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현경이 람보르기니를 어찌나 빨리 몰던지 눈 깜짝할 새에 그들은 거리에서 사라졌다. 조수석에 앉은 민지훈은 왠지 쓸쓸한 표정이었다. 윤소희를 직접 보고 공격했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지기도 했으나, 예전 일들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가 그의 마음 깊은 곳은 불편함이 있었다.
실패로 끝난 사랑은 어쩌면 그의 인생에서 더는 사랑에 기대치 않고 단념하게 된 한 번의 수업과도 같았다.
“민 사장님, 방금 제 연기 어땠나요?”
배현경이 웃으며 묻자 민지훈도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주 좋았죠. 고마웠어요.”
“이젠 제 고용주이시니 말씀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사장님 걱정 덜어드리는 건 당연한 건데 고맙다니요.”
배현경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민지훈은 한결 편안 해진 기분이었다. 심지어 눈을 감고 그녀의 목소리를 감상하는 기분이었다.
“그분은 전 여자친구신 가요?”
“그렇죠. 과거형이죠!”
민지훈이 두 손을 가로저으며 말했다.
“제가 보기에도 그랬어요! 민 사장님 같은 대단한 분께 그런 여자가 어울릴 턱이 있겠어요? 여자친구 필요하시면 제 주변에 많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카리스마 있는 스타일, 아기 같은 스타일, 청순, 귀여운 스타일 다 있어요. 아무나 고르셔도 방금 그 여자보다는 백배는 나을 거에요!”
배현경은 웃으며 말하면서도 민지훈의 기색을 살폈다.
“다 싫으시면 저는 어때요? 사장님보다 나이는 조금 많지만 저는 사람 챙길 줄 알거든요!”
처음 민지훈을 볼 때 그녀는 이런 가세를 가진 사람이 무얼 좋아할 줄 몰라 매우 긴장했었다. 그러나 식당에서 민지훈이 아직 순수한 사내라는 것을 알고 난 후 그녀도 긴장을 떨쳐버렸다. 민지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어색하게 말했다.
“됐어요, 한동안은 조용히 지내고 싶어요!”
배현경이 장난스럽게 살짝 민지훈을 흘겨보자 민지훈이 멈칫하더니 크게 웃었다. 그러자 그녀도 민지훈을 따라 크게 웃었다.
이내 차를 한 카페 앞에 세우고 민지훈과 배현경이 차에서 내려 카페로 들어갔다. 자리를 잡은 후에 그녀는 들고 있던 서류를 민지훈에게 건네었다. 그는 서류를 받고 훑어 보고는 별다른 문제를 발견하지 못해 그대로 자신의 이름을 적고 서명했다.
두 사람이 화기애애하게 떠들다 보니 해질녘이 되어서야 카페를 나섰다. 민지훈은 그녀가 데려다 주는 것을 거절하고 혼자 거리를 따라 강성대 쪽으로 걸어갔다.
이 일 년 간 그는 먹고사는 일에 바빠 강성 근처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 사실 강성의 풍경은 아주 아름다웠다. 특히 지금처럼 등불이 막 켜질 때쯤엔 사람을 취하게 하는 황홀함이 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아마도 이 분위기에 빠져들었겠지만, 민지훈은 취해 사는 삶을 애써 벗어난 사람이었다. 일 년간의 방황 후에야 자신의 신분을 회복했으니,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
가다 서다 하며 많은 풍경을 보니 민지훈의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이때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이 민지훈의 귀를 사로잡았다.
먼발치의 호숫가에서 사람들이 둘러 모여 무언가를 가리키며 말하고 있었다. 수면에 사람의 형체가 거품을 내뿜고 있는 모습이 무섭게 보였다.
‘누가 뛰어들었나?’
민지훈도 놀라서 급히 뛰어갔다. 주위에선 비명 지르는 소리가 들렸고, 호수 안에는 확실히 사람이 있었다. 멀리서도 사람이 빠진 것이 확실히 보였다. 민지훈은 생각할 새도 없이 옷을 벗어 던지고 물 위로 몸을 날렸다.
사람들도 순간 놀랐다가 이내 헤엄쳐 가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를 응원했다. 민지훈의 어릴 적에 전문 수영 강사에게 수영을 배웠기 때문에 실력이 뛰어났다. 물속에서는 특히 냉정함을 유지하였다. 두 손을 앞으로 내뻗으며 수영하는 모습이 마치 헤엄치는 물고기 같기도 했다.
그가 빠르게 물살을 갈라 물에 뛰어든 사람에게 다다르자, 그는 허우적거리고 있는 여자의 등 뒤로 가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건드리지 마, 죽게 해줘.”
민지훈은 말을 할 힘도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 발을 열심히 움직여 속도를 냈다. 보기에는 빨리 진행되는 듯했으나 민지훈은 사지에 힘이 빠지는 걸 느끼고 있었다. 물 속에서 탈진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뭍에 다다른 민지훈은 호숫가에 있던 돌을 잡고 여자를 있는 힘껏 끌어당겨 뭍으로 올리고서는 옆에 앉아 거칠게 숨을 쉬었다.
“건드리지 마, 죽게 내버려두란 말이야!”
“죽는다고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죽는 것도 두렵지 않는다면 뭐가 더 두려우세요? 살아가면서 뭐가 죽음보다 두렵겠어요?”
민지훈은 여자의 손목을 잡고 외쳤다.
“어서 일어나세요!”
“왜 저를 구하셨어요...?”
여자는 온몸이 축축 젖은 채로 하염없이 울며 말했다. 민지훈은 그런 여자의 얼굴을 보다가 무언가 발견한 듯 순간 멈칫했다.
“뭐야...? 너였어?”
“민지훈?”
김유영도 놀라 잠시 멈칫했다 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민지훈은 당황했지만,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물에 뛰어들기 전에 벗어 둔 옷을 집어 들고 김유영을 끌고 멀리 뛰기 시작했다.
“잠시만요. 멈춰주시겠어요? 저희는 강성 일보 기자입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시겠어요?”
“정말 좋은 분이십니다. 성함 좀 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민지훈은 짜증 난다는 듯이 옷으로 자신과 김유영의 얼굴을 가린 채 빠르게 군중 밖으로 달아났다. 계속 호숫가를 따라가다 보니 아주 멀리 까지 오게 되었다.
김유영은 달리면서도 울음을 멈추지 않아 눈이 이미 많이 부어 있었다. 민지훈은 더는 누가 쫓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김유영을 보고 말했다.
“대체 왜 그랬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았어?”
김유영은 땅 위에 쪼그려 앉아서 고개를 떨군 채 계속 울고 있었다. 민지훈은 그녀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몰라 한숨만 쉴 뿐이었다. 김유영은 그와 같은 반 학생이다. 반에서는 공부도 잘해서 계속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얼굴에 여드름이 나서 예쁘진 않지만, 성격은 친절하고 좋았다.
민지훈은 평소에 그녀와 별로 대화를 하지 않았다. 몇 번 해본 대화도 학급회의 때 했던 대화뿐이었다. 나중에 소문으로 그녀의 가정환경이 매우 좋지 않아서 매년 생계비 지원을 받는다고 들었다. 이런 사실 때문에 김유영은 열등감이 있고, 배짱도 없어 평소에 목소리도 아주 작았다.
‘이런 여자가 물에 뛰어들었다고?’
“무슨 일인데 그래?”
민지훈이 호숫가에 앉아 힘이 빠진 모습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김유영은 여전히 울고 있었다. 민지훈은 그녀를 보았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정말 슬픈 건지 아닌지 조차 알 수 없었으니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말 좀 해봐. 무슨 일인데 그러는데?”
김유영은 놀라서 흠칫하더니 몸을 떨기 시작했다. 민지훈은 더 거칠게 말했다.
“말 안 할 거면 혼자 여기 있든가. 여기 나쁜 사람들 많이 다녀. 운 나쁘면 변태들 만나서 너한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