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하씨 가문 외동딸이 실종된지 벌써 몇 년이에요? 전 세계를 찾아다녀도 찾지 못했다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차시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최근 들은 얘기로는 이번에는 확실하다는 것 같아. 이미 단서가 잡혔대.”
심수연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은우야, 우리 가문이 전국에서 손꼽히는 부자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봤자 일개 사업가에 불과해. J시티 하씨 가문은 대대로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가 집안이야. 정략결혼이 얼마나 중요한지 너도 알잖아. 결혼은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야. 그렇지?”
“와! 하씨 가문의 아가씨면 거의 준 귀족이네요.”
차시연이 부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옛날 황실 시대와 비교하면 하씨 가문은 거의 재상급에 속하는 귀족 가문이었다.
차은우가 뭐라고 하려는데 채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차은우 씨가 혼약이 있는 사람인 건 오늘 처음 알았네요. 저한테 원하는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재벌가와 세력가의 결합이라, 거의 세계 정복 수준의 거대한 행사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채연은 그들 사이에 낄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차은우가 차가운 눈빛으로 채연을 노려보았다.
옆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차시연이 이 틈을 타서 차은우의 팔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오빠, 채연 저 여자랑 당장 이혼해. 쟤 학교에서도 나랑 안 맞았어. 진 교수님 프로젝트도 분명 우리 가문에서 투자했는데 쟤가 가로챘잖아. 무슨 수로 당첨됐는지 궁금했는데 오빠가 밀어준 거였구나? 오빠, 쟤 당장 프로젝트에서 제외시켜.”
“미안하지만, 진 교수님 프로젝트는 내가 까다로운 면접을 다 통과하고 내 실력으로 참여한 거야.”
참다못한 채연이 말했다.
가짜 결혼과 그녀가 지금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시연아, 그만해. 네가 실력이 부족해서 떨어진 걸 누굴 탓해?”
차은우는 그래도 여동생을 꽤 아끼는 편이었다.
그래서 차시연은 어려서부터 철부지에 자기중심적인 사람으로 자랐다.
하지만 진 교수의 인품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보수적이면서도 정직하고 학술을 위해 모든 걸 바치는 사람으로, 돈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번 진 교수가 책임을 맡은 자동차 디자인 프로젝트는 R&S 그룹에도 무척 중요한 프로젝트 중 하나로, 국제 시장 진입을 위해 꼭 필요한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채연이 그 프로젝트팀의 일원이라니.
차은우로서는 채연을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꽤 명석한 두뇌를 가졌네.’
“오빠!”
차시연이 잔뜩 화난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은우야, 당장 이혼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어. 언론에서 알게 되면 일이 더 시끄러워져.”
심수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늑대를 집안으로 불러들인 격이야, 오빠. 오늘 내치지 않으면 나중에 더 끈질기게 들러붙을 거라고! 저 얼굴에 속지 마!”
차시연이 한술 더 떴다.
“다들 입 다물지 못해!”
노인의 근엄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지팡이를 짚은 한 노인이 천천히 거실에 들어서고 있었다.
흰 머리에 주름이 가득했지만 여전히 우아하고 기품이 흘러넘쳤다.
“할머니, 왜 퇴원하셨어요?”
차은우는 다급히 다가가서 노인을 부축하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는 생모인 심수연보다 할머니를 더 존경하고 따랐다.
“나 아직 안 죽었어! 그런데 뭐? 벌써 재산 분할을 운운하고 있어?”
조근영이 냉랭한 눈빛으로 심수연을 쏘아보며 물었다.
“어머님, 그런 뜻이 아니에요.”
조금 전까지 기고만장하던 심수연이 잔뜩 기죽은 얼굴로 변명했다.
“나 다 들었어! 채연이는 내가 선택한 손주며느리야. 너희들이 이 아이에게 재산을 나눠주기 싫다고 해도 회사 지분은 나한테도 있어!”
조근영은 잔뜩 분노한 표정으로 언성을 높였다.
“너희들! 내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지?”
채연은 다급히 다가가서 노인을 위로했다.
“할머니, 안색이 안 좋으세요. 이렇게 화내시면 안 좋아요. 진정하세요. 건강이 우선이죠.”
어려서부터 가족의 사랑을 모르고 자란 그녀에게 조근영은 가족 같은 따뜻함을 느끼게 해준 사람이었다.
애초에 결혼을 승낙한 것도 이 노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드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심수연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시어머니 조근영은 차씨 가문 창시자 중 한 사람이었고 소유한 지분은 그녀의 열 배 이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