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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관계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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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곰돌이

Last update: 2024-03-07

제1화 다시는 널 보고 싶지 않아

  • 천둥번개가 치는 날, 예원.
  • 2층 서재 안, 라이터의 불빛이 켜졌다가 꺼졌다.
  • 예정한은 차가운 눈빛으로 프로젝터가 벽에 투사한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 그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뒤엉켜있는 장면이었다. 남자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가 되었지만, 여자의 얼굴은 낯익었다.
  • 그 여자는 예정한의 아내인 황성 제일 미녀 윤슬이었다.
  • 그가 불바다에 갇혀 자칫 목숨을 잃을 뻔한 그날, 말끝마다 사랑한다고 말하며 그가 아니면 안 된다던 여자는 오히려 그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랑……
  • 이때, 불현듯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문밖에서 누군가가 예의를 갖춰 말했다.
  • “둘째 도련님, 저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윤슬 아가씨가 갑자기 조산을 하게 되어 곧 아이를 낳는다고 합니다.”
  • 남자는 매서운 눈매를 찡그리며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 병실에서는 출산으로 인한 여자의 처절한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 “예정한을 불러줘, 예정한을 만나야겠어.”
  •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병상 옆에 서서 빈정거렸다.
  • “윤슬, 우리 예쁜 사촌 동생아, 넌 설마 너 때문에 어머니가 식물인간이 되고, 우리 언니는 죽고, 난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 되어버려서 정한이가 너를 지금 죽도록 미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거야? 정한이는 오직 나만 사랑하고 있어, 어젯밤 우리는……”
  • 그녀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분만대 위의 윤슬에게 옷깃을 잡혔다.
  • 윤슬의 얼굴은 비록 창백했지만, 그 눈부신 미모는 여전히 감출 수 없었다.
  • “너……염치가 없네.”
  • “내가 염치가 없더라도 그 사람 몰래 다른 남자랑 그런 더러운 짓을 하는 너보다는 낫지.”
  • 윤슬은 이를 악물었다.
  • “그런 적 없어.”
  • “아, 참. 넌 그런 적 없지.”
  • 정율은 그녀의 귓전에 대고, 두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 “난 널 믿어. 하지만 정한이는 널 믿지 않고 나만 믿네?”
  • 그 말은 순식간에 윤슬의 아픈 곳을 찔렀다.
  • 그래, 예정한은 그녀를 믿지 않는다. 예정한은……그녀를 믿지 않는다.
  • 그녀는 미친 듯이 온 힘을 다해 정율을 밀어버렸다.
  • 원래 정율은 중심을 잡고 서 있을 수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때 문 앞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 정율은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 이윽고 병실 문이 열리고 기다란 실루엣이 빠른 걸음으로 정율 곁으로 다가와 정율을 부축하더니 매서운 시선으로 윤슬을 노려봤다.
  • 그녀의 창백한 안색과 땀에 젖어 산발이 된 머리를 보는 순간 예정한은 괜히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 그러나 곧 옆에 있던 정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정한아, 내 사촌 동생을 탓하지 마. 일부러 그런 거 아니니까. 얘가 출산 때문에 너무 아파서 나를 밀었던 거야. 난 우리 동생 탓하지 않아. 이 정도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이가 순조롭게 태어날 수만 있다면 난 아무 상관없어.”
  • 완벽한 조각상 같은 예정한의 얼굴에는 지금 이 순간, 무척이나 사악한 표정이 걸려있었다.
  • “건방지군. 아이를 낳을 때조차 제멋대로 날뛰다니.”
  • 예정한의 표정을 본 윤슬은 가슴이 움츠러들 정도로 아팠다.
  • 그녀가 어렸을 때 모든 사람 앞에서 시집가겠다고 선언했던 남자 아닌가.
  • “예정한, 난 너랑 이혼할 거야. 이 아이는……”
  • 이혼이라는 두 글자를 듣고, 예정한은 앞으로 나서서 윤슬의 목덜미를 졸라매며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너처럼 이렇게 악랄하고 천한 여자를 내가 원할 것 같아? 입 닥치고 조용히 아이나 낳고, 아이는 정율에게 맡겨. 그리고 넌 내 인생에서 꺼져, 나는 평생 너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으니까.”
  • 말을 마친 그는 혐오스럽게 윤슬의 팔을 뿌리치고 돌아서서 성큼성큼 떠났다.
  • 정율은 고개를 돌려 승자의 자세로 윤슬을 흘겨보고 예정한을 따라 나갔다.
  • 악랄.
  • 평생을 사랑하면서 얻은 것이라곤 ‘악랄’이라는 두 글자뿐이었다.
  • 윤슬은 마치 수라지옥에 떨어진 것만 같았다.
  • 출산 과정은 꼬박 7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 그러나 그 후 그녀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 잇몸에서 피가 날 정도로 이를 꽉 깨물어도 절대 밖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비웃지 못하도록 참고 또 참았다.
  • 아이가 나오는 순간, 윤슬은 힘이 다 빠져 기절했다.
  • 다시 깨어났을 때 밖은 이미 어두웠다.
  • 윤슬은 병실에서 사람들이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
  • “개 네 마리를 끌고 왔다면서요.”
  • “그렇게 어린아이를 개한테 먹이다니……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 윤슬은 갑자기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다 쉰 목소리로 말했다.
  •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 간호사 중 한 명이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 윤슬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 “무슨 애를 개한테 먹인다는 거예요? 여기 정신병원인데 웬 애예요?”
  • 그랬다, 그녀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된 날부터 예정한은 사람을 보내 그녀를 정신병원에 가두었던 것이다.
  • 꼬박 8개월 동안이나.
  • “웬 애겠어요, 당신 애지. 당신이 죽은 아이를 낳아서 정율 아가씨가 가져가서 개에게 먹였어요.”
  • 윤슬은 듣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 그녀는 이불을 걷어 올리고 침대에서 내려와 지친 몸을 이끌고 벽을 짚으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 병원 후문으로 가자 그녀는 그곳에 서 있는 정율과 남자 도우미 몇 명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 그리고 마당에서는 개 몇 마리가 미친 듯이 짖어댔다.
  • “정율, 무슨 짓을 한 거야, 내 아이는?”
  • 정율은 윤슬의 목소리를 듣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 “내 예쁜 사촌 동생아, 넌 정말 지지리도 복이 없구나. 이렇게 오랫동안 임신했는데 죽은 애나 낳고 말이야. 정한이가 글쎄 거북하고 불길하다며 네 딸의 시체를 개에게 먹이라네?”
  •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불빛을 빌려 개 두 마리의 입가에 핏자국이 묻어있는 것을 보게 됐다.
  • 윤슬은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 그녀는 처절한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 “안돼, 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