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유리창 밖으로는 한강 물빛이 굽이치며 반짝였고, 병실 안은 소독약과 고급 아로마가 뒤섞인 냄새로 가득했다.
김지수는 푹신한 의료용 매트리스에 누워 있었다. 눈꺼풀이 납덩어리처럼 무겁다. 콧속을 파고드는 소독약에 좀약 같은 싸한 기운이 점막을 톡톡 찔렀다. 눈을 감고 있어도 어딘지 확실히 알 수 있을 만큼 강했다.
귓가에는 심전도 모니터의 규칙적인 ‘삐, 삐’ 소리. 그 사이로 남자 둘의 발소리가 또렷이 섞여 들어왔다. 병실 원목문 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수는 도대체 언제 깨어나, 도훈 형?”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김지수의 속눈썹이 아주 살짝 떨렸다.
박태민—그녀의 약혼자이자 박씨 그룹 부사장. 어머니가 현 회장 부인이라는 빽 믿고, 실력도 없으면서 그룹에서 술술 올라간 인간. 목소리를 일부러 낮췄지만, 문틈을 뚫고 또렷하게 들려왔다.
“의사 말로는, 언제든 가능하대.” 더 낮고 굵은 남자 목소리가 뒤따랐다.
낯선 듯 익숙한 소리.
김지수는 번개처럼 생각을 굴렸다가 곧바로 떠올렸다—박도훈. 태민과는 남보다 못한 이복형, 박씨집안의 장남이자 박씨 그룹 전무이사.
“도훈 형, 지수가 진짜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거 맞지?” 박태민의 말투에는, 김지수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가벼움과 장난기가 배어 있었다. 입으로는 ‘형’이라 부르면서도 존중은 1도 없고, 자리 믿고 잘난 척하는 오만만 잔뜩이었다.
“단기 기억상실. 뇌진탕 후유증이라서 며칠 만에 돌아올 수도, 몇 달 걸릴 수도 있대.”
박도훈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상대의 싸가지 없는 톤 따윈 신경도 안 쓰는 듯.
김지수는 살짝 눈을 틔웠다.
문가에 남자 둘이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박태민의 짙은 밤색 머리카락이 조명 아래서 은근하게 빛났고, 그 옆의 박도훈은 키가 크고 곧은 체격에 맞춘 수트가 어깨선을 날카롭게 살렸다. 거의 문틀을 다 가릴 만큼 존재감이 컸다.
“완벽하네.” 박태민이 가볍게 웃더니, 갑자기 말투를 바꾸며 일부러 공손한 척했다. “그런데 말이야, 도훈 형. 부탁 하나 있는데.”
“말해.” 박도훈이 차갑게 받았다.
“지수가 기억을 잃었으니… 우리, 서로 사이를 새로 정리해보는 거 어때?” 박태민이 말끝을 길게 늘이며 떠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박도훈의 평온한 톤에 처음으로 미세한 파문이 스쳤다.
“형, 진정하고. 내 말 좀 끝까지 들어봐.” 박태민이 일부러 목소리를 더 낮췄다. ‘형’이라는 단어를 유독 힘줘 부르며 혈연 뒤에 숨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김지수는 귀를 더 가까이 대보려 했지만, 뒤이은 소리는 여전히 잘 들리지 않았다. 초조함이 목 끝까지 차올랐을 때, 박도훈의 목소리가 확 차갑게 바뀌어 다시 들려왔다.
“나더러, 그녀 남자친구인 척 하라고?” 못마땅함과 어이가 한가득 실린 톤이었다.
“의사가 그러잖아. 지수 지금 아무것도 기억 못 한다고.” 박태민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도훈 형, 잠깐만 남친 역할 좀 해 주면 안돼? 어차피 연기, 우리 집안에서 형이 제일 잘하잖아?”
“그리고 나는 세리랑, 커플로 당당하게 지수 앞에 나타날 거고.” 그의 목소리엔 병적으로 뒤틀린 쾌감이 묻어났다.
“세리가 누군데?” 박도훈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의아함이 스쳤다.
“지수 절친 말야. 형 기억 안 나? 젊은 변호사. 지난 5년 동안, 그 애가 줄곧 내 침대에서 잤다고.” 박태민의 웃음은 귀를 긁는 듯 역겨웠다. 무딘 칼이 되어 문 안쪽의 김지수를 그대로 찔러 넣는 느낌.
김지수의 손끝이 번쩍 움찔하더니, 손바닥 살을 깊게 파고들었다. 날카로운 통증이 번졌지만, 가슴 한가운데 끓어오르는 고통엔 백분의 일도 못 미쳤다.
강세리… 대학 때부터 그녀 곁을 떠나지 않던 그 절친. 부모가 남긴 재산을 전적으로 맡긴 신탁 변호사. 둘이 이미 오래전부터 한통속이었다니… 그것도, 무려 5년이나?
“미쳤냐, 박태민?” 박도훈의 목소리에는 알아차리기 힘든 분노가 얇게 섞였다. 경고처럼 또박또박 그의 본명을 불렀다.
“도훈 형, 이거 엄청 재미있지 않아?” 박태민의 들뜸은 점점 가팔라졌다. “지수가 기억을 되찾는 그날, 자기 절친이랑 약혼남이 오래전부터 꽁냥거렸다는 걸 알게 되고, 정작 본인은—내 이복형한테 마음까지 주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거지. 후. 손만 잡아도 빨개지던 그 순진녀, 그때 표정이 얼마나 볼만하겠어.”
“태민아, 너 진짜 변태다.” 박도훈의 목소리는 다시 평평해졌다. “근데 왜 하필 나냐?”
“형은 지수 싫어하잖아, 안 그래? 본가에서 식사 때 지수만 나타나면 항상 얼음장 얼굴에, 눈길 한 번도 안 주고. 난 믿어. 형은 내가 거른 여잔 절대 안 건드릴 거라고.” 박태민은 자기 이기심과 오만을 숨기지도 않았다—그의 눈에 김지수는 마음대로 버려도 되는 물건에 불과했다.
김지수의 심장이 보이지 않는 손에 거칠게 움켜잡힌 듯, 숨쉬기조차 힘들어졌다.
5년.
그녀는 박태민과 5년을 사귀고, 2년 전에 약혼했다. 정석대로라면 반 년 뒤면 결혼식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녀가 교통사고로 ‘기억상실’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지루해진 장난감 던지듯 지수를 형에게 내던졌다. 정작 본인은, 그녀의 절친과 관계를 당당히 공개하겠다고?
그리고 그 모든 목적이, 고작 그녀의 고통과 절망으로 짜인 ‘재미있는 쇼’를 보기 위해서였다니?
더 웃긴 건—
그녀, 기억 안 잃었다.
사고 순간 잠깐 기절했을 뿐, 다시 눈을 뜬 뒤의 기억은 전부 멀쩡했다.
그녀는 그저… 한심한 기대 하나 품었을 뿐이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 못 한다면, 박태민이 혹시라도 다시 진심을 내어줄까 싶어서.
하지만 그가 내민 건, 가차없는 배신뿐. 그녀의 자존을 신나게 짓밟아 산산이 부쉈다.
그때, 박도훈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비웃음이 옅게 섞여 있었다. “진짜 이렇게 할 거야? 나중에 진실 알면, 지수 완전 무너질 수도 있어.”
“그래서 뭐?” 박태민은 코웃음을 쳤다. “지수는 나 못 떠나. 기억 돌아와도, 내가 장난친 줄로만 알 걸. 그때 가서 명품 몇 개 사주고 달래면, 결국 얌전히 돌아오겠지 뭐.”
김지수의 손톱이 손바닥 살을 거의 뚫었다.
그의 눈에, 그녀는 이렇게 싸구려였구나.
지금 당장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나, 박태민의 추한 민낯을 들춰내고 싶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의 목소리가 또다시 꽂혔다—
“아, 그리고. 도훈 형. 설마 내가 지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는 건 아니지? 그 애가 얼마나 재미없는지 알아? 나 아직 그 몸에 손도 안 댔다고.”
김지수의 몸이 굳어버렸다.
지난 5년 동안, 박태민은 늘 다정했지만, 마지막 선은 지켰다. 입맞춤도 드물었고, 더 깊은 스킨십은 더더욱 없었다.
그는 늘 말했다. “지수야, 이런 건 우리 결혼하고 하자. 제일 좋은 건 다 신혼 첫날밤에 남겨둘 거야.”
그녀는 그 말이 배려와 존중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그녀는 몰랐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그녀의 조심성과 보수성이 그저 거슬렸다는 걸.
모든 게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절친 강세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와 얽혀 있었다.
“내가 그녀와 약혼한 건, 다 그 애가 쥔 돈 때문이야.” 박태민의 목소리엔 더 이상 가면이 없었다.
김지수의 숨이 딱, 멈췄다.
그 돈?
부모가 물려준, 니치하지만 잠재력 있는 란제리 브랜드 ‘가시새’ 때문? 아니면 막대한 가문 유산?
“됐고, 도훈 형. 거래는 간단해.” 박태민의 톤이 다시 가벼워졌다. 마치 평범한 비즈니스 얘기라도 하는 듯.
“형은 지수 남자친구 역할만 해. 의심 못 하게. 내가 세리랑 같이 그 애 명의 자산 전부 옮기고 나면, 지수한테 보상금 좀 쥐여주고, 모든 걸 밝힐 거야. 그때 가서, 깔끔하게 약혼을 정리할 거야.”
강세리는 그녀의 신탁 변호사. 그녀 명의의 와이너리, 신탁 펀드, 보석 컬렉션… 모든 게 강세리 손을 거쳐 관리되고 있다.
그렇다면, 둘은 이미 오래전에 손을 잡은 건가? 내 명의의 자산들, 벌써 손댄 건 아닐까?
박태민이 이어서 말했다. “도훈 형, 이 일만 도와주면, 나도 형이 원하는 걸 줄게—인천항 지분.”
복도엔 길고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삼개월.”
결국 박도훈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고, 조금 쉬었다. “이 구역질 나는 게임, 석 달만 같이 놀아주지. 석 달 뒤에, 네가 가진 인천항 유통 지분 15%, 무조건 내 명의로 넘겨.”
박태민은 한 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받아쳤다. “딜.”
좋아. 아주 좋아.
김지수는 병상에 누운 채, 둘의 대화를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들었다.
허무맹랑한 ‘남자친구 대행’이라는 설정 뒤에, 이렇게 더러운 이해관계가 숨어 있었다.
자기 재미 보려고, 그녀의 재산을 매끈하게 훔치려고, 박태민은 인천항 지분까지 미끼로 내걸었다.
그리고 박도훈—몇 번 마주친 적도 없는, 심지어 ‘지수를 싫어한다’는 소문까지 도는 이복형—역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녀를 모욕하는 거래를 서슴없이 받아들였다.
박 씨 집안 남자들, 하나같이 똑같네.
김지수는 천천히 눈을 감고, 눈동자에 맺힌 냉기와 증오를 말끔히 덮었다. 다시 떴을 때, 예쁜 눈에는 오직 당황과 허망함만 남아 있었다.
박태민은 원하는 답을 얻자, 문을 밀치고 병실로 들어왔다.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타이밍에 맞춰, 김지수는 ‘깨어나는’ 신음을 낮게 흘리며, 더뎌진 눈꺼풀을 올렸다.
박태민은 급히 병상으로 다가와, 그녀가 한때 사랑했던 그 지극한 ‘걱정’의 표정을 얼굴에 걸었다. “지수야! 다행이다, 드디어 깼네!”
김지수는 일부러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목소리는 힘없이 떨렸다. “여… 여긴 어디죠? 무슨 일이 있었어요?”
“지수야, 네가 큰 교통사고를 당했어.” 박태민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눈에는 ‘걱정’이 그득했다. 더 친근한 호칭을 힘줘 붙였다. “나 기억나? 나 태민이야.”
김지수는 그를 몇 초간 똑바로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의아함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태민…? 저… 제가 당신을 알아야 하나요?”
박태민의 표정이 단숨에 요란해졌다—충격, 쾌감, 죄책감, 흥분이 몇 초 사이에 번갈아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