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한의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자, 정율은 앞으로 나서며, 조금 처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슬아, 정한은 비록 입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나는 정한이 항상 너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그런데 너는 어떻게 정한에게 복수하려고 정한의 사촌 형과 이런 짓을 할 수 있어? 너 이러는 거 근친……근친……”
윤슬은 상처의 아픔을 참으며 호통을 쳤다.
“넌 입 닥쳐. 함부로 사실을 왜곡하지 마. 방금은 서보형이……”
서보형은 앞으로 나서서 윤슬의 말을 끊고, 그녀의 얼굴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윤슬, 너 나한테 누명 씌우지 마. 난 네 몸에 상처가 있는 걸 보고 분명히 거절했어. 하지만 네가 나한테 정한이 정율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니, 죽더라도 나랑 만날 거라고 했잖아. 정한이 힘들 수 있도록. 정한아, 내 말을 믿어줘. 얘가 먼저 적극적이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감히 네 여자를 건드릴 수 있었겠어? 난 그럴 용기가 없어.”
예정한은 차갑게 대꾸했다.
“나를 힘들게 한다고? 허, 그럴 자격이 없어.”
해명을 하려던 윤슬은 마음이 순간적으로 얼어붙는 듯했다.
온몸이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아픔도 그 말 한마디에 미치지 못했다.
정율은 몸을 돌려 예정한의 손목을 잡고 연약한 얼굴로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정한아, 그런 말 하지마. 슬이도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야, 다 내 탓이야. 내가 없었다면 슬이가 이렇게 너한테 화내지 않았을 거야, 내 잘못이야. 그러니까 정한아, 제발 부탁할게. 슬이를 원망하지 말아줘.”
윤슬은 이 ‘명배우’들의 열연을 정말 참을 만큼 참았다. 그녀는 이를 갈며 말했다.
“정율, 네 가식따위 필요 없으니까 당장 꺼져.”
예정한은 자연스럽게 정율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윤슬을 사납게 흘겨보았다.
“가식으로 따지면 어디 너만하겠어? 말과 행동이 겉 다르고 속 다르니 괘씸하기 짝이 없어.”
윤슬은 눈을 감았다. 얼마나 우스운가, 그녀는 그렇게 열심히 그와의 관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결국 그 노력의 대가가 무엇인가?
참 아이러니하네.
정율은 예정한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정한아, 나는 어렸을 때부터 슬이와 함께 자랐으니까 나는 슬이를 이해해. 슬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너와 슬이 사이에는 분명 무슨 오해가 있는 거야.”
그녀는 예정한 품에서 떠나 다급하게 윤슬 앞으로 왔다.
“슬아, 넌 항상 억울하다고 하지 않았어? 요 며칠 아주머니가 깨어나실 기미가 보이니, 아주머니가 깨어나서 그 당시 교통사고의 진상을 밝히기만 하면 이모는 혐의를 벗을 수 있을 거야. 그때가 되면 너와 정한도 다시 사이가 좋아질 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난 너한테서 정한이를 빼앗지 않을 거야. 난 그냥 너희가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야.”
윤슬은 조금 뜻밖이었다. 시어머니가 깨어나신다고?
한편, 곁에 있던 서보형이 빈정거렸다.
“봐봐, 다 똑같은 여자인데. 저기요 윤슬 아가씨, 사촌 언니한테 좀 배워. 네가 이렇게 악독하니 내가 다 정한이를 불쌍하게 여길 지경이야. 정한아, 이런 여자는 차라리……”
예정한은 차가운 눈빛으로 서보형을 쏘아봤다.
서보형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급히 말을 바꾸었다.
“난 그냥 네 편을 들려고.”
설령 자신이 윤슬과 원한이 있다 하더라도, 예정한은 서보형 같은 사람과 한패가 되는 건 극도로 싫었다.
“꺼져.”
예정한의 싸늘하고 섬뜩한 눈빛을 본 서보형은 말도 끝내지 못하고 흠칫 놀라 재빨리 몸을 굽혀 자신이 바닥에 떨어뜨린 옷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정말 재수가 없네, 고기는 먹지 못하고 온몸에 비린내만 배다니.
정율이 입을 열었다.
“정한아, 내가 따로 슬이랑 몇 마디 해도 될까? 나는 슬이를 좀 설득하고 싶어.”
“아니, 필요없어. 앞으로 이 여자의 생사는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했잖아.”
그는 말을 마치고 윤슬을 흘겨보고는 정율을 껴안고 밖으로 나갔다.
윤슬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엄마, 엄마의 죽음이 헛되게 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반드시 엄마의 누명을 벗길게요.
며칠 동안 예정한은 윤슬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정율이 종종 지금처럼 그녀를 자극하러 왔다.
그녀는 자신의 욕설이 더 이상 윤슬에게 아무런 작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율은 윤슬이 예정한에게 이미 체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녀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윤슬이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여긴 아직 지옥이 아니었다.
“아 참, 알려줄 게 있는데, 방금 오면서 아주머니가 깨어났다는 연락을 받았어.”
윤슬의 잔잔했던 눈빛이 살짝 일렁였다.
그 모습을 캐치한 정율은 못마땅하게 웃었다.
“너의 그 지긋지긋한 얼굴에 드디어 표정이 생겼네. 아줌마가 깨어나면 정말 너한테 도움이 되나 보네? 허, 근데 내가 네 소원을 들어줄 것 같아?”
윤슬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고개를 들었다.
“정율, 또 뭐 하려고?”
“난 너를 지옥으로 밀어넣을 거야. 그러니 당연히 너에게 유리한 사람이 영원히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는 거지.”
정율은 손목을 들어 시간을 보았다.
“정한이 소식을 듣고 회사에서 오고 있으니까, 너랑 쓸데없는 말 할 시간이 없어. 나는 정한이 돌아오기 전에 너의 희망을 완전히 망쳐야 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