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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착각

  • 안세희는 바로 강변에 달려가서 물에 몸을 적신 뒤, 다시 돌아와서 그의 상처를 싸매 주었다.
  • 그녀는 일부러 옷을 군데군데 찢고 입술을 피가 나게 깨물었다. 그러고는 다리를 힘껏 꼬집어 가짜 눈물까지 쥐어짰다.
  • 모든 준비가 끝난 뒤, 그녀는 119에 전화를 걸고 그의 옆에서 그가 깨기만을 기다렸다.
  • 구급차 소리가 들리면 그도 정신을 차릴 것이다. 그리고 구급차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빈틈없었다.
  • 그렇게 한참이 지난 뒤, 사이렌 소리가 적막한 길의 고요를 깨웠고 번쩍이는 불빛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 차은우도 시끄러운 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 그를 괴롭혔던 열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편안한 느낌이 몸을 감쌌다. 그는 힘겹게 눈을 떴다.
  • 옆에서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 “깼어요? 제가 구급차 불렀어요. 저기 오네요.”
  • “당신은….”
  • 그는 갑자기 머릿속에 조금 전 있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 참으로 멈추고 싶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달콤한 경험이었다.
  • 차은우는 구급차 불빛을 빌어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단아하고 귀여운 이미지의 여자가 눈물이 글썽해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푹 젖은 옷차림과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새까맣고 긴 머리, 청순하고 가련한 모습이었다.
  • 흐트러진 옷과 새빨갛게 부은 눈, 그리고 살짝 터진 입술.
  • “그쪽이 나를 구했어요?”
  • 차은우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 안세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길 가다가 물에 빠지셨길래 제가 끌고 강기슭까지 올라왔어요. 다리에 부상을 입으셨는데 제가 이미 지혈해 드렸으니까 치료받으시면 괜찮을 거예요.”
  • “내가 조금 전 그 쪽에게….”
  • 안세희는 순간 멈칫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 표정을 보면 마치 진짜 그런 일을 당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 차은우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이내 실망감이 들었다.
  • 그가 상상했던 이미지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덮쳤던 여자는 굴복할 줄 모르는 앙칼진 고양이 같은 이미지였다. 그런 모습이 더 그의 승부욕을 자극했었다.
  • 그런데 지금 눈앞의 여자는 그저 한없이 약하고 처량한 모습일 뿐이었다.
  • 자신이 이런 여자한테 주체할 수 없는 욕구를 느꼈다는 사실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 “이름이 뭐예요? 나이는 어떻게 됐죠?”
  • “스물두 살 안세희요. 카네스 대학 시장 마케팅 학과에 다니고 있어요.”
  • 차은우는 눈을 감고 고민에 잠겼다. 오늘 누군가가 그에게 독을 탔고 습격을 당했다. 이 여자가 아니었으면 그는 진작 하늘나라로 갔을 운명이었다.
  • 그러니까 그는 생명의 은인에게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짓을 저지른 것이다.
  • 그는 책임감을 가장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 그리고 그녀를 안으며 책임지겠다고 했던 말도 기억났다.
  • 하지만 눈앞에서 처량하게 울고 있는 여자를 보고 있자니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았다….
  • 잠시 고민하던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 “내가 책임질게. 하지만 시간이 좀 필요해.”
  • 그는 명함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 “차은우라고 합니다. 안세희 씨라고 했죠? 기억할게요. 일단 내가 급한 일부터 처리하고 다시 연락하죠.”
  • 어쨌든 그는 오늘 오전 채연과 혼인신고를 올렸고 이 일을 잘 마무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 안세희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조용히 흐느꼈다.
  • “저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요….”
  •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명함을 바라보았다.
  • R&S 대표 이사, 차은우.
  • 명함을 확인한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