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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상실 후, 약혼자의 형과 계약 연애

기억 상실 후, 약혼자의 형과 계약 연애

Lilignis

Last update: 1970-01-01

제1화

  • 서울 강남구, 성심병원 VIP 병동 15층.
  • 통유리창 밖으로는 한강 물빛이 굽이치며 반짝였고, 병실 안은 소독약과 고급 아로마가 뒤섞인 냄새로 가득했다.
  • 김지수는 푹신한 의료용 매트리스에 누워 있었다. 눈꺼풀이 납덩어리처럼 무겁다. 콧속을 파고드는 소독약에 좀약 같은 싸한 기운이 점막을 톡톡 찔렀다. 눈을 감고 있어도 어딘지 확실히 알 수 있을 만큼 강했다.
  • 귓가에는 심전도 모니터의 규칙적인 ‘삐, 삐’ 소리. 그 사이로 남자 둘의 발소리가 또렷이 섞여 들어왔다. 병실 원목문 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지고 있었다.
  • “지수는 도대체 언제 깨어나, 도훈 형?”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김지수의 속눈썹이 아주 살짝 떨렸다.
  • 박태민—그녀의 약혼자이자 박씨 그룹 부사장. 어머니가 현 회장 부인이라는 빽 믿고, 실력도 없으면서 그룹에서 술술 올라간 인간. 목소리를 일부러 낮췄지만, 문틈을 뚫고 또렷하게 들려왔다.
  • “의사 말로는, 언제든 가능하대.” 더 낮고 굵은 남자 목소리가 뒤따랐다.
  • 낯선 듯 익숙한 소리.
  • 김지수는 번개처럼 생각을 굴렸다가 곧바로 떠올렸다—박도훈. 태민과는 남보다 못한 이복형, 박씨집안의 장남이자 박씨 그룹 전무이사.
  • “도훈 형, 지수가 진짜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거 맞지?” 박태민의 말투에는, 김지수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가벼움과 장난기가 배어 있었다. 입으로는 ‘형’이라 부르면서도 존중은 1도 없고, 자리 믿고 잘난 척하는 오만만 잔뜩이었다.
  • “단기 기억상실. 뇌진탕 후유증이라서 며칠 만에 돌아올 수도, 몇 달 걸릴 수도 있대.”
  • 박도훈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상대의 싸가지 없는 톤 따윈 신경도 안 쓰는 듯.
  • 김지수는 살짝 눈을 틔웠다.
  • 문가에 남자 둘이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박태민의 짙은 밤색 머리카락이 조명 아래서 은근하게 빛났고, 그 옆의 박도훈은 키가 크고 곧은 체격에 맞춘 수트가 어깨선을 날카롭게 살렸다. 거의 문틀을 다 가릴 만큼 존재감이 컸다.
  • “완벽하네.” 박태민이 가볍게 웃더니, 갑자기 말투를 바꾸며 일부러 공손한 척했다. “그런데 말이야, 도훈 형. 부탁 하나 있는데.”
  • “말해.” 박도훈이 차갑게 받았다.
  • “지수가 기억을 잃었으니… 우리, 서로 사이를 새로 정리해보는 거 어때?” 박태민이 말끝을 길게 늘이며 떠봤다.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박도훈의 평온한 톤에 처음으로 미세한 파문이 스쳤다.
  • “형, 진정하고. 내 말 좀 끝까지 들어봐.” 박태민이 일부러 목소리를 더 낮췄다. ‘형’이라는 단어를 유독 힘줘 부르며 혈연 뒤에 숨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 김지수는 귀를 더 가까이 대보려 했지만, 뒤이은 소리는 여전히 잘 들리지 않았다. 초조함이 목 끝까지 차올랐을 때, 박도훈의 목소리가 확 차갑게 바뀌어 다시 들려왔다.
  • “나더러, 그녀 남자친구인 척 하라고?” 못마땅함과 어이가 한가득 실린 톤이었다.
  • “의사가 그러잖아. 지수 지금 아무것도 기억 못 한다고.” 박태민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도훈 형, 잠깐만 남친 역할 좀 해 주면 안돼? 어차피 연기, 우리 집안에서 형이 제일 잘하잖아?”
  • “그리고 나는 세리랑, 커플로 당당하게 지수 앞에 나타날 거고.” 그의 목소리엔 병적으로 뒤틀린 쾌감이 묻어났다.
  • “세리가 누군데?” 박도훈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의아함이 스쳤다.
  • “지수 절친 말야. 형 기억 안 나? 젊은 변호사. 지난 5년 동안, 그 애가 줄곧 내 침대에서 잤다고.” 박태민의 웃음은 귀를 긁는 듯 역겨웠다. 무딘 칼이 되어 문 안쪽의 김지수를 그대로 찔러 넣는 느낌.
  • 김지수의 손끝이 번쩍 움찔하더니, 손바닥 살을 깊게 파고들었다. 날카로운 통증이 번졌지만, 가슴 한가운데 끓어오르는 고통엔 백분의 일도 못 미쳤다.
  • 강세리… 대학 때부터 그녀 곁을 떠나지 않던 그 절친. 부모가 남긴 재산을 전적으로 맡긴 신탁 변호사. 둘이 이미 오래전부터 한통속이었다니… 그것도, 무려 5년이나?
  • “미쳤냐, 박태민?” 박도훈의 목소리에는 알아차리기 힘든 분노가 얇게 섞였다. 경고처럼 또박또박 그의 본명을 불렀다.
  • “도훈 형, 이거 엄청 재미있지 않아?” 박태민의 들뜸은 점점 가팔라졌다. “지수가 기억을 되찾는 그날, 자기 절친이랑 약혼남이 오래전부터 꽁냥거렸다는 걸 알게 되고, 정작 본인은—내 이복형한테 마음까지 주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거지. 후. 손만 잡아도 빨개지던 그 순진녀, 그때 표정이 얼마나 볼만하겠어.”
  • “태민아, 너 진짜 변태다.” 박도훈의 목소리는 다시 평평해졌다. “근데 왜 하필 나냐?”
  • “형은 지수 싫어하잖아, 안 그래? 본가에서 식사 때 지수만 나타나면 항상 얼음장 얼굴에, 눈길 한 번도 안 주고. 난 믿어. 형은 내가 거른 여잔 절대 안 건드릴 거라고.” 박태민은 자기 이기심과 오만을 숨기지도 않았다—그의 눈에 김지수는 마음대로 버려도 되는 물건에 불과했다.
  • 김지수의 심장이 보이지 않는 손에 거칠게 움켜잡힌 듯, 숨쉬기조차 힘들어졌다.
  • 5년.
  • 그녀는 박태민과 5년을 사귀고, 2년 전에 약혼했다. 정석대로라면 반 년 뒤면 결혼식이었다.
  • 그런데 그는 그녀가 교통사고로 ‘기억상실’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지루해진 장난감 던지듯 지수를 형에게 내던졌다. 정작 본인은, 그녀의 절친과 관계를 당당히 공개하겠다고?
  • 그리고 그 모든 목적이, 고작 그녀의 고통과 절망으로 짜인 ‘재미있는 쇼’를 보기 위해서였다니?
  • 더 웃긴 건—
  • 그녀, 기억 안 잃었다.
  • 사고 순간 잠깐 기절했을 뿐, 다시 눈을 뜬 뒤의 기억은 전부 멀쩡했다.
  • 그녀는 그저… 한심한 기대 하나 품었을 뿐이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 못 한다면, 박태민이 혹시라도 다시 진심을 내어줄까 싶어서.
  • 하지만 그가 내민 건, 가차없는 배신뿐. 그녀의 자존을 신나게 짓밟아 산산이 부쉈다.
  • 그때, 박도훈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비웃음이 옅게 섞여 있었다. “진짜 이렇게 할 거야? 나중에 진실 알면, 지수 완전 무너질 수도 있어.”
  • “그래서 뭐?” 박태민은 코웃음을 쳤다. “지수는 나 못 떠나. 기억 돌아와도, 내가 장난친 줄로만 알 걸. 그때 가서 명품 몇 개 사주고 달래면, 결국 얌전히 돌아오겠지 뭐.”
  • 김지수의 손톱이 손바닥 살을 거의 뚫었다.
  • 그의 눈에, 그녀는 이렇게 싸구려였구나.
  • 지금 당장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나, 박태민의 추한 민낯을 들춰내고 싶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의 목소리가 또다시 꽂혔다—
  • “아, 그리고. 도훈 형. 설마 내가 지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는 건 아니지? 그 애가 얼마나 재미없는지 알아? 나 아직 그 몸에 손도 안 댔다고.”
  • 김지수의 몸이 굳어버렸다.
  • 지난 5년 동안, 박태민은 늘 다정했지만, 마지막 선은 지켰다. 입맞춤도 드물었고, 더 깊은 스킨십은 더더욱 없었다.
  • 그는 늘 말했다. “지수야, 이런 건 우리 결혼하고 하자. 제일 좋은 건 다 신혼 첫날밤에 남겨둘 거야.”
  • 그녀는 그 말이 배려와 존중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 그러나 그녀는 몰랐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그녀의 조심성과 보수성이 그저 거슬렸다는 걸.
  • 모든 게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절친 강세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와 얽혀 있었다.
  • “내가 그녀와 약혼한 건, 다 그 애가 쥔 돈 때문이야.” 박태민의 목소리엔 더 이상 가면이 없었다.
  • 김지수의 숨이 딱, 멈췄다.
  • 그 돈?
  • 부모가 물려준, 니치하지만 잠재력 있는 란제리 브랜드 ‘가시새’ 때문? 아니면 막대한 가문 유산?
  • “됐고, 도훈 형. 거래는 간단해.” 박태민의 톤이 다시 가벼워졌다. 마치 평범한 비즈니스 얘기라도 하는 듯.
  • “형은 지수 남자친구 역할만 해. 의심 못 하게. 내가 세리랑 같이 그 애 명의 자산 전부 옮기고 나면, 지수한테 보상금 좀 쥐여주고, 모든 걸 밝힐 거야. 그때 가서, 깔끔하게 약혼을 정리할 거야.”
  • 강세리는 그녀의 신탁 변호사. 그녀 명의의 와이너리, 신탁 펀드, 보석 컬렉션… 모든 게 강세리 손을 거쳐 관리되고 있다.
  • 그렇다면, 둘은 이미 오래전에 손을 잡은 건가? 내 명의의 자산들, 벌써 손댄 건 아닐까?
  • 박태민이 이어서 말했다. “도훈 형, 이 일만 도와주면, 나도 형이 원하는 걸 줄게—인천항 지분.”
  • 복도엔 길고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 “삼개월.”
  • 결국 박도훈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고, 조금 쉬었다. “이 구역질 나는 게임, 석 달만 같이 놀아주지. 석 달 뒤에, 네가 가진 인천항 유통 지분 15%, 무조건 내 명의로 넘겨.”
  • 박태민은 한 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받아쳤다. “딜.”
  • 좋아. 아주 좋아.
  • 김지수는 병상에 누운 채, 둘의 대화를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들었다.
  • 허무맹랑한 ‘남자친구 대행’이라는 설정 뒤에, 이렇게 더러운 이해관계가 숨어 있었다.
  • 자기 재미 보려고, 그녀의 재산을 매끈하게 훔치려고, 박태민은 인천항 지분까지 미끼로 내걸었다.
  • 그리고 박도훈—몇 번 마주친 적도 없는, 심지어 ‘지수를 싫어한다’는 소문까지 도는 이복형—역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녀를 모욕하는 거래를 서슴없이 받아들였다.
  • 박 씨 집안 남자들, 하나같이 똑같네.
  • 김지수는 천천히 눈을 감고, 눈동자에 맺힌 냉기와 증오를 말끔히 덮었다. 다시 떴을 때, 예쁜 눈에는 오직 당황과 허망함만 남아 있었다.
  • 박태민은 원하는 답을 얻자, 문을 밀치고 병실로 들어왔다.
  •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타이밍에 맞춰, 김지수는 ‘깨어나는’ 신음을 낮게 흘리며, 더뎌진 눈꺼풀을 올렸다.
  • 박태민은 급히 병상으로 다가와, 그녀가 한때 사랑했던 그 지극한 ‘걱정’의 표정을 얼굴에 걸었다. “지수야! 다행이다, 드디어 깼네!”
  • 김지수는 일부러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목소리는 힘없이 떨렸다. “여… 여긴 어디죠? 무슨 일이 있었어요?”
  • “지수야, 네가 큰 교통사고를 당했어.” 박태민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눈에는 ‘걱정’이 그득했다. 더 친근한 호칭을 힘줘 붙였다. “나 기억나? 나 태민이야.”
  • 김지수는 그를 몇 초간 똑바로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의아함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태민…? 저… 제가 당신을 알아야 하나요?”
  • 박태민의 표정이 단숨에 요란해졌다—충격, 쾌감, 죄책감, 흥분이 몇 초 사이에 번갈아 스쳤다.
  • 그는 곧장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도훈 형! 빨리 들어와! 지수가 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