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한 줄기 안 들어오는 음침하고 어두운 수술실, 안 그래도 무겁고 우울한 공기속 병원 소독수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 시각 북받쳐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는 한 여자의 울음섞인,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암울한 분위기의 수술실을 맴돌고 있다.
하얗게 상기된 얼굴과 축 처진 어깨로 힘없이 수술대에 누워있는 허지윤.
늘 누워있던 수술대였지만 오늘은 유독 차갑고 오싹하고 심지어 칼로 생살을 에이는듯 너무도 고통스럽게만 느껴진다.
이제 곧 심장 수술을 받게 될 그녀는 의사 선생님에게 문자 한 통만 보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동안 수차례 같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부재중인 그 번호, 아무도 받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상황에선 창살없는 감옥인 수술실에 떡하니 갇혀만 있어 그녀가 할 수 있는거라곤 기약없는 기다림에 계속되는 절망뿐...
아직은 그나마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고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있으니 더 늦기전에 꼭 이도진한테 문자를 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 문자는 지금보다는 좀 더 나은 다음생을 기약하는 한 줄기 희망, 목숨을 살릴 동아줄과도 같은것이다.
마취제의 약효로 인해 지윤의 눈꺼풀이 자꾸만 무거워진다, 깊은 우울감으로 가득 찬 두 눈, 세상의 고초와 쓴 맛을 모두 겪은 듯 초점없이 흔들리는 암울한 두 눈이 스르륵 감겨지면서 구슬같은 두 줄기의 눈물이 혈색하나 안 보이는 창백한 그녀의 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 문자는 끝내 전송실패... 아니, 아예 전송 자체가 안 되었다.
수술대 옆에 서 있는 의사, 훤칠한 키에 신이 내린 황금 비율을 자랑하는 듬직한 몸매에 날렵한 턱선과 냉철한 눈 빛의 남자는 휴대폰에 글자 하나 입력하지 않고 있었다.
마스크를 내리니 조물주도 뿌듯해할 것 같은 완벽한 비주얼이 유독 더 부각이 된다.
수술대에서 깊은 단잠에 빠진 허지윤을 그윽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그 남자, 말로는 형용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이 그의 눈 빛 사이를 뚫고 나왔으며 남자는 나지막한 소리로 되뇌인다.
“다음생 기다릴 거 없어, 내가 왔으니까.”
말을 마치고 다시금 마스크를 쓰는 이도진.
그는 천천히 두 손을 들어올렸고 수술실 조명에 비추어지니 그의 손길은 유독 날렵하고 현란했다.
정숙.
수술실 밖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아찔한 적막이 맴돌았고 이도진 뒤에는 국내외 각지에서 섭외해 온 엘리트 급 심장치료 전문의 열 몇명이 가지런히 줄을 서 있었다.
흑발, 금발, 카키색 머리에 흑발 백발이 섞인 머리!
그들은 모두 여성이었으며 소식을 접하는 순간 하던 일을 올 스톱하고 이 곳으로 왔으며 심지어 그들 중엔 영국 여왕의 초청까지 거절한 채 산 넘고 바다 건너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사람들도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그 이유는 단 하나, 기적의 순간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극도에 달하는 긴장감,
자꾸만 올라가는 흥분지수,
신의 손으로 불리는 의학계 거장이 집도를 하는 모습을 직접 지켜볼 수 있다는 건 의료계 종사자들의 로망이자 최고의 영광이 아닐수 없다!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목숨을 살리는 등 손길이 닿았다 하면 기적이 척!
“신의 한 수”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차원이 다른 스케일, 사람들은 그를 신의 손이라 부른다.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신의 손!
지고무상의 권리와 힘을 가진 이 남자!
뭘 상상하든 그 이상, 어마어마한 재부를 축적한 이 남자!
혼잡하고 어수선한, 홍해라는 삭막한 벌판에서 그는 질서를 지켜낸 수호자이자 사람들의 무한한 숭배와 총애를 받는 신이다!
그러나 명색이 홍해를 쥐락펴락하는 만능의 신으로 불리는 그가 대체 왜?
어쩌다 이 비좁고 암울한 수술실에 나타난 것일까?
16년 전, 아무런 연고도 없이 돌연사로 세상을 떠난 이도진의 친 형!
친 형을 잃은 아픔과 눈물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설상가상으로 위독한 어머니와 어린 도진은 아버지에 의해 집에서 쫓겨났고 결국 영주에까지 오게되었다.
얼마 뒤 어머니는 지병으로 돌아가셨고 이도진은 몸 둘 곳 하나없는 고아 신세가 되어 길거리를 나돌며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다.
오갈데 없는 처량한 신세에 심지어 미친개한테 미친듯이 쫓겨다녀야만 했던 그 시절,
하루하루 눈물로 세수를 하며 시궁창 밑바닥 인생에서 허덕이고 있을때, 허탈함과 외로움은 점점 절망과 절규로 번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상큼발랄 똥머리를 곱게 땋아올리고 청순미 뿜뿜 꽃무늬 원피스를 차려입은 한 어린 소녀가 도진의 앞에 나타났다.
작은 막대기 하나를 손에 꽉 부여잡은 그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친개 앞에서 분명 자기도 무서울텐데 그래도 용기를 내서 용맹하게 미친개를 쫓아버렸다.
그러고는 도진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갔다.
작고 아담한 지윤이네 집, 부유하고 잘사는 집은 아니었지만 남루한 옷차림에 거지행색을 하고 다니는 이도진을 그녀의 가족들은 따스하게 보듬어주었다, 참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이도진에게는 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밑바닥 인생에 다시금 삶의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 준 터전이나 다름없다.
매운맛, 쓴맛, 신맛으로만 가득했던 이도진의 씁쓸한 인생이 허지윤으로 인해 점차 단맛이 추가되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도진에게 있어서 가장 포근하고 행복했던 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풋풋하고 순수했던 그 시절의 어린 남녀는 어느새 서로에 대한 감정이 점차 깊어졌으며 급기야 평생을 서로의 동반자가 되어주기로 약속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날, 이도진은 우연히 한 늙은 거지, 즉 그의 스승님을 만나게 되었다.
늙은 거지는 허지윤은 선천성 심장 질환으로 인해 단명할 운명이며 25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을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이도진은 무슨 일이 있어도 허지윤을 살리리라 마음 먹었다!
그 뒤로 늙은 거지와 함께 배를 타고 먼 길을 떠난 이도진, 그가 떠나는 날 허지윤은 자신이 가장 아끼던 보물1호인 초콜릿 박스를 도진에게 선물했고 도진은 그녀에게 자신의 어머니의 연락처를 주며 무슨 일이 있으면 어머니를 찾아가라는 당부를 남긴 채 떠났다.
배가 떠나기 직전까지도 이도진은 허지윤의 손을 꼬옥 잡고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이도진과 늙은 거지는 홍해로 떠났다, 드넓은 땅에 자원이 풍부하여 살기좋은 풍요로운 지역으로 알려져있지만 화려한 겉모습 뒤에 숨은 추악한 실체라고 해야 하나? 비옥한 토지 자원만큼이나 혼잡했고 하루가 멀다하게 터지는 전쟁에 사람들은 늘 초조함과 불안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도진이 홍해 땅을 밟은지 5년, 그동안 그는 몸을 사리지 않고 과감히 전쟁에 맞섰으며 용맹하게 싸워 적들을 때려눕혔다!
눈물로 세수를 하며 살아오던 밑바닥 인생은 뒤로하고 이젠 적들의 피로 손을 씻을 만큼 전쟁터의 에이스가 된 이도진, 그 용감한 소년이 고작 15세밖에 안 된 어린 남자애였으니!
드디어 18세가 되던 해, 이도진은 자신을 가로막던 모든 장애물을 돌파하고 홍해 바닥을 공식적으로 지배한 지고무상의 신이 되었다!
사람을 죽이던 손으로 다시 사람을 살리는 이도진!
과거 전쟁터에서 총과 칼을 잡고 용맹하게 싸우던 이도진의 손에 오늘날 쥐어진 것은 전쟁 칼이 아닌 수술칼!
그동안 이도진은 일반 백성들부터 귀족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병치료를 도와왔으며 어느새 의학계를 본격적으로 주름잡은 업계에서 알아주는 신의 손, 신의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다.
심지어 잘나가는 재벌집이나 나라 대통령이 이도진의 진료를 예약하려 해도 쉽게 진료를 받을 수 있는게 아니라 이도진의 컨디션과 기분을 봐야 했다!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정상의 자리에까지 오른 이도진, 오늘날 명실상부 의학계의 신, 의신으로 높이 떠받들리고 있다!
어디 그 뿐이랴, 홍해 바닥에서도 떴다하면 대박을 치는 이도진은 홍해의 신, 홍신으로도 통한다!
그가 손가락 까딱해도 세상을 휘여잡고 움직일 수 있다는 전설이 돌 정도이다!
그런 그가 돌아왔다! 드디어 돌아왔다!
...
살랑살랑 기분좋게 불어오는 바람에 새하얀 커텐이 하늘하늘 춤 추듯 흩날리고 허지윤의 검실검실 긴 생머리에도 바람결이 스쳐지나고 있다.
깊은 단잠에 빠진 허지윤을 보며 푸근한 아빠 미소를 짓는 이도진, 그가 웃었다.
다행히 수술은 아주 성공적으로 잘 마쳤고 허지윤도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허지윤은 선천적으로 일반인에 비해 심장벽이 얇았고 수술을 통해서 보완하거나 증강을 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니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제 앞으로 한 동안은 홍해의 의신이신 이도진이 항시 그녀의 곁을 지켜주는 수호천사가 되어줄 것이다, 단 허지윤에게 정체를 절대 들키지 않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이도진이 정체와 신분을 숨겨야만 하는 이유는 딱 두가지이다,
첫째, 그가 홍해를 떠났다는 소식이 절대 밖으로 누설되어서는 안 되니까.
홍해 바닥을 쥐락펴락하는 의신이 홍해를 떠났다는 소식이 알려지는 순간 파장은 일파만파로 커질 것이며 여기저기에서 관심을 가져올 것이 분명한데다 심지어 허지윤까지 원치않는 스포트 라이트와 지나친 세간의 관심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될 경우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한 허지윤에겐 오히려 약이 아닌 독이 될 것이다!
둘째, 이번에 귀국을 하면서 이도진은 사실 엄청난 미션을 짊어지고 왔다.
당시 이도진을 데리고 해외로 나갔던 늙은 거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죽기 전에 유언을 남겼고 이도진은 그의 유언을 들어줘야 했으니까.
그의 유언을 들어줄 때까지 절대 이도진의 정체를 들키면 안 된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던 이도진은 호주머니에서 무려 16년을 보물단지처럼 아껴오던 초콜릿 박스를 꺼내보았다.
그때 허지윤을 떠나던 날, 허지윤은 친 자식처럼 아끼던 보물 1호 초콜릿 박스를 이도진에게 선물했고 어쩌면 그것은 영원히 함께 하자던 두 사람의 약속을 절대 잊지 말라는 당부의 메시지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초콜릿 하나를 꺼내 입에 넣고 천천히 음미하면서 씹어먹었다.
다양한 맛의 초콜릿을 즐겨먹는 이도진이지만 긴 세월동안 초콜릿 박스만은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매번 기쁘거나 긴장할때면 어김없이 초콜릿을 먹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았던 이도진이다.
부드럽고 달콤한 초콧릿의 식감은 늘 긴장을 풀어주는 밀방이자 묘약이 되어주었다.
그렇다면 초콧릿을 입에 물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이도진의 기분은 어떤걸까?
기쁨?
아니면 긴장?
이도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었고 그동안 수많은 생명을 살려온 신의 손으로 정교하게 예쁜 허지윤의 얼굴을 살살 쓰다듬었다,
“덜컥!”
그 시각, 예고없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한 쌍의 중년 부부.
남자는 휠체어에 앉아있었고 부인이 휠체어를 밀고 들어왔다.
그들은 바로 허지윤의 부모님들이셨다.
허지윤의 완벽에 가까운 비주얼은 빼박 부모의 우월한 유전자를 이어받아서였다.
이날 해당 사립병원의 병원장도 허지윤 부모님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이틀 전, 이도진은 2조원에 달하는 거금을 들여 이 사립병원을 매입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약혼녀 허지윤에게 가장 쾌적하고 아늑한 치료 환경을 마련해주기 위해서!
다만 하늘도 매정하지, 이도진의 극진한 보살핌과 정성어린 관심도 무색해지게 허지윤의 수술 성공율은 고작 5%!
어쩌면 수술실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그녀의 인생은 시한부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의 병세를 안정시킨 건 다름아닌 이도진, 의학계에서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거창하게 장식할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을 바로 신의 손인 이도진이 만들어낸 것이다!
수술실에 외부인들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무도 없었다면 원장은 아마 이도진 앞에 무릎을 백번도 더 꿇었을 것이다!
업계에 길이 남을 위인의 위대한 탄생, 도진은 분명 사람이 아닌 신이 틀림없다!!
“의사 선생님, 우리 딸 아직도 안 깨어났습니까?”
허명섭이 초췌해진 얼굴로 애처롭게 이도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집안,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고 하지만 대체 암흑하기만 한허명섭네 가족들은 언제쯤이면 희망의 빛 줄기를 볼 수 있을지?
이미 보름 넘게 제대로 된 잠 한 번 자보지 못한 허명섭,
이도진은 휠체어에 앉아있는 허명섭의 다리를 눈으로 빠르게 스캔하더니 곧바로 결단을 내렸다.
저 다리는 반드시 치료할 수 있어!
“이 시간이면 깨어날 때도 되었는데.”
바로 그때 병상에 누워있는 허지윤의 나지막한 신음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아...”
“우리 지윤이가 깼어요!”
유옥분은 냉큼 허지윤의 병상 앞으로 달려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고 길고 가는 눈초리가 파르르 떨리더니 허지윤이 눈을 떴다.
“엄마?”
“아이고, 지윤아, 우리 딸!”
“드디어 깼구나!”
역시 신의 손 이도진, 심장 수술을 마친 뒤 며칠을 잠이 든 상태로 깨어나지 못하다가 드디어 눈을 떴지만 이도진의 뛰어난 의술 덕분에 허지윤은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컨디션도 예전에 비해 훨씬 좋아져서 말을 하는데 생기가 돌 정도였으니 말이다.
허지윤은 이도진을 빤히 쳐다보았고 이도진도 그녀를 보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푸근하게 웃는 이도진의 모습을 보며 허지윤은 왠지 낯설지 않은 반가움을 느꼈다.
“저기, 누구시죠...?”
“이도진이라고 합니다.”
이, 이도진!?
너무도 익숙한 이름 석자에 화들짝 놀란 허지윤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도진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