 집에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 “너한테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해?”
  • 그녀는 김빠진 풍선처럼 침대 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렇다. 그들은 레벨 차이가 엄청나 그녀한테 선택권이 없었다.
  • 이혼 합의서는 그녀가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지만 한순간에 그에 의해 막혀버렸다.
  • “짐 싸고 있을게.”
  • 그녀는 이걸 핑계로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벌고 싶었다. 그러면서 좋은 수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 그러나 이효는 이 기회조차도 주지 않았다.
  • “그럴 필요 없어. 엄마가 널 이뻐하셔서 집에 네 물건을 다 준비해두셨어. 가보면 필요한 물건이 다 있을 거야.”
  • 여화연은 막막하여 고개를 쳐들어 이효를 봤다. 그녀는 이효의 눈빛에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 하지만 이상한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 이효의 차에 앉아 이씨 저택으로 가는 동안 여화연의 무서움에 마음이 계속 떨렸다.
  • 그에게 이끌려 이씨 저택의 소파에 앉아 그의 부모님 이산과 하영을 대면했을 때 그녀는 완전히 굳어버렸다.
  • 아버님은 냉담했고 어머님은 친절하고 온화한 분이셨다. 분명히 반백 살에 가까운 분이셨지만 외모는 30대 후반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 “드디어 아내를 데려왔어. 엄마는 네가 아내를 까먹은 줄 알았잖아.”
  • 어머님은 아들을 보며 기쁘게 웃었다. 그리고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 “이렇게 좋은 아내를 잃어버리면 너만 손해야.”
  • 이효의 표정은 담담했다.
  • “알겠어요, 엄마.”
  • “화연아, 이제 우리 집에 왔으니까 자기 집이라 생각하고 살아. 집에 차가 많고 기사도 있으니까 외출하기 쉬울 거야.”
  • 하영은 꼰대 느낌이 하나도 없이 아주 친근한 모습이었다.
  • 하영은 아들내외와 같이 살고 싶었다. 안 그러면 집에 두 늙은이만 남아 아주 적적할 것이다.
  • 여화연은 잔뜩 굳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어머님을 거절하려고 했지만 이효가 그녀의 허릿살을 콱 꼬집었다.
  • 그러자 그녀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 “감사합니다, 아줌마!”
  • 하영은 화내지 않고 도리어 웃었다.
  • “에이고, 해외에 오래 있다가 돌아오니 아직 적응이 잘 안 되지? 엄마, 아빠라고 불러.”
  • 여화연은 여전히 뻣뻣했다.
  • “엄마, 아빠.”
  • 하영은 해맑게 웃었다.
  • “이쁜 것, 앞으로 힘내.”
  • “네?”
  • ‘힘내? 왜 힘을 내야 하지?’
  • 이에 어머님이 말했다.
  • “아이도 가져야지. 아이가 있어야 가정이 완벽한 거야. 우리 이효도 맨날 상입현이랑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순 없어. 마음을 다잡고 아내랑 같이 가정에 신경 써야 해.”
  • 아버님은 고개만 끄덕이셨다. 그는 아내 말이면 무조건 다 바르다고 생각했다.
  • 어머님의 모습을 보며 여화연은 사랑과 가정이 여성한테 가장 좋은 케어라고 생각했다.
  • 하영은 그녀를 보고 웃음을 지었다.
  • “화연아, 힘내. 행복은 네 손 안에 있는 거야.”
  • 그녀는 고개를 아래위로 크게 흔들었다. 그녀는 이혼해야 행복할 수 있다. 증오하는 남편이랑 같이 사는 것이 행복할 리가 없었다.
  • “아들, 곁에 있는 사람한테 잘해.”
  • 이효는 기계처럼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어머님이 두 사람의 손을 잡고 악수를 시키며 하루빨리 귀동자를 보라고 축복하고 있을 때 여화연의 마음속에는 절망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단기간 내에 이혼은 불가능한 듯싶었다.
  • 그 순간, 그녀는 왜 매번 자기를 볼 때마다 진저리를 치던 이효가 갑자기 태도가 180도 바뀌고 이혼도 거절하는지 깨달았다.
  • ‘설마 나 보고 그의 아내 역할을 하라는 건 아니겠지?’
  • 만약 그렇다면 이혼은 먼 미래의 얘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