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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지수는 발 하나가 이미 문턱을 넘은 상태였다. 그녀는 그 상태에서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게 맞는지 아니면 스무스하게 자리를 뜨는 게 맞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 권지안은 이미 그녀를 발견하고 말했다.
  • “갖고 와.”
  • 지수는 고개를 숙인 채 그녀에게 커피를 건넸다.
  • “권변, 설탕이랑 우유 안 넣은 거예요.”
  • “그래.”
  • 그녀는 한 모금 머금었고 너무 써서 뚜껑이 열릴 것만 같았다.
  • “수고했어.”
  • 지수는 커피를 건넨 뒤 바로 나갔고 윤지석은 그 틈을 빌어 대답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대충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떴다.
  • 윤지석이 대답을 하지 않을 것도 권지안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 두 사람의 감정은 언제부터인지 천천히 갉아 먹히며 부스럼이 되어버렸다.
  • 어쩌면 가치관이 달랐던 이유로 사람과 사건을 인지하는 방식이 다른 것일지 모른다.
  • 지금까지 헤어지지 않은 이유는 윤지석이 죽어도 동의를 하지 않은 게 컸다. 그녀가 돈줄이었기 때문이었다.
  • 다른 한편으로는 윤지석이 헤어짐을 사절하는 동안 권지안도 그 뜻을 견지하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 어쨌거나 그녀에게 더 좋은 선택권이 없었다. 윤지석에 대한 사랑이 없는 건 맞았지만 그나마 서로에 대해서 익숙한 것이 컸다.
  • 그녀는 이제 사랑에 대해 희망을 품지 않는다. 물론 그럴 시간도 없거니와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는 것도 귀찮게 느껴질 뿐이었다.
  • 오래전 두 사람에게도 껌딱지처럼 붙어서 꿀 떨어지는 사이를 자랑했던 시기가 있었다.
  • 그렇게 진한 사랑을 했던 두 사람에게도 결국에는 무미건조한 권태기가 찾아왔다. 아무리 새로운 사랑을 찾아봤자 결국에는 옅어지다 사라지는 날이 올 것이었다.
  • 아예 이대로 두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
  • 커피 한 잔을 다 비우기도 전에 업무가 또 떨어지게 되었다. 그녀는 산처럼 쌓인 파일 더미를 확인해야만 했다.
  • 점심에는 닭고기덮밥으로 때우고 발에 불이 날 정도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 그녀는 어렵사리 시간을 내서 음료수 한 잔을 마시게 되었다. 너무 힘들었던 그녀는 관자놀이가 심하게 뛰고 있었다.
  • 권지안은 지수를 불러 근처 백화점으로 가서 선물을 좀 사 오라고 했다.
  • “그 브랜드 있잖아. 새로운 시리즈 나왔던데 스카프랑 치마, 그리고 스카프핀까지 전부 사 와.”
  • 그녀는 지수에게 카드를 건넸다.
  • “그리고 중년 남자가 좋아할만한 물건도 사고.”
  • 지수는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 “담배 아니면 술 중에 고를까요?”
  • “담배는 건강에 안 좋으니까.”
  • 권지안이 말을 이어갔다.
  • “보조제로 하는 게 좋겠다.”
  • “씰오일로 할까요?”
  • 권지안이 웃었다.
  • “알아서 사.”
  • 지수는 카드를 들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거의 퇴근할 때가 되어서 크고 작은 쇼핑백을 들고 돌아왔다.
  • 윤지석도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
  • 지수가 선물을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윤지석이 황급히 권지안에게 말했다.
  • “얼른 나와.”
  • “왜?”
  • “장례식.”
  • 윤지석은 권지안을 일으키며 위아래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 “흠, 여기 검은색 옷 둔 거 있어?”
  • 권지안은 그의 옷차림을 확인했고 어쩐지 그는 검은색의 양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고 흰색 손수건까지 꽂은 모습이었다.
  • 권지안은 바닥에 놓인 선물을 쳐다보았다. 저녁에 윤지석의 집으로 가서 그의 부모님에게 드릴 물건들이었다.
  • “저녁에 너희 집은 안 가는 거야?”
  • “안 가지. 시간 없어.”
  • 윤지석은 권지안을 안으로 밀어 넣으며 얘기했다.
  • “검은색 옷으로 갈아입어.”
  • 누가 죽은 건지 윤지석은 한껏 긴장한 모습이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엄청 부귀한 신분의 사람일 것이었다.
  • 장례식으로 가는 길에 윤지석이 설명해 주었다.
  • “주 가야. 완창 제약 소유주. 그 집 큰 아들이 떠났대.”
  • 주 가는 유명한 집안이었지만 권지안은 잘 알지 못했다. 윤지석은 평소 상류사회의 사람들과 빈번하게 접촉하는 사람이었기에 약간의 변화도 다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 권지안이 물었다.
  • “근데 나는 왜 데리고 가는 건데?”
  • “그 집 큰 아들이 죽었으니까 어르신 유언이 바뀔 거 아니야. 만약 우리가 완창 제약의 고문 변호사가 될 수 있다면 기댈 수 있는 큰 그늘을 얻게 되는 셈이잖아.”
  • “완창 제약이라면 추 변호사네 팀에서 고문 변호사를 맡고 있는 거 아니야?”
  • “내가 듣기로 얼마 전에 둘 사이에 불쾌한 일이 있었다나 봐. 완창에서 팀을 바꿀 생각이라고 하는 것 같더라고.”
  • 주 가 대문으로 들어서기 전 윤지석은 그녀에게 안약을 건넸다.
  • “우는 척 연기 좀 해. 주 가 장자 주민웅이 서른 밖에 안 됐는데 세상을 떠났으니 가족들이 속상할 수밖에 없을 거야.”
  • “사인은 뭔데?”
  • “교통사고로 병원에 두 달 정도 누워있다가 결국에는 떠났지 뭐.”
  • 윤지석은 안약을 그녀의 손에 쥐어 주었고 그새 검은색 양복을 입은 사람이 두 사람을 마주 보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 윤지석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고인 상태였고 그는 큰 걸음으로 다가가 상대방의 손을 잡았다.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