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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

Last update: 2021-11-24

제1화 다음생엔 좀 더 일찍 결혼해줘

  • “도진씨, 이 문자 도진씨가 볼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 “어쩌면 내가 도진씨한테 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문자가 될수도 있는데.”
  • “아무래도 난 도진씨의 신부가 되어줄 수 없을 것 같아.”
  • “부디 다음생엔 조금 빨리 나타나서 좀 더 일찍 나랑 결혼해줘...”
  • 빛 한 줄기 안 들어오는 음침하고 어두운 수술실, 안 그래도 무겁고 우울한 공기속 병원 소독수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 시각 북받쳐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는 한 여자의 울음섞인,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암울한 분위기의 수술실을 맴돌고 있다.
  • 하얗게 상기된 얼굴과 축 처진 어깨로 힘없이 수술대에 누워있는 허지윤.
  • 늘 누워있던 수술대였지만 오늘은 유독 차갑고 오싹하고 심지어 칼로 생살을 에이는듯 너무도 고통스럽게만 느껴진다.
  • 이제 곧 심장 수술을 받게 될 그녀는 의사 선생님에게 문자 한 통만 보내달라고 부탁을 했다.
  • 그동안 수차례 같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부재중인 그 번호, 아무도 받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 지금 상황에선 창살없는 감옥인 수술실에 떡하니 갇혀만 있어 그녀가 할 수 있는거라곤 기약없는 기다림에 계속되는 절망뿐...
  • 아직은 그나마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고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있으니 더 늦기전에 꼭 이도진한테 문자를 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 문자는 지금보다는 좀 더 나은 다음생을 기약하는 한 줄기 희망, 목숨을 살릴 동아줄과도 같은것이다.
  • 마취제의 약효로 인해 지윤의 눈꺼풀이 자꾸만 무거워진다, 깊은 우울감으로 가득 찬 두 눈, 세상의 고초와 쓴 맛을 모두 겪은 듯 초점없이 흔들리는 암울한 두 눈이 스르륵 감겨지면서 구슬같은 두 줄기의 눈물이 혈색하나 안 보이는 창백한 그녀의 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 그러나 그 문자는 끝내 전송실패... 아니, 아예 전송 자체가 안 되었다.
  • 수술대 옆에 서 있는 의사, 훤칠한 키에 신이 내린 황금 비율을 자랑하는 듬직한 몸매에 날렵한 턱선과 냉철한 눈 빛의 남자는 휴대폰에 글자 하나 입력하지 않고 있었다.
  • 마스크를 내리니 조물주도 뿌듯해할 것 같은 완벽한 비주얼이 유독 더 부각이 된다.
  • 수술대에서 깊은 단잠에 빠진 허지윤을 그윽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그 남자, 말로는 형용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이 그의 눈 빛 사이를 뚫고 나왔으며 남자는 나지막한 소리로 되뇌인다.
  • “다음생 기다릴 거 없어, 내가 왔으니까.”
  • 말을 마치고 다시금 마스크를 쓰는 이도진.
  • 그는 천천히 두 손을 들어올렸고 수술실 조명에 비추어지니 그의 손길은 유독 날렵하고 현란했다.
  • 정숙.
  • 수술실 밖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아찔한 적막이 맴돌았고 이도진 뒤에는 국내외 각지에서 섭외해 온 엘리트 급 심장치료 전문의 열 몇명이 가지런히 줄을 서 있었다.
  • 흑발, 금발, 카키색 머리에 흑발 백발이 섞인 머리!
  • 그들은 모두 여성이었으며 소식을 접하는 순간 하던 일을 올 스톱하고 이 곳으로 왔으며 심지어 그들 중엔 영국 여왕의 초청까지 거절한 채 산 넘고 바다 건너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사람들도 있었다.
  •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 그 이유는 단 하나, 기적의 순간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 극도에 달하는 긴장감,
  • 자꾸만 올라가는 흥분지수,
  • 신의 손으로 불리는 의학계 거장이 집도를 하는 모습을 직접 지켜볼 수 있다는 건 의료계 종사자들의 로망이자 최고의 영광이 아닐수 없다!
  •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목숨을 살리는 등 손길이 닿았다 하면 기적이 척!
  • “신의 한 수”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차원이 다른 스케일, 사람들은 그를 신의 손이라 부른다.
  •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신의 손!
  • 지고무상의 권리와 힘을 가진 이 남자!
  • 뭘 상상하든 그 이상, 어마어마한 재부를 축적한 이 남자!
  • 혼잡하고 어수선한, 홍해라는 삭막한 벌판에서 그는 질서를 지켜낸 수호자이자 사람들의 무한한 숭배와 총애를 받는 신이다!
  • 그러나 명색이 홍해를 쥐락펴락하는 만능의 신으로 불리는 그가 대체 왜?
  • 어쩌다 이 비좁고 암울한 수술실에 나타난 것일까?
  • 16년 전, 아무런 연고도 없이 돌연사로 세상을 떠난 이도진의 친 형!
  • 친 형을 잃은 아픔과 눈물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설상가상으로 위독한 어머니와 어린 도진은 아버지에 의해 집에서 쫓겨났고 결국 영주에까지 오게되었다.
  • 얼마 뒤 어머니는 지병으로 돌아가셨고 이도진은 몸 둘 곳 하나없는 고아 신세가 되어 길거리를 나돌며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다.
  • 오갈데 없는 처량한 신세에 심지어 미친개한테 미친듯이 쫓겨다녀야만 했던 그 시절,
  • 하루하루 눈물로 세수를 하며 시궁창 밑바닥 인생에서 허덕이고 있을때, 허탈함과 외로움은 점점 절망과 절규로 번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상큼발랄 똥머리를 곱게 땋아올리고 청순미 뿜뿜 꽃무늬 원피스를 차려입은 한 어린 소녀가 도진의 앞에 나타났다.
  • 작은 막대기 하나를 손에 꽉 부여잡은 그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친개 앞에서 분명 자기도 무서울텐데 그래도 용기를 내서 용맹하게 미친개를 쫓아버렸다.
  • 그러고는 도진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갔다.
  • 작고 아담한 지윤이네 집, 부유하고 잘사는 집은 아니었지만 남루한 옷차림에 거지행색을 하고 다니는 이도진을 그녀의 가족들은 따스하게 보듬어주었다, 참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이도진에게는 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밑바닥 인생에 다시금 삶의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 준 터전이나 다름없다.
  • 매운맛, 쓴맛, 신맛으로만 가득했던 이도진의 씁쓸한 인생이 허지윤으로 인해 점차 단맛이 추가되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도진에게 있어서 가장 포근하고 행복했던 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풋풋하고 순수했던 그 시절의 어린 남녀는 어느새 서로에 대한 감정이 점차 깊어졌으며 급기야 평생을 서로의 동반자가 되어주기로 약속까지 했다.
  • 그러던 어느날, 이도진은 우연히 한 늙은 거지, 즉 그의 스승님을 만나게 되었다.
  • 늙은 거지는 허지윤은 선천성 심장 질환으로 인해 단명할 운명이며 25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을 거라고 말했다.
  • 그 말을 들은 이도진은 무슨 일이 있어도 허지윤을 살리리라 마음 먹었다!
  • 그 뒤로 늙은 거지와 함께 배를 타고 먼 길을 떠난 이도진, 그가 떠나는 날 허지윤은 자신이 가장 아끼던 보물1호인 초콜릿 박스를 도진에게 선물했고 도진은 그녀에게 자신의 어머니의 연락처를 주며 무슨 일이 있으면 어머니를 찾아가라는 당부를 남긴 채 떠났다.
  • 배가 떠나기 직전까지도 이도진은 허지윤의 손을 꼬옥 잡고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 이도진과 늙은 거지는 홍해로 떠났다, 드넓은 땅에 자원이 풍부하여 살기좋은 풍요로운 지역으로 알려져있지만 화려한 겉모습 뒤에 숨은 추악한 실체라고 해야 하나? 비옥한 토지 자원만큼이나 혼잡했고 하루가 멀다하게 터지는 전쟁에 사람들은 늘 초조함과 불안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 이도진이 홍해 땅을 밟은지 5년, 그동안 그는 몸을 사리지 않고 과감히 전쟁에 맞섰으며 용맹하게 싸워 적들을 때려눕혔다!
  • 눈물로 세수를 하며 살아오던 밑바닥 인생은 뒤로하고 이젠 적들의 피로 손을 씻을 만큼 전쟁터의 에이스가 된 이도진, 그 용감한 소년이 고작 15세밖에 안 된 어린 남자애였으니!
  • 드디어 18세가 되던 해, 이도진은 자신을 가로막던 모든 장애물을 돌파하고 홍해 바닥을 공식적으로 지배한 지고무상의 신이 되었다!
  • 사람을 죽이던 손으로 다시 사람을 살리는 이도진!
  • 과거 전쟁터에서 총과 칼을 잡고 용맹하게 싸우던 이도진의 손에 오늘날 쥐어진 것은 전쟁 칼이 아닌 수술칼!
  • 그동안 이도진은 일반 백성들부터 귀족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병치료를 도와왔으며 어느새 의학계를 본격적으로 주름잡은 업계에서 알아주는 신의 손, 신의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다.
  • 심지어 잘나가는 재벌집이나 나라 대통령이 이도진의 진료를 예약하려 해도 쉽게 진료를 받을 수 있는게 아니라 이도진의 컨디션과 기분을 봐야 했다!
  •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정상의 자리에까지 오른 이도진, 오늘날 명실상부 의학계의 신, 의신으로 높이 떠받들리고 있다!
  • 어디 그 뿐이랴, 홍해 바닥에서도 떴다하면 대박을 치는 이도진은 홍해의 신, 홍신으로도 통한다!
  • 그가 손가락 까딱해도 세상을 휘여잡고 움직일 수 있다는 전설이 돌 정도이다!
  • 그런 그가 돌아왔다! 드디어 돌아왔다!
  • ...
  • 살랑살랑 기분좋게 불어오는 바람에 새하얀 커텐이 하늘하늘 춤 추듯 흩날리고 허지윤의 검실검실 긴 생머리에도 바람결이 스쳐지나고 있다.
  • 깊은 단잠에 빠진 허지윤을 보며 푸근한 아빠 미소를 짓는 이도진, 그가 웃었다.
  • 다행히 수술은 아주 성공적으로 잘 마쳤고 허지윤도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 허지윤은 선천적으로 일반인에 비해 심장벽이 얇았고 수술을 통해서 보완하거나 증강을 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니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한 상황이다.
  • 이제 앞으로 한 동안은 홍해의 의신이신 이도진이 항시 그녀의 곁을 지켜주는 수호천사가 되어줄 것이다, 단 허지윤에게 정체를 절대 들키지 않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 이도진이 정체와 신분을 숨겨야만 하는 이유는 딱 두가지이다,
  • 첫째, 그가 홍해를 떠났다는 소식이 절대 밖으로 누설되어서는 안 되니까.
  • 홍해 바닥을 쥐락펴락하는 의신이 홍해를 떠났다는 소식이 알려지는 순간 파장은 일파만파로 커질 것이며 여기저기에서 관심을 가져올 것이 분명한데다 심지어 허지윤까지 원치않는 스포트 라이트와 지나친 세간의 관심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될 경우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한 허지윤에겐 오히려 약이 아닌 독이 될 것이다!
  • 둘째, 이번에 귀국을 하면서 이도진은 사실 엄청난 미션을 짊어지고 왔다.
  • 당시 이도진을 데리고 해외로 나갔던 늙은 거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죽기 전에 유언을 남겼고 이도진은 그의 유언을 들어줘야 했으니까.
  • 그의 유언을 들어줄 때까지 절대 이도진의 정체를 들키면 안 된다.
  •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던 이도진은 호주머니에서 무려 16년을 보물단지처럼 아껴오던 초콜릿 박스를 꺼내보았다.
  • 그때 허지윤을 떠나던 날, 허지윤은 친 자식처럼 아끼던 보물 1호 초콜릿 박스를 이도진에게 선물했고 어쩌면 그것은 영원히 함께 하자던 두 사람의 약속을 절대 잊지 말라는 당부의 메시지였을지도 모른다.
  • 그는 초콜릿 하나를 꺼내 입에 넣고 천천히 음미하면서 씹어먹었다.
  • 다양한 맛의 초콜릿을 즐겨먹는 이도진이지만 긴 세월동안 초콜릿 박스만은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매번 기쁘거나 긴장할때면 어김없이 초콜릿을 먹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았던 이도진이다.
  • 부드럽고 달콤한 초콧릿의 식감은 늘 긴장을 풀어주는 밀방이자 묘약이 되어주었다.
  • 그렇다면 초콧릿을 입에 물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이도진의 기분은 어떤걸까?
  • 기쁨?
  • 아니면 긴장?
  • 이도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었고 그동안 수많은 생명을 살려온 신의 손으로 정교하게 예쁜 허지윤의 얼굴을 살살 쓰다듬었다,
  • “덜컥!”
  • 그 시각, 예고없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한 쌍의 중년 부부.
  • 남자는 휠체어에 앉아있었고 부인이 휠체어를 밀고 들어왔다.
  • 그들은 바로 허지윤의 부모님들이셨다.
  • 허지윤의 완벽에 가까운 비주얼은 빼박 부모의 우월한 유전자를 이어받아서였다.
  • 이날 해당 사립병원의 병원장도 허지윤 부모님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 이틀 전, 이도진은 2조원에 달하는 거금을 들여 이 사립병원을 매입했다!
  • 그 이유는 단 하나,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약혼녀 허지윤에게 가장 쾌적하고 아늑한 치료 환경을 마련해주기 위해서!
  • 다만 하늘도 매정하지, 이도진의 극진한 보살핌과 정성어린 관심도 무색해지게 허지윤의 수술 성공율은 고작 5%!
  • 어쩌면 수술실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그녀의 인생은 시한부였을지도 모른다!
  • 그런 그녀의 병세를 안정시킨 건 다름아닌 이도진, 의학계에서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거창하게 장식할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을 바로 신의 손인 이도진이 만들어낸 것이다!
  • 수술실에 외부인들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무도 없었다면 원장은 아마 이도진 앞에 무릎을 백번도 더 꿇었을 것이다!
  • 업계에 길이 남을 위인의 위대한 탄생, 도진은 분명 사람이 아닌 신이 틀림없다!!
  • “의사 선생님, 우리 딸 아직도 안 깨어났습니까?”
  • 허명섭이 초췌해진 얼굴로 애처롭게 이도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집안,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고 하지만 대체 암흑하기만 한허명섭네 가족들은 언제쯤이면 희망의 빛 줄기를 볼 수 있을지?
  • 이미 보름 넘게 제대로 된 잠 한 번 자보지 못한 허명섭,
  • 이도진은 휠체어에 앉아있는 허명섭의 다리를 눈으로 빠르게 스캔하더니 곧바로 결단을 내렸다.
  • 저 다리는 반드시 치료할 수 있어!
  • “이 시간이면 깨어날 때도 되었는데.”
  • 바로 그때 병상에 누워있는 허지윤의 나지막한 신음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 “아...”
  • “우리 지윤이가 깼어요!”
  • 유옥분은 냉큼 허지윤의 병상 앞으로 달려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고 길고 가는 눈초리가 파르르 떨리더니 허지윤이 눈을 떴다.
  • “엄마?”
  • “아이고, 지윤아, 우리 딸!”
  • “드디어 깼구나!”
  • 역시 신의 손 이도진, 심장 수술을 마친 뒤 며칠을 잠이 든 상태로 깨어나지 못하다가 드디어 눈을 떴지만 이도진의 뛰어난 의술 덕분에 허지윤은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 게다가 컨디션도 예전에 비해 훨씬 좋아져서 말을 하는데 생기가 돌 정도였으니 말이다.
  • 허지윤은 이도진을 빤히 쳐다보았고 이도진도 그녀를 보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 푸근하게 웃는 이도진의 모습을 보며 허지윤은 왠지 낯설지 않은 반가움을 느꼈다.
  • “저기, 누구시죠...?”
  • “이도진이라고 합니다.”
  • 이, 이도진!?
  • 너무도 익숙한 이름 석자에 화들짝 놀란 허지윤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도진을 쳐다보았다.
  • 저 사람이 이도진이라고?
  • 설마 그가 정말로 돌아온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