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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설렘이 싹트다

  • 권지안은 바로 잠금 버튼을 눌렀지만 이미 기사도 들어버린 상태였다.
  • 그녀는 기사가 백미러로 그녀를 훑어보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 권지안은 집 주소를 말한 뒤 좌석에 기대어 정신을 가다듬었다.
  • 주서온은 더 이상 소식이 없었다. 상을 치르고 있었으니 바쁠 수밖에 없었다.
  • 집에 도착했을 때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그녀는 실내화로 갈아 신은 뒤 안으로 들어갔다.
  • 강아지 두 마리와 고양이 한 마리가 사라져있었다. 소파 위에는 임가영이 얼마 전에 산 한정판 가방이 놓여 있었다.
  • 그녀가 강아지들 산책을 데리고 나간 것이었다.
  • 돈 많은 사람들은 역시나 달랐다. 몇 천만 원에 달하는 리미티드 에디션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현관문을 닫는 법이 없었다.
  • 임 가는 넓은 뜰을 보유한 데다가 깊이 위치하고 있어 경계가 삼엄했고 그로 인해 임가영은 문을 닫는다는 게 무엇인지 아예 개념이 없었다.
  • 권지안의 집은 임가영의 대저택에는 절대 비할 수 없었다.
  • 아무리 시내 중심에 위치한 고급 아파트 단지는 금싸라기 땅이라고 하지만 결국에는 넓은 정원이 딸린 대저택에는 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야간에는 경비원들이 팀을 이루어 순찰을 돌기도 하지만 말이다.
  • 그녀는 문을 닫은 뒤 옷을 갈아입고 세탁기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버튼을 누르려다 다시금 세탁기에서 꺼냈다.
  • 주서온의 누나 옷이라면 명품 브랜드일 것이었으니 세탁소에 맡길 수밖에 없는 옷일 게 분명했다.
  • 그녀는 세탁소에 전화를 걸어 픽업을 오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김에 본인 옷도 같이 맡겼다.
  • 그녀는 명품 브랜드를 입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윤지석이 자주 그녀에게 사주곤 했다.
  • 그녀를 사랑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윤지석은 그들에게 포장이라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 명품을 입을 수 있다면 소송을 많이 맡았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소송을 많이 맡았다는 건 승소률이 높아서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고 생각했다.
  • 그는 선순환이라고 얘기하곤 했다.
  • 윤지석은 제대로 판을 짜는 사람이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세탁소 알바가 옷을 수거하러 왔고 임가영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 그녀가 주방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던 그때 고양이의 울음소리와 강아지가 짖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임가영이 돌아온 것이었다.
  • 그녀는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아우성이었다.
  • “문은 왜 닫는 거야. 지문인식하기 귀찮은데.”
  • 권지안은 그녀의 말에 개의치 않아 했다.
  • “그럼 앞으로 문을 부숴버리고 밤에 누가 날 들어간 다음에 강간하고 나서 죽여버리면 되겠다.”
  • 임가영은 맨발로 뛰어가 코를 벌렁거리며 크게 들이마셨다.
  • “내 것도 끓였어?”
  • “그럼 이거 나 먼저 줘.”
  • “나한테 맡겨뒀어?”
  • “아니야?”
  • 그녀는 똑똑히 얘기했다.
  • “내 거북이 죽게 만들었잖아.”
  • 어찌나 뻔뻔한지.
  • 그녀의 엄마한테 결벽증이 있어서 아무리 임 가가 넓은 면적이라고 하지만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 임가영은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기에 길에서 바퀴벌레만 봐도 귀엽게 느끼는 사람이었다.
  • 지금까지 몇 년 동안 그녀는 이상한 동물을 가지각색으로 키웠다. 그런데 키울 데가 없었던 그녀는 전부 권지안의 집에 맡겨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 권지안은 완성된 라면을 들고 식탁 앞으로 갔다. 강아지 두 마리와 고양이 한 마리가 식탁 위에 있었고 임가영까지 그 앞에 마주 앉아 있었다.
  • “누가 얘네들 식탁 위로 올리라고 허락했어? 당장 내려놔!”
  • “넌 참 사랑이 없는 아이구나.”
  • “그럼 라면 먹지 말던지.”
  • 임가영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애지중지하는 제 보물들을 한 마리씩 밑으로 내렸다. 권지안은 그제야 라면을 그녀에게 건넸다.
  • 그녀는 라면을 먹으며 권지안과 수다를 떨었다.
  • “오후에 주 가에 조문 다녀왔거든. 주 가에 대해서 알아? 넌 모르겠다. 윤지석은 무조건 알 거야.”
  • 권지안은 마음이 철렁했지만 손은 멈추지 않고 라면 봉지를 뜯었다.
  • 임가영은 수다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 “주 가 큰 아들이 세상을 떠났거든. 꽤 잘생겼어. 그때 우리 엄마가 나를 그 사람이랑 맺어주려고 하기도 했어. 근데 명줄이 그렇게 짧을 줄은 몰랐지.”
  • 권지안은 쓰레기봉투를 들고 임가영 옆을 지나고 있었고 그녀는 권지안을 콕콕 찌르며 얘기했다.
  • “계란 후라이 하나만 해주라.”
  • 권지안은 그녀를 째려보았다.
  • “내가 너희 집 가정부야?”
  • “나는 할 줄 모르니까 그러지. 제발 해주라 권지안. 네가 최고야.”
  • 아가씨는 역시나 팔자가 좋았다. 애교만 부리면 가만히 앉아서 성과를 누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 권지안은 다시금 주방으로 가서 후라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임가영이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 “주 가는 이제 아들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어. 그 집에서 딸을 여섯이나 낳을 때까지 아들이 없었거든. 그러다 어쩔 수 없이 지금의 사모님이랑 결혼을 하게 된 거야. 점쟁이가 먼 지역의 여자일수록 좋다고 했거든. 러시아 교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조상님 중에 외국인 혈통도 있다나 봐. 그러니까 충분히 먼 지역의 사람인 거지. 그리고 지금의 사모님이 본인 몫을 아주 잘 해낸 것도 있어. 연달아 아들 둘을 낳았거든. 근데 서른 살 밖에 안 된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 권지안은 후라이를 그녀에게 건넸고 임가영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입안 가득 라면을 넣은 탓에 웅얼거리며 말을 하고 있었다.
  • “주 가 작은 아들 주서온은 외국에 있다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다는 것 같더라고. 엄청 생기발랄하게 생겼더라. 이 누나도 막 설렐 정도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