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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네 심장은 내꺼야

  • 꿈을 꾼 것보다 더 꿈만 같은 이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진 허지윤,
  • 대체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본인조차 헷갈리자 다급히 이도진에게 물었다.
  • “저, 저기 혹시 손목 좀 볼 수 있을까요?”
  • 긴장 반, 기대 반으로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허지윤의 멘탈, 그런 그녀의 심정을 고스란히 표현하듯 길고 곶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두 눈은 동그랗게 뜬 채 이도진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 “그럼요.”
  • 이도진은 허지윤 앞으로 다가가 손목을 내 밀었고 잔뜩 기대한 얼굴로 그의 손목을 확인하던 지윤의 눈빛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 어린 시절 자신과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 그 남자의 손목에는 선명하고 큰 흉터가 있었는데, 어쩌면 지윤이 도진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마크 같은건데, 지금 눈 앞에 있는 이 남자의 손목에는 아무것도 없다.
  • 실망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푹 떨군 허지윤을 쳐다보며 이도진은 속으로 그녀에게 너무 미안한 생각이 들어 기분이 착잡해졌다.
  • 언젠가는 자신의 진짜 정체를 밝혀야 할 날이 꼭 오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어쩔수 없이 그녀를 속여야 하는 자신이 너무도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 사실 손목에 있던 그 흉터는 긴 세월동안 갈고 닦은 노력과 피땀 덕분에 점차 옅어지다가 이젠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기에 허지윤이 그걸 알아볼리가 없었던 것이다.
  • 그래도 허지윤이 볼 수 없는 또 다른 각도에서 이도진의 또 다른 손에 쥐어진 것은 다름아닌 그녀가 준 사랑의 증표와도 같은 초콜릿 박스이다.
  • 너무도 소중하고 값진 추억이 담긴 물건이지만 절대 내 놓아서는 안 되는 물건이기도 하다.
  • 초콜릿 박스가 공개되는 날엔 허지윤은 당연히 이도진을 한 눈에 알아볼 것이 분명하니까!
  • 허지윤을 바라보는 이도진의 눈 빛에서도 긴장한 기운이 맴돌고 있다.
  • 떴다하면 스포트 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신드롬 급 인기를 얻는 이도진, 뛰어난 실력으로 뭇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홍해의 신적인 존재가 긴장을 하고 있다?!
  • 긴장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아주 먼 것 같은 천하의 이도진, 이런 모습이 참 낯설게 느껴진다.
  • “허지윤 님 심장 수술은 아주 성공적으로 잘 되었습니다, 다만...”
  • 이도진은 수술 결과를 전하면서 일부러 말끝을 흐리고 잠시 멈추었다.
  • 그러자 옆에 있던 유옥분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걱정스레 물었다.
  •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는겁니까?”
  • “그게 워낙 선천성 심장 질환이라서 아무래도 긴 시간동안 휴양을 하면서 천천히 회복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이도진의 말을 듣고 그제서야 한 시름 놓았다는 듯 안도의 숨을 내 쉬는 유옥분과 허명섭,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도진의 이어진 한 마디에 허지윤네 가족의 심정은 또 다시 복잡해졌다.
  • “그래서 오늘부터는 제가 늘 허지윤 님 옆에서 간호를 해야겠습니다.”
  • 이도진의 말이 대체 무슨 뜻인지 영문을 알수 없자 가족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 “여보, 저건 무슨 말이지?”
  • 유옥분은 들릴락 말락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 그러자 이도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씩 웃으며 호주머니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 허지윤의 손에 쥐어주었다.
  • 쪽지를 보던 허지윤의 동공이 갑자기 심하게 흔들리더니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냉큼 고개를 쳐들고 흥분된 목소리로 부모님께 물었다.
  • “엄마, 아빠, 어떻게 그런 요구를 수락하셨어요? 왜 그러셨나고요?!”
  • 허지윤이 따지듯이 물어오자 유옥분과 허명섭은 더더욱 당황했다.
  • 요구라니? 무슨 요구?
  •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쪽지 내용을 확인해보던 두 사람, 그들 역시 허지윤과 똑같이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 “아닌데? 지윤이가 수술하기 전에 우린 분명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했는데.”
  • “맞습니다, 이게 바로 수술 동의서입니다.”
  • 이도진은 수술 동의서를 꺼내보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 “이 두가지는 사실상 한 서류입니다.”
  • “여러분들이 이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하는 순간 이미 저를 데릴 사위로 인정을 하신거나 마찬가지인 셈이지요.”
  • 세상에 이런 일이같은 프로그램에나 나올 법한 이 황당 무괴한 상황은 뭐람?!
  • 허지윤네 식구들은 삽시에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떡 벌린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고 하면 좋을까?
  •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는 말이 더 어울릴까?
  • 아무리 이해를 하려 해도 도무지 납득이 안 가는 이 상황에 가족들은 어이가 없었다.
  • “그리고 미리 말씀드리는 건데 본 계약은 법적 효율이 있는 계약이라 즉시 효력이 발생합니다.”
  • “그러니 저는 이미 이 집안 데릴 사위가 되었습니다.”
  • 자신의 정체를 완벽히 숨기는 전제하에서 허지윤에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그동안 수많은 사상 투쟁과 지속되는 고민 끝에 이도진이 생각해 낸 황당하지만 가장 효율적인 솔루션이 바로 이것이다.
  • 아직도 사태 파악이 덜 된 유옥분과 허명섭은 서로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고 드디어 이 집안의 가장인 허명섭이 총대를 메고 나서기로 했다.
  • “이, 이 선생님, 저희가 자영업을 하는 집이긴 하지만 최근 몇년간 계속 적자가 나는 바람에 사업이 위태위태 합니다. 내일 당장 파산선고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니까요.”
  • “괜찮습니다, 돈이라면 저한테 얼마든지 있습니다.”
  • 아픈 가정사까지 꺼내며 어떻게든 이도진이 데릴 사위로 들어오는 걸 막으려 했지만 이도진이 꿈쩍도 하지 않자 허명섭은 유옥분에게 당신이 좀 어떻게 해보라는 듯 눈 빛으로 구조요청을 했고 유옥분은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이도진을 달래듯이 말했다.
  • “저기 총각, 우리 집에 데릴 사위로 들어오기엔 총각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안 드나?”
  • 그러자 이도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허지윤을 보며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 “허지윤 씨는 제 환자입니다, 당연히 제가 끝까지 책임져드려야지요.”
  • “오늘부로 허지윤 씨의 심장은 제가 관리합니다.”
  • 이도진의 폭탄 발언에 허지윤네 세 식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똑같이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 그런 그들의 마음을 알기나 하는지 이도진은 시뚝하면서도 여유 넘치는 표정이었다.
  • 유옥분은 그런 이도진이 점점 더 아이러니하게 보였고 심지어 이 남자가 정상이 아닌가? 라는 생각까지 들어 이마에 식은 땀을 뻘뻘 흘렸다!
  • 데릴 사위를 자처하고 다짜고짜 한 식구가 되겠다는 이 남자,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닌 것 같다!
  • 요즘 세상에 데릴 사위를 하겠다고 선뜻 나서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 “따르릉...”
  • 이때, 허명섭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고 그는 전화를 받고 짧게 몇 마디를 주고 받더니 표정이 확 굳어버렸다.
  • “대체 원하는게 뭐야?”
  • “뭐? 5억?!”
  • 5억이라는 천문학적 숫자에 허명섭은 두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고 눈 앞이 깜깜해났다, 회사가 자금난으로 바람 앞에 촛불처럼 위태위태한 상황에 5억이라는 거금을 무슨 수로 마련한단 말인가?!
  • “제발 부탁입니다, 우리 아들 좀 살려주십시오! 저 정말 그렇게 큰 돈이 없습니다!”
  • 상대방은 칼 같이 딱 잘라 전화를 끊었고 허명섭은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며 고통스럽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아직 50대도 안된 꽃 중년이어야 할 허명섭이지만 얼굴엔 자글자글 주름이 가득했고 누가 봐도 빼빼마른 늙은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 어릴 적부터 성실함에 있어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착한 성품을 가진 허명섭, 대학 졸업 후 스스로 창업을 했고 그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발 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고 발품을 팔아오며 양심 경영을 해 온 허명섭이다.
  • 그렇지만 3년 전, 운명은 그에게 짖궂은 장난을 쳤고 그는 교통사고로 두 다리가 마비되었고 그 뒤로부터 회사 경영은 줄곧 내리막길을 걷게 된 것이다.
  • 비록 성적이 우수하고 실력이 뛰어난 딸 허지윤이 한국 대학교 졸업 후 가업을 이어받아 경영을 돕고 있긴 하나 회사는 여전히 위태위태한 상태로 겨우 유지만 하고 있는 정도이다.
  • 게다가 알게 모르게 음모를 꾸미는 자들도 있다보니 최근 몇 년간 식구들은 굶어죽지 않을 만큼만 입에 풀칠을 하며 하루하루 지탱하고 있었다.
  •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본 허지윤은 조바심이 났고 걱정이 앞섰다.
  • “아버지, 무슨 일 있어요?”
  • 허명섭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더니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 알고보니 허지윤의 친동생인 허준호가 누나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도박을 했던 것이다.
  • 어릴때부터 늘 사고뭉치에 애물단지였던 허준호, 식구들은 늘 그런 허준호 때문에 속을 썩여야만 했었다.
  • 그러나 누나를 위하는 마음으로 이런 큰 사고를 친 녀석을 아무도 욕을 하거나 나무랄 수는 없었다, 결과가 어찌됐든 그 출발점은 곧 누나를 위하는 극진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 멍청한 녀석이 5억의 사채빚을 지고 독사라는 깡패한테 잡혀간 것이다.
  • “아버지, 그 독사라는 사람 영주에서 알아주는 깡패에요,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도 있을만큼 악질적인 인간이라고요.”
  • “그 사람 손에 잡히면 준호는 죽어요!”
  • 놀라고 당황한 나머지 허지윤은 아픔도 잊은채 이불을 홱 뿌리치고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고 그 순간 이도진은 잽싸게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말렸다.
  • 맥이 싹 풀려서 나른해진 허지윤의 몸, 그녀의 몸에서는 따스한 온기와 함께 여자한테서만 나는 특유의 숙녀 냄새가 풍긴다.
  • “허지윤 씨, 아직은 침대에서 내려오시면 안 됩니다.”
  • “동생분 일은 저한테 맡겨주십시오.”
  • “선생님이요?”
  • 의아한 표정으로 이도진을 바라보는 허지윤.
  • “만약 제가 허지윤 씨 옆에 끝까지 남아있게 허락해 주신다면 동생분은 제가 구해오겠습니다.”
  • “약속하죠, 놈들이 절대 털 끝하나 못 건드리게 멀쩡한 모습으로 허지윤 씨 앞에 데려오겠습니다.”
  • 동생 얘기가 나오자 허지윤은 아무말도 안 하고 침묵만 지켰다.
  • 어린 시절, 그녀는 이미 결혼을 약속했던 그 남자아이한테 마음을 다 주었는데, 비록 지금은 그 아이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지만 허지윤은 한 순간도 그와의 약속을 잊은 적이 없었고 언젠가는 그가 꼭 돌아올 거라는 희망을 품고 기다리고 있다!
  • 내적 갈등이 심해지자 허지윤의 표정에도 복잡한 변화가 보였고 그걸 본 이도진이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웃으며 말했다.
  • “오해 마십시오, 전 그저 허지윤 씨의 심장만 책임질 테니까요.”
  • “나중에 심장 질환이 완치가 되고 그때가 되어서도 지윤 씨가 저더러 떠나라고 한다면 저는 지윤씨의 눈 앞에서 철저히 사라져드리겠습니다.”
  • 허지윤은 눈을 깜빡이며 이도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 솔직히 예전에는 늘 이도진이 마스크를 착용한 모습만 봐 왔던 지라 한 번도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 이번에 수술을 마치고 처음으로 이도진을 본 허지윤은 그가 결코 싫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익숙하고 편한 느낌이 들었다.
  • 맑고 정갈한 두 눈, 티없이 깨끗하고 순수한 미소를 짓는 이 남자, 어릴 적 그 아이랑 너무나 닮았다.
  • 심지어 이름까지 똑같은 사람이지만 손목에 상처만 없다.
  • 두 사람 과연 같은 사람이 맞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