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14화 박 기장의 조울증

  • 비몽사몽 중에 안영은 왠지 온몸이 불편하고 내쉬는 숨이 뜨거운 것 같이 느껴졌다.
  • 그녀는 불안한 듯 뒤척이다 서서히 눈을 뜨자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칠흑 같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 그녀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는 이마를 매만졌다.
  • “몇 시야?”
  • “새벽 네시.”
  • “당신은 왜 안 자?”
  • 그녀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박환희를 바라보았다.
  • “이왕 일어난 김에 약 먹자.”
  • 남자는 침대에서 내려 물을 한 잔 따라왔다. 이어 그녀의 손에 약 한 봉지를 뜯어주었다.
  • “약?”
  • 안영은 멍 해져서는 자신의 손안에 있는 약을 쳐다봤다.
  • 그녀는 아팠을 때 약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 그에 박환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 “당신 설마 당신이 열이 났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지? 이럴 줄 알았으면 당신을 데려오지 말 걸, 괜히 열이 나게 해서.”
  • “어쩐지 몸이 좀 불편하더라.”
  • 안영은 비록 약을 싫어했지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박환희 덕에 그래도 약을 먹었다.
  • 약을 먹은 후 그녀는 박환희의 가슴 팍에 비비적대며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 “고마워, 여보.”
  • 분명히 자신이 아픈 것을 발견한 박환희가 의사를 부른 거겠지?
  • 결혼 4년, 사실 이 남자는 괜찮은 남자였다. 남편이 해야 할 의무에 그는 최선을 다했다.
  • 그저, 그와 그녀 사이에는 사랑이 없었을 뿐이었다.
  • 그 목소리에 담긴 애교 어린 말투에 박환희는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 “또 유혹하는 거야?”
  • 안영은 간드러지게 웃었다.
  • “한숨 자고 일어나니까 정신이 좀 멀쩡해진 것 같아… 체력도 많이 회복된 것 같고.”
  • “아프면서 얌전하지 못하게.”
  • 남자가 그녀의 머리를 토닥였다.
  • “진짜 싫어?”
  • 안영은 유혹을 담은 눈빛으로 박환희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커플룸이 분명한 이 방을 둘러보았다. 인테리어가 낭만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해 주었다.
  • “그러기엔 방이 좀 많이 아까운데.”
  • 이런 유혹을 뿌리칠 만한 박환희가 아니었다. 잔뜩 성이 난 눈동자는 야성미가 흘러넘쳤다.
  • “당신이 자초한 거야.”
  • 안영은 이튿날 점심쯤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떴다.
  • 박환희는 정교하게 잘 포장된 상자를 그녀의 앞으로 내밀었다.
  • “이따가 이거 입어.”
  • “가져온 짐 중에 옷도 있어.”
  • 안영은 눈을 껌뻑 거렸다. 이 남자가 왜 이렇게까지 다정해졌지? 자신을 위해 두꺼운 옷도 준비해 주고?
  • “밖에 비 와.”
  • 남자의 말투에는 묘한 강요가 느껴졌다.
  • 안영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아내로서 당연히 남편의 지시에 잘 따라야지.
  • 상자를 연 그녀의 앞에는 샤넬의 이번 시즌 신상 외투가 있었다.
  • 그와 함께 긴 바지 하나도 같이 매치되어 있었다.
  • 깨끗하게 잘 씻고 옷을 갈아입은 그녀는 창가로 다가가 밖을 바라보니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 “나가서 놀지도 못하다니, 아쉽다.”
  • “열 내린 지 얼마 안 됐잖아. 근처 쇼핑몰은 돌아다닐 수 있어. 외부 활동이라면 마음 접어.”
  • 박환희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담담히 얘기했다.
  • 안영은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고 빗방울은 그녀의 손에 하나 둘 떨어졌는데 차가웠다.
  • “여보, 봐봐. 하늘도 우리가 이혼할 걸 알고 있나 봐. 우리의 유일한 여행도 완벽할 수 없다니.”
  • 어떤 일은 아쉬움이 남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 박환희는 처음으로 짜증이 담긴 어조로 안영에게 말을 했다.
  • “그놈의 이혼 소리 좀 입에 달고 있지 않으면 안 돼?”
  • 안영은 창문을 닫고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 “이혼은 당신이 먼저 꺼냈어.”
  • “돌아가면 바로 사인할 거야.”
  • 말을 마친 박환희는 곧바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 안영은 그 뒷모습에 눈이 뒤집혔다. 무슨 뜻이지? 뭐 이혼하기 싫다는 소리인가?
  • 박환희는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깊게 빨아들였다. 천천히 연기를 뱉어내며 그는 조급한 마음을 천천히 달래 진정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