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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사랑이 부족한 거겠지

  • 권지안은 벙찐 얼굴이었다.
  • 얼마 만에 들어보는 구절이었던가?
  • 윤지석은 그녀에게 해주지 않는 말이었다.
  • 왜냐하면 두 사람은 매일 만나는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 아무리 만나지 않는다 해도 그런 애정표현을 하지는 않았다.
  • 두 사람은 오로지 공적인 이야기만 나눴고 이미 서로에게 한껏 무뎌진 상태였다. 모든 열정을 잃은 것이었다.
  • 그래서 권지안이 인정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해도 그녀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 고인 물에 파란이 이는 정도의 흔들림이었다.
  • 그녀가 넋이 나간 새에 남자는 이미 비좁은 계단 위로 올라섰고 그녀와 같은 높이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 그의 몸에는 샌달우드 냄새와 타바코 냄새가 어우러져 있었고 그의 독특한 청춘의 풋풋함도 배어 있었다.
  • 그로 인해 권지안은 일순간 마음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 그 순간 등 뒤로 유리 문이 열렸고 그녀는 그 틈을 타서 그의 손에 있던 차 키를 빼앗았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도 없이 그녀는 바로 뛰어들어갔다.
  • 그녀는 마치 귀신에게 쫓기는 것처럼 뛰어갔다.
  • 그녀는 단숨에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들어가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도 주서온은 쫓아오지 않았고 그제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몸에는 힘이 풀렸고 손에는 땀을 쥐고 있었다.
  •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임가영이 문 앞에 서있다 권지안을 보게 되었다. 임가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 “어? 너 언제 나갔었어?”
  • “이미 간 거야?”
  • 그녀는 임가영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 “제시카랑 애들이 올빼미에서 나 기다리고 있어. 같이 갈래?”
  • “안 가.”
  • 권지안은 매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람이었다. 그들과 함께 헛짓거리를 하며 시간을 보낼 여유는 없었던 것이다.
  • “저녁에 늦게 들어와서 괜히 자는 거 방해하지 마.”
  • “근데.”
  • 그녀는 권지안의 손에 들린 차 키를 보며 물었다.
  • “대체 차 키는 누가 갖다 준 거야?”
  • “나는 묵비권을 행사할 자격이 있어.”
  • “쳇.”
  • 임가영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 “아주 일중독 변호사 납셨네.”
  • 권지안은 집으로 돌아간 뒤 소파 위로 벌러덩 누웠다. 그러다 핸드폰이 띠링하고 울렸다. 주서온이 카톡으로 사진 한 장을 보내온 것이었다.
  • 그는 등나무 꽃잎을 손바닥 가득 올려두었고 자그마한 꽃잎들은 그의 새하얀 손바닥 위로 얌전히 누워 있었다.
  • 문득 세상이 부드러워진 것만 같이 느껴졌다.
  • 그녀가 사진을 보며 멍 때리고 있던 중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 스팸은 아닌 듯한 번호 배열에 권지안은 전화를 받았다.
  • 그리고 한 여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로 흘러나왔다.
  • “지석 씨, 오늘 저녁에도 안 올 거예요?”
  • 권지안은 핸드폰을 확인했고 틀림없이 그녀의 핸드폰이 맞았다.
  • 윤지석을 찾는 전화가 왜 그녀에게로 간 것일까?
  • 권지안이 물었다.
  • “잘못 거신 것 같은데요?”
  • 여자는 전화 건너편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소리를 질렀다.
  • “정말 죄송합니다. 잘못 걸었네요.”
  • 여자는 빠르게 전화를 끊었다.
  • 권지안은 여자가 전화를 잘못 건 게 아니라 일부러 걸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왜냐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가 권지안에게 카톡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 “죄송합니다, 방금은 잘못 걸었네요. 이것도 인연인데 친구 추가를 해도 괜찮으실까요?”
  • 권지안은 제안을 받아들였고 여자는 웃는 이모티콘을 하나 보내왔다.
  • “정말 죄송해요. 괜히 폐 끼쳤네요.”
  • 권지안은 괜찮다고 하면서 그녀의 프사를 클릭해 카카오스토리를 구경했다.
  • 여자는 스토리를 올리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하루에 수십 개를 올리기도 했다. 대부분은 사진이었고 가방이나 액세서리 그리고 옷을 자랑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은연중에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 함께 찍은 사진도 있었지만 남자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 권지안은 단번에 남자의 목을 알아보게 되었다.
  • 윤지석의 목에는 점 하나가 있었고 사진 속의 남자에게도 같은 점이 있었다.
  • 권지안은 그 사진들을 보며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 그녀는 윤지석에게 딴 여자가 있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여자는 처음이 아닐 것이었다. 아마 몇 명이고 갈아치웠을 것이었다.
  • 이상했던 것은 그녀는 하나도 화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 아마 그녀가 처음 윤지석이 바람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화가 났을 것이었다. 그런데 마주 보며 추궁할 정도로 화가 나지는 않았었다.
  • 그래서 그녀는 왠지 모르게 윤지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 왜냐하면 그에 대한 사랑이 완전히 메말라 있는 상태일 때 질투의 감정조차 느끼지 못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