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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마음만 주십시오

  • 허명섭이 다급한 마음에 해명을 하려 했지만 도진은 어느새 한 발 앞서 VIP병실의 테이블 위에 산해진미를 가득 차려놓았다.
  • “자자, 식사들 하시지요.”
  • 허명섭과 유옥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 몇 년동안 찰거머리처럼 자신들 옆에 달라붙어 숨통을 조여오던 문제들이 도진이 짠 하고 나타나면서 한 방에 해결된 것 같았다. 그야말로 십년 묵은 체증이 시원하게 내려가는 느낌.
  • 약간 어리버리 해보이는 도진이지만 시원시원하고 털털한 면이 마음에 와 닿았으며 심지어 귀엽게 보이기까지 했다.
  • 갑작스런 상황에 어리둥절한 건 허지윤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윤은 알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하고 도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 어느덧 밤이 깊어갔고 허명섭이 다리가 불편한 관계로 유옥분은 늘 곁에서 수발을 들어야했다.
  • 그래서 이 날 유옥분은 동생인 허준호한테 남아서 누나의 시중을 들라고 분부를 했고 준호도 그녀의 말을 따르려 했지만 도진이 빛의 속도로 달려와 준호를 확 밀어냈다.
  • 그동안 지윤의 병 간호는 늘 도진의 담당이었다.
  • 다만 지윤은 여태 혼수상태로 있은 관계로 전혀 눈치를 못 챘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그녀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지윤은 어둠이 내린 암흑한 공간에서 조용히 누워있었고 도진은 그녀의 침대에서 얼마 안 떨어진 작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 두 사람은 서로 몇 미터의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코 앞의 물건도 안 보이는 새까만 병실안에서, 어둠으로 인해 둘 사이는 각별히 가까운 것처럼 느껴졌다.
  • “고마워요.”
  • 아무것도 안 보이는 칠흙같이 어두운 병실안에 외간 남자랑 단 둘이 있다는 다소 무서운 상황이었지만 지윤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고 오히려 먼저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 역시 어릴 때나 지금이나 착하고 예의바른 성품은 여전한 지윤이다.
  • 그녀는 늘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천사같은 여인이었다.
  • “그래도 그 쪽한테 사과는 해야겠어요.”
  • “사실 저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 “그게 누굽니까?”
  • 고요한 어둠을 뚫고 들려오는 도진의 굵직한 중저음이 유독 매력적이다.
  • 도진의 질문에 지윤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고 연분홍 빛이 맴도는 체리같은 입술을 낼름거리기만 했다.
  • 지금껏 지윤은 늘 그랬듯이, 한 시도 변함없이 어릴 적 그 남자애를 기다리고 있다.
  • 지윤을 아내로 맞이하겠다던 남자, 언젠간 꼭 돌아올 거라는 약속.
  • 그 남자의 이름은 이도진이다.
  • 지금의 도진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싶지만 지금 눈 앞에 있는 이 남자도 이름이 이도진이니 말을 꺼냈다간 괜한 오해만 불러일으킬 것 같아서 지윤은 심한 내적 갈등에 휩싸였다.
  • 반면, 지윤이 볼 수 없는 저 편에서 도진은 침대에 반듯이 누운 채 어느새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고 하얗고 가쯘한 치아까지 드러났다.
  • “걱정 마십시오, 지윤 씨 허락없인 절대 지윤 씨 몸에 손 대는 일 없을 겁니다.”
  • “전 의사입니다.”
  • “제가 원하는 건 지윤 씨가 아니라”
  • “지윤씨의 마음입니다.”
  • “전 끝까지 지윤 씨를 책임질 겁니다.”
  • 차분하게 말을 마친 도진은 머리를 감싸고 몸을 돌려 누웠다.
  • 그러고는 어둠속에서 오직 손 감각으로만 쇠로 된 박스를 꺼내 초콜릿 하나를 몰래 먹었다.
  • 방금 전 지윤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고 생각할 수록 기쁘고 뿌듯한 도진은 순박한 아이처럼 발을 요리조리 흔들며 온 몸으로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 다음날 아침, 허준호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휘청거리며 병실에 찾아왔다.
  • “아버지랑 엄마는요?”
  • 지윤의 상태는 무척 빨리 회복이 되었고 이제 스스로 걸을 수 있는 정도까지 되었다.
  • 준호가 눈알을 요리조리 굴리더니 깨방정한 표정으로 지윤에게 말했다.
  • “누나, 그거 알아?”
  • “우리 회사 당장 망하게 생겼어.”
  • “누나 수술비 대려고 아버지가 차를 팔았다잖아.”
  • “우리 지금 단체로 버스타고 여기 온 거야.”
  • 허지윤은 괴로운듯 입술을 질끈 깨물었고 뭔가 크게 다짐한 눈빛이었다.
  • “걱정마, 우린 반드시 이겨낼 수 있어.”
  • “나 이제 곧 퇴원이잖아, 퇴원하는대로 천일 그룹 류 사장님 만나러 갈 거야.”
  • “천일 그룹이랑 우리 회사 프로젝트 얘기가 거의 끝나가고 있어서 계약만 체결하면 우린 기사회생할 수 있을거야!”
  • 지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웬 전화벨 소리가 고요한 병실 밖의 적막을 깨버렸다.
  • 그리고 몇 초 뒤에 지윤은 화가 나서 펄쩍 뛰는 허명섭의 목소리를 들었다.
  • “사람을 아주 벌레취급하는 구먼!”
  • “최해봉 그 자식, 칼만 안 들었지 지금 나더러 죽으라는 거잖아!?”
  • 아주 익숙하지만 치가 떨리게 싫은 그 이름!
  • 최해봉 이름을 듣자 지윤의 여성미 넘치는 아치형 눈썹이 질끈거리며 그녀는 괴로운 듯 미간을 심하게 찌푸렸다.
  • 최해봉, 태안 그룹의 사장이자 허명섭과는 물과 불처럼 서로 수용할 수 없는 사이, 말 그대로 앙숙이자 원수이다.
  • 두 집안의 싸움은 사실 그들의 할아버지 세대로부터 내려온 것이다.
  • 허씨 집안은 영주에서도 알아주는 명문 집안이었으나 어쩌다 최씨 집안의 눈밖에 나는 바람에 몇 십년 긴 세월동안 그들은 최씨 집안의 갖은 억압과 괴롭힘을 당해야만 했다.
  • 회사가 오늘 이 지경까지 몰락한데는 최해봉의 “공로”를 빼놓을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늘 야비한 수단으로 허씨네 회사를 궁지에 모는데 일조해왔으니 말이다.
  • 얼마 뒤 유옥분은 허명섭이 앉은 휠체어를 밀고 들어왔으며 허명섭은 세상을 다 잃은듯 허탈하고 실망감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 “아버지, 무슨 일 있어요?”
  • 허지윤은 걱정어린 말투로 다급히 물었다.
  • “또 최해봉 그 놈 짓이야!”
  • “천일 그룹의 프로젝트를 따내려고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데.”
  • “그러나 지윤이 네가 입원을 했을때 최해봉 그 자식은 이때다 싶어 프로젝트를 자기가 낚아챘지 뭐야, 비겁한 놈!”
  • 원통하고 분한 나머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허명섭, 화가 잔뜩 난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 그의 말을 듣고 있던 허지윤이 조급한 심정으로 말했다.
  • “안돼요, 그 프로젝트는 우리 회사의 희망인데! 저 당장 퇴원하겠습니다, 유 사장님 만나야겠어요.”
  • “아니, 그럴 필요없어.”
  • 지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병실 밖에서는 한 남자의 능글맞은 목소리가 밉상스럽게 들려왔다.
  • 명품 정장을 빼입고 머리는 소혀로 핥아놓은 듯 번지르르하게 빗어올린 젊은 남자가 지윤의 병실 안으로 걸어들어오고 있다. 그 불청객은 다름아닌 최천수.
  • “최천수, 당신 뭐야?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얼굴을 들이밀어?!”
  • 거들먹거리며 들어오는 최천수를 보자 허준호는 화가 잔뜩 나서 펄쩍 뛰었다!
  • 최해봉의 아들 최천수,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누나인 지윤을 졸졸 따라다니는 스토커같은 남자, 최천수의 지독한 구애에도 허지윤은 끄떡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눈엣 가시처럼 미워했다.
  • 그도 그럴것이 최천수의 뇌 구조엔 오직 스포츠카 그리고 여자로 꽉 차 있기 때문이다,
  • 최천수는 커다한 장미꽃 다발 하나를 안고 들어왔고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 “지윤아, 인생 최대의 난관을 돌파한 거 축하해.”
  • “자, 내 장미꽃 다발을 받아줘.”
  • 최천수는 밉상스런 표정으로 하나도 반갑지 않은 장미꽃 다발을 지윤한테 건넸고 지윤은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있었다.
  • “여기 널 반기는 사람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돌아가.”
  • 지윤의 냉랭한 반응을 보자 최천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들썩거리며 들고 있던 꽃다발을 바닥에 내팽겨쳤다.
  • “꽃이 마음에 안 드나보다, 그럼 버려.”
  • “사실 나 오늘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왔거든, 내일 아침에 나 천일 그룹이랑 계약하러 간다.”
  • “그 계약 무려 5억이나 되는 큰 프로젝트잖아, 완전 대박이지!”
  • “그 대단한 걸 바로 이 최천수 님께서 용케도 해내셨다 이거야.”
  • 허지윤은 최천수를 죽일듯이 노려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헤헤, 어때? 부럽지? 아주 배 아파 죽겠지?”
  • “배 아파도 소용없어.”
  • “어쩌겠냐? 우리 집이 너네 집보다 쪼끔 잘 사는 걸, 난 그저 너보다 돈 좀 잘 버는 아버지와 날 끔찍이도 아껴주시는 할머니가 있다는거, 그게 다야!”
  • “참, 유 사장님 배에 종양이 생겼더라고.”
  • “그걸 우리 아버지께서 경성에서 최고의 전문가이신 양 주임님을 모셔다가 직접 수술을 받게 해주셨잖아.”
  • “천하의 유 사장님도 이번에 양 주임님 아니었으면 못 살았을 걸? 돈이 많으면 뭐하냐?”
  • “천일 그룹은 우리 회사랑 전략적 협업 계약을 체결했어.”
  • “앞으로 천일 그룹 모든 프로젝트는 다 우리랑 협업하기로 했지롱!”
  • “너희는 우리랑 게임 자체가 안 돼, 레벨이 다르다고, 그러니까 찌그러져 있어!”
  • 세상을 다 잃은것처럼 허탈하고 넋이 나간 허씨네 가족들과는 정 반대로 세상을 다 가진듯 콧대가 하늘을 찌르며 기고만장한 태도로 일관하는 최천수, 익살스런 표정까지 지으며 약을 배로 올려준다.
  • “아 참, 너네 회사 이제 밑바닥까지 갔더라?”
  • “회사 건물 관리비 낼 돈도 없는것 같던데, 설상가상으로 직원들도 뿔뿔이 도망갔고.”
  • “이러다 문 닫는건 시간 문제겠는걸?”
  • 최천수의 말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허지윤, 그녀는 아버지인 허명섭을 쳐다보며 그의 해명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 그러나 허명섭은 해명 대신 고개를 푹 떨구고 아무말도 안 했으며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차 있었다.
  • 이미 바짝 타들어가는 허명섭의 마음에 기름이라도 끼얹을 기세로 최천수는 허명섭한테 다가가 낄낄대며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 “경고하는데, 당신네 식구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데도 없어요.”
  • “할 수 있는거라곤 딱 하나, 내 똘마니가 되어주는 것.”
  • “그래도 옛 정을 생각해서 전용 사무실 정도는 마련해줄테니까 너무 걱정 마시고요.”
  • “지윤이 넌 딱히 할 것도 없어, 그저 내가 원할때 두 다리를 바짝 벌려주는 거...”
  • 최천수의 선 넘는 말과 행동에 화가 단단히 난 지윤이 꺄악 소리를 지르며 쏘아붙였다.
  • “최천수, 그만해!”
  • “당장 나가, 안 나가면 나...”
  • “어라? 허지윤, 무섭게 왜 이러셔? 이러다 한 대 치겠다?”
  • 최천수는 더더욱 의기양양해서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약을 올렸다.
  • “자, 때려봐.”
  • “여기, 이 쪽으로 때려봐, 때려보라니까?”
  • 당장이라도 눈 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두 눈을 번쩍 뜨고 기괴한 표정까지 지으며 고개를 바짝 쳐 든 최천수, 눈빛에는 허지윤네 가족을 향한 경멸과 거만함이 가득차 있었다.
  • “영주 바닥에서 누가 감히 나한테 손을 대?!”
  • 천방지축, 안하무인! 그야말로 최천수 다운 언행이었다.
  • 찰싹!
  • 그러나 바로 그때, 기고만장한 최천수의 기세를 순식간에 꺾어버린 한 사람!
  • 찰진 소리와 함께 최천수는 갑작스레 들이닥친 누군가에 의해 뺨을 심하게 얻어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