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희는 몸을 홱 돌리더니 눈을 커다랗게 부릅뜨고 이 상황이 전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씩씩대며 민지훈을 노려보았다.
“야, 민지훈, 네까짓게 뭔데? 무슨 자격으로 사람을 치우라 마라야?”
최영도까지 합세 해 펄쩍 뛰며 갖은 행패를 부렸지만 민지훈은 동네 멍멍이가 짖는 듯 그들을 아예 무시하고 그저 매니저를 지긋이 쳐다볼 뿐이었다.
이내 알았다는듯이 굽신거리며 고개를 연신 끄덕이던 매니저가 말했다,
“예, 예, 민지훈 님, 10분 안에 깔끔하게 다 정리하겠습니다, 웨이터들 총 동원해서 정성껏 모실테니 부디 양해 바랍니다!”
주먹 하나는 족히 들어갈 것처럼 입을 떡 벌린채 아무말도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버린 윤소희.
“나 선샤인 주얼리 외동 아들이라고, 누가 감히 날 내 쫓아...”
“손님, 정중히 말씀드리지만 어서 자리를 비켜주시지요, 계속 버티시면 경찰 부르겠습니다.”
차분하고 온화한 말투지만 날카로운 비수가 서린 듯 냉철한 매니저의 목소리.
“잠깐!”
그 순간 민지훈이 손을 번쩍 들더니 허스키한 보이스로 매니저에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 이 테이블이랑 의자, 저 사람들이 이미 앉았으니 난 손도 대기 싫어지네요...”
“예, 그럼요, 당장 폐기 처분하고 지금 바로 새것으로 교체해 드리겠습니다!”
매니저는 몸을 사려가며 더더욱 공손하게 말했다.
“민지훈, 너 뭐하자는 거냐?”
윤소희는 당장이라도 민지훈을 갈아마실 듯 눈을 부라리며 나무랐다.
그러자 민지훈은 차가운 얼굴로 피식 웃더니 딱 잘라 말했다.
“네가 더러워서...”
“뭐...”
화가 머리 끝까지 났지만 정작 아무것도 못한 채 당하기만 해야 하는 윤소희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발만 동동 굴렀다.
그 시각 분노를 억제 못하고 씩씩대는 최영도는 이를 악물고 경고하는 말투로 말했다.
“좋아, 민지훈, 대체 언제까지 잘난척 할 수 있나 내 지켜본다, 그 카드 어느 쓰레기통에서 주워온 건지 모르겠지만 경찰 오면 곱게 조사 받을 준비나 하셔!”
그러거나 말거나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민지훈, 그는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살짝 웃어보이며 묵직한 한 마디를 던졌다.
“꺼져...”
“너 두고보자!”
이미 멘탈이 쏙 빠져 너덜너덜해진 최영도는 윤소희의 손목을 잡고 도망치듯 레스토랑을 나섰다.
그리고 더블유는 약속대로 10분 안에 모든 손님들을 내보내고 테이블과 의자 세트도 새것으로 교체했으며 몇 십명의 웨이터들이 민지훈의 룸 양 켠에 꿋꿋이 서서 항시 대기하도록 조치했다.
박효신과 친구들은 고개를 돌려 민지훈을 쳐다보는데 하나같이 믿기지 않는 듯 놀란 표정이었다.
예고없이 갑작스레 벌어진 일, 생각지도 못했던 전세 역전에 애들은 이게 대체 꿈인지 생시인지 서로를 멍하니 쳐다보며 상황 파악을 하기 힘들어했다. 특히 박효신은 오늘 제대로 망신 당하고 여기서 쫓겨날 줄 알았지만 예상외로 오히려 기고만장 끝판왕 최영도와 윤소희에게 빅 엿을 먹이는 쾌감까지 만끽했으니 더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훈아, 너 언제 이렇게 멋있어진 거야?”
지훈은 씩 웃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별 거 아니야, 어제 식당에서 알바할 때 어떤 손님이 흘리고 간 가방을 주었는데 마침 그 안에 이 집 VIP카드가 있더라고, 손님 분이 나한테 고맙다며 카드를 며칠 빌려주셨고 게다가 팁까지 200만원이나 챙겨주셨어...”
“대박, 나도 너네 식당 가서 알바나 할까봐...”
룸메이트인 오태석이 기회를 놓칠세라 끼어들었다.
“그래, 그래, 거기 알바생 더 안 뽑는대?”
“알바생은 무슨, 나 하나면 충분하니까 생각도 하지마!”
민지훈이 허허 웃음을 보이며 말하자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가득찬 박효신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 그래...”
“야, 밥이나 먹어...”
민지훈은 애들을 다독이며 피식 웃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애들은 냉큼 메뉴판을 집어들고 음식을 주문했다.
저녁 식사는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고 애들은 오래간만에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호강했다, 더블유 스페셜 메뉴로부터 시작해 갖가지 산해진미들을 마음껏 즐기며 맛있는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뒤 230만 원이나 나온 밥 값을 보며 박효신은 입이 떡 벌어졌다.
든든하고 맛있는 한 끼를 즐긴 친구들은 학교로 복귀했고 민지훈은 VVIP카드를 손에 쥔 채 마음속으로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방금 전 윤소희를 대하던 본인의 태도, 생각할 수록 짜릿하고 쾌감이 느껴졌다. 비록 한 끼 밥 값으로 230만 원이나 소비했지만 2300만 원을 쓴 것보다 속이 더 후련했다.
위잉 위잉...
교문에 들어서기 바쁘게 민지훈의 휴대폰 진동소리가 울렸고 전화를 받은 민지훈은 본의 아니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고막을 자극하는 챙챙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아닌 임지영.
“민지훈, 너 뭐하는 놈이야? 네 멋대로 안 온다면 다야? 대체 일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하기 싫으면 당장 그만 둬! 일 하려는 애들 줄 섰으니까!”
임지영이 다짜고짜 욕을 들이 퍼붓자 민지훈은 난감하다는 듯 게면쩍게 대꾸했다.
“당연히 일 하지! 그렇지만 나 오늘 휴가냈는데? 임지영 님 설마 모르셨습니까?”
분노가 치밀어 올라 어쩔 줄 모르는 임지영은 더더욱 날카로운 목소리로 마구 쏘아붙였다.
“누가 휴가 허락했는데? 지금 당장 튀어와, 안 오면 앞으로 다신 여기 얼씬도 하지 말고, 참 어이가 없다, 우리 엄마 아빠는 대체 너 같은 놈을 뭘 믿고 매달 월급 50만원 씩 꼬박꼬박 챙겨주냐 말이야, 너 그 돈 받아서 부자 될 것 같냐? 착각하지 마...”
임지영, 그녀는 민지훈이 알바하는 작은 식당 집 딸이다. 평소에 하도 오냐오냐하게 키운 탓인지 천방지축 안하무인, 자기 꼴리는 대로 세상 참 편하게 사는 그녀, 게다가 그나마 있던 싸가지까지 밥 말아드신 탓에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한텐 한없이 약해지는 것이 그녀의 특기이다. 신분 높은 사람 앞에서만 소녀 감성 뿜뿜, 예의바르고 수줍은 숙녀로 급 변신하는 것은 그녀의 안 비밀.
입만 열면 걸레를 물었는지 온갖 욕설을 다 들이 붓는 임지영의 모습을 민지훈은 그동안 참 많이 봐왔었던 터라 내심 화를 가라앉히며 꾹 참고 있던 참이다.
“내가 돈이 많은지 없는지는 내가 제일 잘 알아, 굳이 네가 안 가르쳐줘도 되거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임지영과 달리 민지훈은 너무도 차분하게, 하지만 차갑게 쏘아붙였다.
“야...”
민지훈의 태도에 더더욱 화가 치밀어 오른 임지영은 한 술 더 떠서 발끈했다.
“민지훈, 네가 진짜 뭐라도 된 것 같지? 경고하는데 너 오늘 저녁에 안 오면 앞으로 다신 올 생각 하지마!”
전화를 끊은 민지훈은 무척이나 화가 났다.
“지훈아, 누구야?”
옆에 있던 박효신이 묻자 민지훈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임지영!”
그러자 박효신은 놀란 표정을 가리지 못하며 다그쳐 물었다.
“혹시 그 외국어과 얼짱 임지영?”
민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임지영이 성격은 참 지랄 맞지만 얼굴은 웬만한 아이돌 뺨 칠 만큼 예뻐서 한국 대학교에서도 미모 원탑으로 알아주는 얼짱이다. 언젠가 할 짓 없는 애들이 모여 쑥덕거리더니 임지영을 한국 대학교 외국어과 얼짱으로 임명했고 그것은 그녀에 대한 사모이자 존경이었다.
“너 이제는 임지영과도 엮인 거냐?”
박효신은 놀라움 반 부러움 반 섞인 얼굴로 민지훈을 놀리듯 말했다.
“오올, 민지훈 대박인데? 한국 외대 여자랑 헤어진지 얼마나 됐다고 이젠 임지영까지? 너 여자복 터졌구나!”
그 말에 민지훈은 표정 관리를 못했고 어색한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사실 임지영과 엮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저 임지영네 식당에서 알바나 하는 입장인데. 그렇다고 그걸 일일이 박효신한테 다 해명할 의무는 없으니 차라리 모른 척 말을 안하는게 약이다.
기숙사로 돌아온 민지훈은 침대에 누워 양 손으로 뒤통수를 감싸고 천정만 물끄러미 쳐다봤다.
방금 전 발생한 일, 마치 긴 꿈을 꾼듯 아이러니하면서도 너무 웃긴 상황이었으니까.
까놓고 말해서 모든게 돈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그 놈의 돈만 아니었어도 이렇게까지 난장판이 되진 않았을텐데! 그나마 다행인건 이로 인해 사람들의 가식 뒤에 숨겨진 민낯을 철저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는 것,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더 밑바닥까지 안 갈수 있었던게 천만다행으로 느껴졌다.
한 때 사랑했던 윤소희, 그저 인생에 스쳐지나가는 웃음거리로 보면 된다, 앞으론 그 어떤 식으로도 그녀와 엮일 일이 없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민지훈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고 이제 잠이나 한 잠 푹 자려고 몸을 옆으로 돌리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듣보잡에 싸구려 휴대폰은 이미 벨소리 기능을 잃은지 오랬다, 진작에 새 것으로 바꿔야 했지만 그동안 윤소희에게 매달 용돈을 챙겨주려다보니 정작 자신은 휴대폰을 바꿀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이 타이밍에 어울리지 않게 울리는 휴대폰을 보자 민지훈은 흠칫했다.
윤소희에게서 온 문자, 그걸 보는 민지훈의 얼굴 빛은 급 어두워졌다.
“민지훈, 나 다 알았어, 너 그 VVIP카드 주어온 거라며? 언젠간 주인한테 돌려줘야 하잖아! 세상 잘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결국 남의 카드를 가져다가 내 앞에서 유세 떤 거였어? 네가 하는짓이 다 그렇지 뭐, 너라는 인간 정말 지긋지긋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