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11화 평생 떠나지 않을 거야

  • 허지윤은 엄마가 점점 이도진 편을 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입을 삐쭉 내밀었다.
  • 그가 집에 들어온 지 고작 사흘도 안 되었는데!
  • 게다가 허지윤은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 그녀는 이도진을 자기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 “우리 엄마한테 알랑거리지 마. 그러다가 엄마가 당신을 진짜로 데릴사위 삼으면 어떡하려고?”
  • 이도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 “그럼 그렇게 하면 되지.”
  • “안돼!”
  • “내가 이미 얘기했잖아. 내 맘속엔 다른 사람이 있다고.”
  • 이도진은 곧바로 머리를 앞으로 쓱 내밀더니 히죽대며 물었다.
  • “그런데 그 사람 이름이 뭔데?”
  • “그는 이……”
  • 허지윤은 하마터면 이도진의 이름을 부를 뻔했다. 그녀는 재빨리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면서 퉁명스럽게 이도진을 흘겨보았는데 그 모습마저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탐스러운 붉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 “흥, 말 안 할래!”
  • 그녀는 사실 그날 수술실에서 이미 이도진에게 말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 그와 똑같은 이름!
  • 얄미워 죽겠어!
  • 그 순간 이도진에게 허지윤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보였다.
  • 그는 늘 그녀를 놀리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 이도진의 얼굴이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기까지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 “내가 데릴사위가 되는 걸 원치 않는다면 그럼 사위 말고 아들 할게.”
  • “난 어렸을 때부터 고아로 자랐기 때문에 가족의 온기를 느껴본 적이 없었거든.”
  • “어머님은 평소에 무서워 보이시고 툭하면 식칼을 집어 들기도 하시지만 사실은 잘 대해주셔.”
  • “아버님도 말수는 적지만 사실 좋은 분이시고.”
  • “당신 동생은……”
  • “매형, 아침 드세요!”
  • 그때 문밖에서 허준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허지윤은 또다시 발을 동동 굴렀다.
  • “이런 은혜도 모르는 배신자 같으니라고.”
  •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가 이도진을 바라보는 눈빛은 조금 전보다는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 “아무튼 내 마음속엔 이미 다른 사람이 있어.”
  • “당신은 내 심장이 다 낳으면 떠나도록 해.”
  • “당신한테 더 어울리는 사람을 찾아가.”
  • 이렇게 마음씨가 고운 아가씨.
  • 그녀는 마음속으로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이도진을 경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 이도진은 방을 나가는 허지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따뜻하고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 “이 바보야.”
  • “난 평생 널 떠나지 않을 거야.”
  • 허지윤이 이제 막 위층에서 내려오자 그녀보다 한발 앞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던 이도진은 이미 전동스쿠터를 몰고 허지윤 곁으로 와서 멈추었다.
  • 집에 있었던 유일한 승용차는 이미 팔았으므로 지금은 전동스쿠터를 타고 출근할 수밖에 없었다.
  • “각시 얼른 타!”
  • 허지윤이 이도진을 째려봤다.
  • “회사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지 않아? 스쿠터는 내가 운전할게.”
  • 허지윤이 그 말을 하자마자 이도진은 몹시 들뜬 표정을 지었다.
  • 그는 손을 비벼대며 웃었다.
  • “그럼 당신이 운전해.”
  • 허지윤은 원래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이도진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 그러다 그녀는 자신이 스쿠터를 운전하면 이도진이 바로 뒤에 앉아야 된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 그럼 그의 손은 어디로 가는 거지?
  • 또다시 이도진의 그 사심 가득한 표정을 쳐다보자 허지윤은 순간 속으로 욱했고 얼른 손을 뻗어 이도진의 어깨를 탁 쳤다.
  • “아야!”
  • 이도진은 매우 아프다는 듯 소리를 질렀고 그의 얼굴도 몹시 아픈 사람처럼 보였다.
  • “왜 그래, 괜찮아?”
  • 이도진의 비명소리를 듣자마자 허지윤은 얼른 고개를 숙여 그를 살펴봤지만 이내 자신이 또다시 그에게 놀아났다는 것을 알아챘다.
  • 그녀는 잔뜩 토라진 채 몸을 돌려 단지 입구 쪽으로 곧장 걸어가버렸다.
  • 이도진은 스쿠터를 타고 뒤쫓아가 웃는 얼굴로 사과했고 간신히 그녀를 달랜 뒤에야 스쿠터에 그녀를 태울 수 있었다.
  • 이도진은 구시가지를 능숙하게 운전했고 허지윤은 그의 뒤에서 조신하게 앉아 있었다.
  • 그녀는 원래 그와 어떠한 신체 접촉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이도진 이 자식은 스쿠터를 몰면서 하필이면 울퉁불퉁한 곳만 자꾸 지나갔다.
  • 허지윤은 하는 수없이 두 손으로 이도진의 어깨를 붙잡았다.
  • 그런데 계속 가다 보니 아무래도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 같았다.
  • “내가 뭐랬어, 길을 잘못 들었잖아! 회사는 서쪽에 있는데 우리는 지금 북쪽으로 가고 있잖아.”
  • “아니야, 길을 잘못 들었을 리 없어. 봐봐, 바로 앞에 있잖아.”
  • 그의 손끝이 향하는 곳을 쳐다보았더니 앞쪽에 웬 벤츠 매장이 있는 것이 아닌가!
  • 처음에 허지윤은 이도진이 농담하는 줄 알고 있다가 그가 스쿠터를 몰고 매장 입구로 들어가는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여긴 뭐 하러 온 거야?”
  • “물건 사려고 왔지.”
  • 이도진은 마치 군것질을 사러 아무 마트나 가볍게 들른 것처럼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 그는 스쿠터를 한쪽에 세운 뒤 허지윤의 손을 잡아끌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이렇게 해서 허지윤은 난생처음 벤츠 매장에 들어와 보게 되었다.
  • 그전에 집에 있었던 건 아주 평범한 국내 자동차로 천만 원 정도에 불과했었기 때문에 벤츠처럼 이런 고급 차는 그녀에게 그저 지나친 사치일 뿐이었다.
  • 이도진과 허지윤은 둘 다 대충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 허지윤이 대단한 미인이기는 했지만 그녀에게 값나가는 장신구는 하나도 없었다.
  • 한쪽에 경력이 오래된 딜러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들은 선 채로 수다만 떨뿐 그 누구도 이도진과 허지윤을 응대해 주지 않았다.
  • 하지만 이도진은 그들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허지윤을 끌고 이쪽 저쪽 돌아다니며 마음껏 둘러보았다.
  • 허지윤은 이도진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그냥 가자. 여기 너무 비싸.”
  • “어떤 스타일이 마음에 들어?”
  • 그는 마치 허지윤의 말을 아예 듣지 못한 것처럼 그녀의 말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물었다.
  • 허지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난 다 마음에 안 들어. 우리 나가자.”
  • 허지윤의 그 말이 끝나자마자 이도진은 그녀의 손을 잡더니 흰색 벤츠 E 클래스 세단 앞으로 끌고 갔다.
  • 그는 아까 허지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닐 때 그녀의 시선이 이 차에 여러 번 머물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이도진은 손을 뻗어 곧바로 차 문을 열었다.
  • “자, 어떤지 앉아봐.”
  • 허지윤은 입으로는 싫다고 말하면서 몸은 정직하게도 이미 벤츠의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는 그녀가 이 차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 “아가씨, 차에서 나와주시죠.”
  • 그때 짙은 화장을 한 딜러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 그녀는 이도진과 허지윤이 차를 살만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자 정색하며 말했고 말투마저도 몹시 무례했다.
  • “이 차는 1억이 넘습니다. 당신이 살 수 있는 차가 아니에요!”
  • 그 순간 핸들을 잡고 있던 허지윤의 손이 움찔했다.
  • 조금 전까지 무척 신나있던 그녀에게 마치 찬물을 확 끼얹은 것만 같았다.
  • 허지윤은 의기소침하게 운전석에서 나왔고 이도진은 그녀의 어깨 위로 손을 살짝 얹으면서 딜러를 쳐다봤다.
  • “어째서 제가 이 차를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 “흥!”
  • 딜러는 콧방귀를 뀌었다.
  • “손님, 여자친구 앞에서 있는 척 좀 하지 마시죠?”
  • “당신 같은 사람은 제가 아주 많이 봤거든요!”
  • “살 수 있으시면 지금 당장 돈을 보여주시던가요!”
  • 딜러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 그러자 옆쪽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을 향했다!
  • “손님이 만약 1억이 넘는 이 벤츠를 살수 있으시면 제가 옆에 있는 이 자동차 워셔액을 마셔버릴게요!”
  • 이도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멀지 않은 곳의 입구 쪽에서 아까부터 내내 서 있던 한 여직원을 손으로 가리켰다.
  • 이도진은 그녀에게 손짓했다.
  • 그 여직원은 신입 직원이었으며 오늘 그녀의 업무는 입구에 서서 고객을 맞이하는 일이었다.
  • 아까 이도진과 허지윤이 아무렇게나 세워 놓은 스쿠터를 그녀가 옆에 있던 주차장 자리로 옮겨 놓았었다.
  • “고객님, 무슨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 이 신입 여직원은 매우 친절한 태도로 얼굴에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 이도진은 아무렇지 않게 주머니에서 검은색 카드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 “결제해 주세요. 비밀번호는 0000입니다. 이 차는 제가 사겠습니다.”
  • “네?”
  • 허지윤과 그 신입 여직원은 이구동성으로 놀라서 소리쳤다.
  • 그녀들의 표정 역시 거의 흡사했지만 허지윤은 몹시 경악한 표정인데 비해 그 여직원은 기뻐하는 표정에 훨씬 가까웠다.
  • 블랙카드!
  • 한정판으로 출시되는 이런 은행 카드는 일반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