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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아내 바라기

  • “네, 고객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즉시 처리해드리겠습니다!”
  • 직원은 블랙카드를 손에 쥐고 부랴부랴 카운터를 향해 잰 걸음으로 걸어갔다.
  • 조금 아까 불친절했던 딜러는 멍해진 채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 ‘이, 이거 사실이 아닌 거지?
  • 이건 불가능해!
  • 설마 내가 정말로 자동차 워셔액을 마셔야 되는 건 아니겠지?
  • 그럼 죽을 텐데!
  •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아!?’
  • 그때 신입 여직원은 이도진의 서명을 받기 위해 카드 영수증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 이도진이 정말로 벤츠를 결제하는 모습을 보자 허지윤은 황급히 그에게 물었다.
  •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난 거야?”
  • “이게 많은 거야?”
  • 이도진의 짤막한 대답은 옆에 있던 두 여직원을 기절시킬 뻔했다.
  • “1억 정도 밖에 안 되는 돈이잖아. 이건 라면 한 봉지 사는 거나 마찬가지지.”
  • “당신이 저 디자인이 마음에 들면 옆에 있는 여섯 가지 칼라 모두 사자. 하루에 하나씩 바꿔서 타면 되잖아.”
  • ‘갑부란 어떤 사람인가?
  • 아내 바라기란 무엇인가?
  • 보라!
  • 이것이 바로 그 좋은 예다!’
  • 허지윤의 강력한 제지로 인해 흰색 벤츠 “딱” 한 대밖에 살수 없었기 때문에 이도진은 매우 “유감스럽다”라고 느꼈다.
  • 원래 그는 허명섭, 유옥분, 허준호에게 각각 자동차 한 대씩 사주려고 생각했었다.
  • 그렇게 되면 출퇴근 때 그와 함께 차 안에 다닥다닥 붙어있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허지윤과 단둘만의 세상을 완벽하게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 안타깝게도 마누라의 절약정신은 지나치게 강했다.
  • 왜 흥청망청 돈을 쓸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거야?
  • 계산을 마치자마자 차에 올라타서 바로 시동을 걸었는데 출발하기 전에 허지윤은 구석에 세워두었던 스쿠터가 불현듯 떠올랐다.
  • “저 스쿠터는 어떡하지?”
  • 그때 좀 전에 허지윤을 무시했던 딜러가 몸을 움츠리며 몰래 내빼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다.
  • “거기 멈춰요.”
  • 딜러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 그녀는 몸을 돌리고 용서를 빌었다.
  • “사장님.”
  • “자동차 워셔액 마시면 사람 죽어요. 못 마셔요!”
  • 이도진은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그녀에게 던졌고 지폐 위에는 허명섭의 집 주소가 적혀 있었다.
  • 그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 “거기 적힌 주소에다 스쿠터 옮겨놔요.”
  • ……
  • 대방 빌딩은 십여 층의 오피스 건물로 이미 매우 오래되었으며 외벽은 보기에도 얼룩덜룩했다.
  • 허명섭의 회사인 교연 기업 사무실은 바로 이 오래된 오피스 건물 안에 있었다.
  • 허지윤은 건물 입구 쪽으로 천천히 차를 몰았고 그녀는 아직까지도 이 모든 것이 현실감 없게만 느껴졌다.
  • 설령 그녀가 손에 새 자동차의 핸들을 쥐고 있다고 해도 마치 안갯속에 있는 것처럼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 허지윤은 고개를 돌려 이도진을 쳐다봤는데 마침 그가 무언가 맛있게 먹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 “뭐 먹고 있어?”
  • 이도진은 입속의 달콤한 초콜릿을 얼른 삼켜버렸다.
  • “아니, 나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 “뭔가 먹고 있는 거 내가 분명히 봤거든.”
  • 이도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 “그럼 내가 입을 벌려서 보여줄까?”
  • 그녀가 막 대답하려고 하는 순간 별안간 앞쪽의 1층 입구에서 무언가 내던져지듯 툭 튀어나와서 허지윤은 재빨리 브레이크를 밟았다.
  • 그러자 안쪽에서 경비원들이 서류더미를 함부로 내던지는 모습이 보였고 뒤이어 이도진과 허지윤은 허명섭의 고함소리를 들었다.
  • “하지 마세요, 버리지 마세요.”
  • “제가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우리 회사에서 관리비를 곧 납부하겠다고 말입니다.”
  • 그때 젊은 사람들 몇 명이 허명섭을 밀치면서 안에서 급하게 뛰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 그들은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로 경비원들이 바닥에 내던진 문서들을 하나씩 줍기 시작했다.
  • 곧이어 휠체어에 앉아 있던 허명섭은 배가 불룩 튀어나온 중년 남자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 그는 이 건물의 관리소장 진용호였다.
  • 진용호는 팔짱을 낀 채 허명섭의 앞에 서 있었다.
  • 그는 고개를 한껏 쳐들고 있었으며 입가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 경멸.
  • 개무시!
  • “내가 이 건물에서 십여 년 동안 관리소장을 역임하면서 당신 같은 사람은 여태 본 적이 없었어.”
  • “허명섭, 돈이 없으면 없는 거지. 허구한 날 여기서 뭔 있는 척이야!?”
  • “이 건물의 위 아래층 전부다 통틀어서 당신네 회사가 파산한 거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냐고.”
  • 진용호는 허명섭 바로 앞에 서서 그의 이마에 대고 삿대질을 했다.
  • “내가 분명하게 말하는데, 난 지금 당신들한테 굉장히 예의를 갖추고 있는 거야!”
  • “만약 10분 내에 당신 사무실 안에 있는 물건들을 싹 비우지 않으면, 내가 즉시 그 고물들을 위층에서 모조리 내던져버릴 거야!”
  • 마지막 말을 할 때 진용호의 손가락은 허명섭의 이마를 찌르고 있었다!
  • “이 절름발이 새끼야, 알아 들었냐!”
  • 허지윤은 그 순간 얼른 차 문을 열고 헐레벌떡 뛰어갔다.
  • 허지윤이 차에서 내리는 그 순간 이도진은 핸드폰을 꺼내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 문자 메시지 내용은 매우 간단명료했다.
  • “3분 안에 대방 빌딩을 삽니다.”
  • 허지윤은 숨을 헐떡거리며 진용호 앞에 멈춰 섰다.
  • “소장님,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 너무 심하지 않나요!?”
  • 진용호는 허지윤을 본 순간 갑자기 눈을 번뜩거렸다.
  • “이야, 이거 지윤 씨 아니야?”
  • “어째 수술 한번 하고 나더니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졌는데.”
  • “지윤 씨, 지금 당신네 회사는 관리비도 못 내고 있어. 지윤 씨도 이제 직업을 잃게 됐네.”
  • 그 말을 하면서 진용호의 눈썹이 살짝 꿈틀하더니 허지윤을 야릇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 그는 살이 덕지덕지 붙은 기름진 얼굴에 변태 같은 표정을 지으며 실실 웃고 있었다.
  • “다시 일자리 찾을 계획은 없어?”
  • “이 오빠가 하나 소개해 줄 수 있는데.”
  • “빠아앙”
  • “빠아앙”
  • 갑자기 귀 따가운 경적소리가 들려오더니 그 순간 이도진이 천천히 자동차에서 내렸다.
  • 그는 빠르게 걷고 있지 않았지만 그가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발걸음이 안정되고 왠지 모르게 품격이 느껴졌다.
  •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이도진에게로 쏠려 있던 바로 그 순간 진용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 전화기 너머로 진용호의 사장이 몹시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 “방금 대방 빌딩이 어떤 돈 많은 사장님한테 팔렸어!”
  • “그 사장님 차가 지금 1층에 있는데 새로 뽑은 벤츠야! 아직 번호판도 안 달려 있어!”
  • “얼른 가서 나 대신 사장님을 모시고 있어봐. 나도 금방 도착할 테니까!”
  • 진용호는 황급히 앞으로 뛰어가며 곧바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 “사장님!”
  •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 이도진은 진용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매우 싸늘한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당신이 이 건물의 관리소장입니까?”
  • “네! 바로 접니다!”
  • 이도진은 또다시 물었다.
  • “당신이 이곳에서 십수 년간 일했습니까?”
  • “네, 맞습니다!”
  • “사장님, 전 이곳에서 근면 성실하게 십수 년 동안 일했습니다. 이 건물이라면 제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 너무나도 잘 알고……”
  • “당신은 해고됐습니다.”
  • 느닷없는 한 마디에 진용호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 이도진은 천천히 허지윤 앞으로 다가갔고 바닥에 있던 문서들을 주워 허명섭의 손에 건네준 뒤 웃으며 말했다.
  • “아버님, 이제부터 이 건물은 아버님 것입니다.”
  • ……
  • 저녁 식사 후 거실 안.
  • 허지윤의 가족 네 명은 모두 식탁에 둘러앉아서 식탁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도진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 마침내 유옥분이 먼저 입을 열었다.
  • “이서방, 자네 대체 얼마가 있는 거야?”
  • “자네 정말 의사가 맞아?”
  • “설령 의사라고 해도 그렇게 많은 돈을 벌지는 못하잖아?”
  • 유옥분은 입을 열자마자 질문 세 개를 쉬지 않고 연달아 물었다.
  • 한편 허명섭은 아직까지도 흥분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 그의 회사는 십수 년 동안이나 대방 빌딩에서 사무실을 임대해서 쓰고 있었지만 그 빌딩이 자기 것이 되리라고는 여태껏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 이 데릴사위는 그야말로 의문투성이다!
  • 이도진이 미처 입을 벌리기도 전에 허준호가 불현듯 손뼉을 쳤다.
  • “누나, 매형이 알고 보니까 타짜였네!”
  • “도박으로 돈을 딴 게 틀림없어!”
  • “몇 분만 휙휙휙해도 수십억이거든!”
  • 이도진은 원래 어떻게 해명하면 좋을까 고민 중이었는데 처남이 그렇게 말하자 오히려 자신에게 그럴듯한 핑곗거리를 하나 찾아준 셈이 되었다.
  • 그는 처남의 추리대로 일을 대충 얼버무리려고 그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고 허준호는 이도진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주었다.
  • 유옥분은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이도진이 그렇게 돈이 많다는 사실에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도진을 바라보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 “도박은 올바르지 못한 일이니까 자네 앞으론 절대로 도박에 또 손을 데서는 안되네.”
  • “그리고 설령 돈이 많다고 하더라도 함부로 흥청망청 쓰면 안 돼.”
  • 그러자 이도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 “어머님! 제 주머니에 돈이 너무 많아서 주체가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