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 김지수는 손을 덜덜 떨며 영상을 눌러 재생했다.
- 블랙박스 화면이 살짝 흔들렸다. 제일 먼저 귀를 때린 건 강세리의 요염하고 급한 숨소리였다 — 김지수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노골적인 문란함이었다.
- “오빠, 빨리 해. 지수 금방 올 수도 있어.” 빨갛게 매니큐어 칠한 그녀의 손이 가죽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 “걱정 마. 청담동 그 보석상에 약혼반지 수선 맡긴 거 찾으러 보내놨어. 왕복 최소 한 시간 걸려.” 화면에 박태민의 얼굴이 잡혔다. 그는 시크하게 넥타이를 풀면서,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걸었다.
- 곧이어 옷이 비벼지는 소리, 좌석이 흔들리며 둔탁하게 울리는 소리가 한 방울 한 방울, 김지수의 귀에 박혔다.
- 카메라는 뒷좌석을 정면으로 비추고 있었다. 박태민이 강세리를 눕히는 장면이 또렷이 찍혔다. 그녀는 곧장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너무나익숙한 그 모습이 김지수의 눈을 송곳처럼 찔렀다.
- “위임 서류, 확실히 다 받아냈지?” 박태민이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그는 강세리의 브라 끈을 거칠게 확 당겼다. 손끝에 일말의 다정함도 없었다.
- 강세리가 가식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일부러 애교 섞인 목소리로, “그럼, 착하게 다 사인했지. 이제는… 아!… 병원에서 정신상태 불안정이라고만 확인해 주면, 걔 명의 재산 전부가… 음… 후견인한테 넘어가…”
- “그 후견인이 바로 오빠, 그녀의 약혼남. 아, 오빠, 살살 좀.”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치솟았다. 박태민이 그녀의 가슴을 거칠게 물어뜯었지만, 강세리는 여전히 핵심을 꼭 덧붙였다.
- “그다음엔 전부 우리 공동계좌로 옮길 수 있어.” 그녀가 그의 머리칼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고개를 젖힌 채 물었다. “오빠, 정말 이렇게 할 거야? 그래도 너희 약혼까지 했잖아…”
- 박태민의 동작이 더 난폭해졌다. 목소리엔 눌러 담은 짜증과 혐오가 묻어났다. “5년이야! 매번 내가 손만 대면 걔 그렇게 청순 성녀 빼는 꼴이야. 그 가식적인 걸 보고 토 나올 지경이거든!”
- 김지수는 침대 시트를 사정없이 움켜쥐었다.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손마디가 하얗게 질렀다.
- 오른쪽 아래 시간 표시가 3시 28분으로 바뀔 때, 박태민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
- 그가 귀찮다는 듯 집어 들어 화면을 힐끗 보더니, 바로 욕을 내뱉었다. “젠장, 지수다.”
- 강세리의 몸이 확 굳었다. 눈빛엔 숨길 수 없는 불안이 번졌다. “눈치 챘어?”
- 박태민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전화를 받는 순간 평소처럼 다정한 톤으로 갈아탔다. “지수야, 왜?”
- “뭐라고? 교통사고가 났다고?”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강세리를 의미심장하게 한 번 쳐다봤다. 그리고 잔뜩 걱정스러운 척, “많이 놀랬지? 금방 갈게.”
- 전화를 끊자마자 그는 어지러운 옷매무새를 급히 추스르며 속사포처럼 말했다. “지수 교통사고 났대. 지금 성심병원으로 가는 중이래.”
- 강세리가 입술을 핥으며 약간 고소하다는 듯 물었다. “죽었어?”
- “아니.”
- “사고 났는데도 그대로 안 죽다니, 운도 더럽게 좋네.” 강세리가 입을 삐죽 내밀며 아쉬운 듯 말했다.
- “대신 머리를 부딪쳤대.”
- “머리… 다친 거야?” 강세리가 눈을 깜빡이며 급하게 떠봤다. “심한 거야? 판단력에 영향 있을 정도로?”
- “머리만 부딪쳤다더라. 나머지는 의사 소견 들어봐야지!” 박태민이 말하며 차문을 열고 내릴 참이었다.
- 강세리가 불쑥 그의 손목을 붙잡고, 손끝으로 그의 가슴을 느리게 스쳤다. 목소리는 유혹으로 번들거렸다. “지수 교통사고 났으면 어디 도망가겠어. 그렇게 급할 거 없어. 우리 다 놀고 가자.”
- 박태민은 그녀를 잠깐 내려다보더니, 다시 차 안으로 거칠게 밀어 넣었다.
- 영상 끝나기 직전 마지막 프레임엔, 강세리가 김지수 전에 차에 두고 간 립스틱을 들어 백미러 보며 능숙하게 바르는 장면이 잡혔다. 입가엔 반드시 손에 넣겠다는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시간은 4시 01분 — 그녀가 사고 난 뒤로 벌써 30분이 지나 있었다.
- 핸드폰이 탁 하고 손에서 미끄러져, 이불 위로 떨어졌다.
- 멈춰진 화면 속, 박태민이 강세리 허벅지에 올린 손. 그 무명지에는 그녀와 약혼할 때 했던 반지가 그대로 끼어 있었다. 어둑한 조명 아래서 차갑고 비아냥대는 듯 반짝였다.
- 그래였구나.
- 이건 애초에 사고가 아니었다. 치밀하게 짜인 약탈극이었다. 그들은 진작부터 그녀를 정신이상자로 만들 작정이었고, 우연히 생긴 ‘기억상실’은 그들의 계획을 더 수월하게 굴러가게 만들었을 뿐.
- 박태민은 그녀를 혼자 반지를 찾으러 보내고, 자기들은 그녀의 차 안에서 몰래 몸을 섞었다. 그녀가 살려달라며 전화를 했을 때조차, 둘은 아직 서로의 몸속에…
- 참 우습고, 아이러니하네.
- 사고 전날, 결혼식 준비할 게 너무 많아 중요한 게 빠질까 봐, 김지수는 일부러 블랙박스 영상 자동 전송 기능을 켰다. 매주 메일로 백업되게 설정해 두었다.
- 첫 번째로 도착한 영상이, 이렇게 추악한 배신과 공모일 줄 몰랐다.
- 김지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폰을 다시 베개 밑에 밀어 넣었다.
- 이 눈물은 박태민 때문도, 강세리 때문도 아니다. 한때 사랑과 우정을 철석같이 믿었던, 순진해서 안쓰럽기까지 했던 자기 자신을 위한 눈물이다.
- 창밖 한강의 밤은 깊고, 남산타워 불빛은 하늘을 가르는 칼날처럼 곧게 솟아 있었다.
- 박태민과 강세리는 자신들이 이겼다고 착각하겠지. 하지만 그들은 치명적인 실수를 했어 — 박도훈을 그녀 곁에 들인 것.
- 속을 가늠할 수 없는 그 남자. 지금 그녀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말일지도 모른다.
- 그리고 이제 그녀가 할 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기억상실’ 연기를 계속하고, 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부모 유산의 행방을 캐내서, 끝내 자기 몫을 자기 손으로 되찾는 것.
- ……
- 박도훈의 아파트는 남산권에 있는, 백 년은 되어 보이는 클래식 건물의 꼭대기 층에 있었다.
- 그의 제네시스 GV80이 조각무늬 철문 앞에 매끈하게 멈춰 섰을 때, 김지수는 안전벨트를 움켜쥔 손에 잔뜩 힘을 줬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고, 심장은 뜻대로 가라앉지 않았다.
- “집 도착했어.” 박도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엔 김지수가 읽기 힘든, 옅은 기대가 묻어 있었다. 그 한마디가 차 안의 고요를 깨뜨렸다.
- 집.
- 그 한 단어가 바늘처럼 심장을 콱 찔렀다.
- 부모가 항공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넓디넓은 아파트에는 그녀 혼자뿐이었다. 박태민과 결혼하면 그는 진짜 ‘집’을 만들어 줄 거라 믿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공들여 꾸민 그 집은 아마 오래전부터 그와 강세리가 뒤엉키던 장소였겠지.
- “왜?” 박도훈은 그녀의 굳은 기색을 재빨리 눈치챘다. 고개를 살짝 돌려 바라보는 그의 깊은 눈매는, 그녀의 모든 가면을 꿰뚫어 볼 듯했다.
- “아니요, 그냥… 좀 낯설어서요.” 김지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 그가 잠깐 침묵하더니 손을 뻗었다. 손끝이 그녀의 볼을 살짝 스쳤다. 교통사고가 남긴 옅은 멍 위를,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럽게.
- 예상치 못한 닿음에, 김지수는 그 자리에서 숨이 턱 막혔다. 몸이 먼저 굳었다.
- “낯설지. 근데 곧 익숙해질 거야.” 그의 목소리는 가볍고 낮았다. 이상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는 힘이 있었다. 평소의 차가움과는 전혀 달랐다.
- “고마워요.” 김지수는 작게 중얼거렸다. 속은 엉망진창이었다. 대본에 없는 이런 친밀감,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다.
- 박도훈은 손을 거두고 더 말하지 않았다. 차문을 열고 내려와, 그녀 쪽 문을 신사적으로 열어 주었다.
-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좁은 공간을 그의 향이 채웠다 — 서늘한 삼나무, 거기에 아주 옅은 백단향.
- 이 향은 이상하게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과하게 튀고 톡 쏘던 박태민의 코롱과는 완전히 달랐고, 묘하게 마음이 놓였다.
- “내 몸에 있는 향기 좋아하네.” 박도훈이 불쑥 말했다. 확신에 찬 어투였다.
- 김지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눈도 못 맞추고 더듬거리며 반박했다. “저… 전혀요…”
- “맞거든.” 그는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동공이 커졌고, 숨도 빨라졌어.”
- 그가 불현듯 몸을 기울여 그녀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 뜨거운 숨이 귓바퀴를 스치며 전기가 통하듯 간질거림이 번졌다. “지수야, 네 몸은 솔직하잖아.”
-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무너질 듯하던 그녀의 체면을 구해 준 구조 신호였다.
- 그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방금 그녀를 놀려 댄 사람이 자기 맞나 싶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복도 끝의 양문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 문을 여는 순간, 펼쳐진 아파트 내부에 김지수는 절로 숨을 들이켰다 — 높게 뻗은 천장, 한강 야경이 통째로 내려다보이는 통유리 창. 모던한 미니멀 가구들 사이, 값비싼 골동품 몇 점이 완벽하게 어우러진다. 낮고 조용한 호화로움.
- 하지만 무엇보다 눈을 끈 건, 거실 중앙의 검은 그랜드피아노였다. 뚜껑 위엔 반쯤 찬 레드와인 잔이 놓여 있었다.
- “피아노 치세요?” 김지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 “가끔.” 여전히 짧았다. 불필요한 설명은 없었다.
- “욕실은 왼쪽.” 그는 넥타이를 툭 풀어 소파 위에 던지며, 마치 오래 함께 살아온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말했다. “우리 침실은 오른쪽.”
- “우… 우리 침실이요?” 김지수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발이 앞으로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았다. 가슴이 푹 꺼지며, 자신의 계획이 정말 현명했는지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 지금의 박도훈은 그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공세적이었고… 더 위험했다.
- 그가 그녀를 보는 눈빛은, 돌봐야 할 기억상실 환자를 보는 게 아니었다. 노련한 사냥꾼이, 제 먹잇감을 똑바로 조준하는 그 눈이었다.
- “저… 우리 정말…” 김지수는 다시 그를 올려다보며, 길을 잃고 당황한 기억상실 환자 연기를 계속했다.
- 박도훈이 홱 돌아서더니, 몇 걸음에 그녀 앞까지 다가왔다.
- 그는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훌쩍 컸다. 김지수는 고개를 바짝 젖혀서야 그의 얼굴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빛과 그림자가 그의 얼굴에 깊은 윤곽을 만들었다. 눈빛은 더더욱 읽히지 않았다.
- “됐어, 김지수.” 그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박태민 앞에서의 다정한 가면은 사라지고, 원래의 차갑고 낮은 톤으로 돌아왔다. “집이잖아. 이제 그만 연기해.”
- 김지수의 피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고,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남은 건 끝도 없는 경악과 공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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