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12화 나랑 동갑이네요

  • 여자의 이름은 민가희였다. 언젠가 그녀가 윤지석의 카드를 긁고 나서 본인 이름으로 사인을 한 것을 권지안이 보게 된 적이 있었다.
  • 아마 명분을 갖고 싶어서 조급해졌을 것이었다. 그래서 이런 해프닝을 만든 듯했다.
  • 권지안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샤워하러 갔고 샤워를 끝낸 뒤에는 그녀의 엄마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
  • 그녀는 빙빙 돌려가며 권지안에게 근황을 묻다가 윤지석과 싸우지는 않았는지 확인했다. 권지안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 권지안의 엄마가 답했다.
  • “그럼 다행이네, 다행이야.”
  • “엄마, 무슨 일 있어요?”
  • 그녀의 엄마는 하려던 말을 삼키려다 결국은 참지 못하고 뱉었다.
  • “지난번에 지석이가 여자랑 같이 있는 걸 봤는데 엄청 가까워 보이더라고…”
  • “사촌 동생이에요.”
  • 권지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위해 거짓말을 해주었다.
  • “사촌 동생이었어?”
  • 그녀의 엄마는 곧바로 마음을 놓은 말투였다.
  • “어쩐지, 엄마가 괜한 생각을 했네. 지안아, 너희 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결혼은 언제 할 생각이야? 엄마는 손주 기다리고 있는데…”
  • “일단 권지은부터 결혼하라 해요.”
  • “너는, 지은이 이제 스물넷 밖에 안 됐어.”
  • 스물넷, 얼마나 좋은 나이인가.
  • 권지안은 문득 주서온을 또 한 번 떠올리게 되었다.
  • 그 역시 스물넷이었던 것 같았다.
  • “지안아, 시간 날 때 지석이랑 와서 밥 먹고 가. 엄마는 너희 둘이 보고 싶네.”
  • “알겠어요.”
  • 윤지석은 스윗한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고 싹싹하게 굴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권지안의 부모님은 그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 모난 성격의 권지은마저도 윤지석을 형부라고 부르며 잘 따를 정도였다.
  • 윤지석과 헤어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아마 모두가 미래의 그녀의 남편이 무조건 윤지석일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 권지안도 이미 그것에 습관이 되어 있었다.
  • 습관이지 사랑은 아니었다.
  • 하지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반드시 사랑이 있어야 된다고 그 누가 정의를 내렸나. 결국 모든 사랑은 사라질 게 뻔한데.
  • 잠들기 전 그녀는 윤지석의 카톡을 받게 되었다.
  • “모레 발인 날에는 일찍 와야 돼. 오늘 저녁에는 빈소를 지킬 거야. 근데 역시 나 엄청 쩔어. 주 가 사모님이 발인 끝나면 나랑 고문 변호사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기로 약속하셨어.”
  • 쩌는 게 맞긴 했다. 빈소를 지키며 틈을 파고드는 일을 해가는 것을 권지안은 가소롭게 여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 그런데 윤지석은 그걸 전부 해내고 있었다.
  • 그녀는 핸드폰을 옆에 던져둔 뒤 불을 끄고 잠을 청했다.
  • 그리고 그녀는 밤새 등나무 꽃송이에 관한 꿈을 꾸게 되었다.
  • 보라빛이 아른거리며 포도송이 같기도 했다.
  • 셋째 날 아침, 주민웅의 발인 날, 권지안은 일찍이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 윤지석은 그녀에게 미션 하나를 내려주었고 주 가 사모님을 부축하는 것이었다.
  • 주 가 사모님의 옆에는 사람이 넘쳐났고 그녀가 부축할 차례는 오지 않았다.
  • 검게 물든 사람들 무리 속에서 권지안은 주서온을 보게 되었다.
  • 그 역시 검은색 차림이었고 팔에는 상주의 완장을 차고 있기도 했다. 그는 많이 울었는지 눈이 빨갛게 부은 채로 주민웅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었다.
  • 햇빛 아래, 그는 또 다시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은 사진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 억압된 분위기였다.
  • 권지안은 영결식을 지켜보지 않고 밖에 있는 편의점으로 가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샀다. 그리고 한쪽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한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 그녀는 영결식이 치러지는 건물 로비 옆에 있던 화단 앞에서 주서온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무릎을 감싼 채 쪼크리고 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 그녀는 주서온에게서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작은 동물같이 속상하게 흐느끼는 그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원래는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주머니에 티슈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녀는 주서온이 어느 정도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자리에서 일어설 때 티슈를 건넸다.
  • 그는 눈이 빨갛게 부어 있었고 고맙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 티슈를 건네받았다. 그러고 나서 눈가에 올려둔 채로 누르는 모습이었다.
  • 그런데 그의 눈물은 빠르게 티슈를 적셨다.
  • 이러한 상황에서 권지안은 어떻게 그를 위로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 사람은 죽은 뒤에 다시 되살아날 수 없으니 이미 떠난 사람은 보내주고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고 해야 하는 걸까?
  • 그런데 어떤 말을 하든 의미가 없을 듯했다.
  • 주서온은 겨우내 천천히 침착을 되찾았고 목이 멘 소리로 입을 열었다.
  • “우리 형 너무 일찍 갔어요. 올해 스물아홉 밖에 되지 않았는데.”
  • 권지안은 얼떨결에 한마디를 뱉었다.
  • “나랑 동갑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