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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사과할게

  • 하영은 여화연을 잡고 잠시 얘기를 나누셨다. 그리고 손에 차고 있던 팔찌를 풀어 주시고 나서야 그녀를 이효 방으로 돌려보냈다.
  •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이효를 뒤를 따라갔다.
  • “이거 내가 받아도 될까?”
  • 그녀는 어머님이 팔찌를 넘겨주실 때 이효와 아버님의 낯빛이 싹 변한 것을 눈치챘다.
  • “엄마가 준 거니까 네가 가져.”
  • 그는 조금 귀찮아 보였다.
  • “알겠어.”
  • 그녀는 팔찌의 흑옥을 살펴봤다. 팔찌의 질감은 우수했으며 먹 같은 흑색 위에 기름칠한 듯 반짝반짝 빛났다. 그녀가 높이 들어 빛 아래에 비추자 팔찌의 반투명한 흑색 속에 녹색도 살짝 띠고 있어 아주 맑고 깨끗한 느낌을 줬다.
  • 한눈에 봐도 비싼 물건이었다.
  • 그녀는 마음이 조금 들떴다. 그녀도 어머님이 자기한테 잘해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이효는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섰다.
  • 여화연은 갑자기 그날 밤 장면이 떠올라 문밖에 멈춰 섰다.
  •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고 한눈에 그녀의 생각을 알아챘다. 그리고 웃는 듯 웃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 “그날 밤에도 들어왔는데 오늘 못 들어올 이유가 있어?”
  • “그때랑 달라.”
  • 여화연은 이효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었다.
  • “우리 잠깐 얘기 좀 해.”
  • 지금 그들의 관계는 너무 이상했다. 이효는 쉬운 대화상대가 아니었다.
  • 만약 그가 3년 전에도 이런 태도였다면 그녀는 급급히 유학길에 올라 그를 피할 이유도 없었다.
  • “무슨 일이야? 들어와서 얘기해.”
  • 이효는 참을성이 없이 그녀를 한숨에 잡아 방에 들여놓고 발로 문을 쾅 닫았다.
  • 그녀는 한동안 낑낑대고 나서야 겨우 손목에서 팔찌를 빼냈다. 그리고 조심스레 한쪽에 놓으며 말했다.
  • “이거 그냥 단순히 팔찌가 아니란 걸 나도 알아. 평소 나도 덤벙거려 깨질 수 있으니까 이건 네가 보관해둬.”
  •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거야?”
  • 여화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이혼 합의서는 내 생각에…”
  •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말을 끊어버렸다.
  • “네 생각은 네 생각일 뿐이고 내 알 바 아니야.”
  • “결혼은 두 사람이 같이한 거야. 누구도 이어갈 마음이 없으면 차라리 빨리 이혼하는 게 나아. 이렇게 계속 서로 허비하면 우리 둘한테 다 안 좋아.”
  • 그녀는 그가 갑자기 이혼을 거부하는 이유가 승복하지 싫어서임을 알고 있었다.
  • 그날 밤 있었던 일과 자기 아내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일에 승복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내가 사과할게.”
  • 그녀의 눈에서 빛이 났다.
  • “사과? 어떤 걸 사과하려고 그러지? 3년 전 아니면 3년 후?”
  • 그는 그녀의 앞에 다가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그의 희고 보드라운 턱을 들고 무게감 있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속에는 경멸이 차 있었다.
  • “여화연, 난 너한테 두 번이나 걸려 넘어졌어. 하지만 지금은 잠시 넘어진 채로 있고 싶은데, 어떡하지?”
  • ‘두 번 걸려 넘어져? 넘어진 채로 있고 싶어? 무슨 말이지?’
  • 여화연의 가슴은 쿵쿵 빠른 속도로 뛰었다. 그의 말속에 다른 뜻이 있는 듯싶었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 “3년 전이나 지금이나 골탕을 먹은 건 나야.”
  • 턱을 잡고 있던 손가락이 갑자기 위로 올라가 그녀의 입을 막았다.
  • “하지만 넌 이씨 집안의 사모님이야, 여화연.”
  • 손가락으로 입을 막아 그녀의 말은 어물어물했다.
  • “그러니까 이혼해 너에게 자유를 되돌려 주겠다고.”
  • 그는 돌연 몸을 숙여 그녀의 귀가에 속삭였다.
  • “내가 왜 네 뜻대로 해야 하지?”
  • 뜨거운 호흡이 귀 주위에 맴돌았다. 그녀는 낌새를 눈치챘지만 이미 늦었다.
  • 이효는 큼직한 손을 휘둘러 그녀의 셔츠를 벗겼다.
  • 눈같이 하얀 피부가 눈앞에 드러나자 그날 밤 그녀가 자기 몸 밑에서 피어나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더니 입술을 그녀의 몸에 붙였다. 겨우 흔적을 다 지운 몸에 또다시 악마의 낙인이 찍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