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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오셨습니까, 도련님!

  • 민지훈은 상처 받아 피가 줄줄 흐르는 마음을 애써 부여잡고 가까스로 말을 내 뱉었다.
  • “나도...할 수 있어!”
  • “뭐? 네가?”
  • 그러자 윤소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고 잔뜩 오버하는 표정으로 민지훈을 째려보며 콧 방귀를 뀌었다.
  • “대체 그 놈의 잘난 척은 언제까지 할 셈이야? 진짜 뭘 믿고 그러냐? 너 돈 한 푼 없는 거지인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밥 사먹을 돈도 없는 가난뱅이 주제에 어디서 유세야? 내가 원하는 삶 넌 죽었다 깨어나도 나한테 못 줘. 아마 내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를걸? 하긴...인생 자체가 시궁창인 네가 뭘 알겠냐?”
  • 화가 머리끝까지 난 민지훈은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고 곧 뚜껑이 열릴 것만 같았다.
  •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꺼져, 어디 가서 나 안다는 얘기도 하지마...”
  • 있는 정 없는 정 다 떨어지게 만드는 윤소희, 뻔뻔하고 당당한 얼굴로 교문 밖을 가리키며 민지훈에게 호통을 친다.
  • 곧이어 최영도가 거들먹거리며 걸어오더니 동네 양아치인 양 민지훈의 얼굴을 찰싹찰싹 두드리더니 목소리를 한껏 내리깔고 조소하듯 말했다.
  • “왜? 억울해? 억울해도 소용없어, 그러게 누가 가난하래? 그러니까 왜 돈이 없냐고? 세상은 말이야, 돈 있는 자들이 움직이는 대로 돌아가는 법이거든, 그거 알아? 난 오늘밤 저 여자랑 신나게 놀아날 수 있어, 왜냐? 난 돈이 있으니까. 넌 없잖아?”
  • 민지훈은 최영도를 노려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 “그렇게 노려 본다고 뭐가 달라지나?”
  • 최영도가 하하 큰 소리를 내고 웃으며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한껏 목청을 높여 말했다.
  • “어이, 민지훈이, 낯빛이 너무 어둡다? 몇 끼 굶은 사람같아, 밥은 먹고 다니냐? 그래, 내가 자비를 베풀 테니 무릎 꿇고 큰 절 세 번만 해봐, 그러면 식권 몇 장 던져줄게, 어때?”
  • 이미 마음의 상처가 깊을 대로 깊어진 민지훈은 모든걸 단념한 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필요 없거든요!”
  • “오빠, 가요...”
  • 민지훈의 축 늘어진 꼬락서니를 한시라도 더 보고싶지 않은 윤소희는 최영도의 손을 잡고 교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 마치 경기에서 이긴 사람처럼 시뚝해진 최영도는 민지훈 놀리기에 제대로 재미를 들였고 한 술 더 떠서 아예 학생들에게 광고를 해댔다.
  • “학생 여러분, 여기 좀 봐주세요, 이 분은 한국 대학교 학생인데 툭 털어봤자 먼지밖에 없는 빈 털터리랍니다! 밥 먹을 돈도 없는 놈이 감히 우리 과 원탑 미녀를 넘보지 말입니다, 이런 놈을 두고 지 주제도 모른다고 하죠?”
  • 지나가던 학생들의 시선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민지훈한테 쏠렸고 하나같이 시답잖은 시선으로 지훈을 벌레보듯 쳐다봤다.
  • “한국대 애들 낯짝이 원래 저렇게 두꺼웠나?”
  • “돈도 없으면서 무슨 연애를 한다고? 넘 볼 걸 넘봐야지, 참 나...”
  • “내 말이, 생긴 것도 딱 기생 오라비처럼 생겨 가지고, 주제를 모르네, 우리 윤소희 여신님께서 어떻게 저런 놈이랑 사길리가 없지.”
  • 잔뜩 신이 난 최영도가 윤소희를 품에 껴안은 채 깔깔 웃으며 말했다.
  • “자기야, 우리 오늘 밤에 재미있게 놀다 오자, 내가 돈 많은 애들 몇 몇 소개해 줄게, 그리고 시간이 늦으면 들어오지 말고 내가 좋은데 데려가줄게, 단 둘이 오붓한 시간 보내자...”
  • “아앙, 오빠도 참!”
  •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버린 민지훈은 두 남녀의 하하호호 신나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마음은 깨진 유리 조각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 내가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던 여자친구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모든 걸 다 내줄만큼 지켜주고 싶었던 그녀가 왜? 그녀를 위해 구 씨 집안과의 혼인 약속도 무산 시켜버렸건만, 고작 돈 때문에 다른 남자 품에 안겼다고?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 생각할 수록 지독한 허탈감에 헛 웃음이 절로 나는 민지훈, 매일과 같이 보고 듣던 이 익숙한 세상이 점점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심한 소외감이 들었다.
  •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민지훈인데 고작 돈, 개도 안 먹는 돈 앞에서 공든 탑이 무너지듯 와르르 무너져버린 내 사랑, 갖은 모욕과 모독까지 다 당하며 마지막 남은 자존심조차 무참히 짓밟혀 버렸다.
  • 그 시각, 민지훈의 아픈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하늘에서는 비가 뚝뚝 내리기 시작했고 쏟아지는 비는 민지훈의 얼굴에 이따금씩 떨어졌다, 흥분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겨우 마음을 추스른 뒤에야 한국 대학교로 발걸음을 옮기는 민지훈.
  • 기숙사에 돌아 온 민지훈은 저금통 안에 들어있던 꼬깃꼬깃 잔돈들을 끌어모았다.
  • 천 원, 오 천원 가끔 가다 만 원짜리도 보인다... 그나마 제일 큰 금액이 만 원에 제일 적은 금액은 십 원짜리 동전들, 이 돈들을 다 끌어 모아봤자 오 만원도 안 됐다.
  • 이 돈들은 민지훈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아글타글 모아 둔 것이다, 사실 오십 만원 정도 모았었지만 윤소희를 위한 여신절 선물 목걸이를 구매하느라 사십 만원을 썼고 꽃 다발 오만원까지 쓰다보니 지금 남은 전 재산이라곤 저금통에 남은 동전 몇 잎에 꼬장꼬장 지폐 다 합해봐야 오만원이다.
  • 그 때 기숙사 문이 열리더니 룸메이트인 박효신이 들어왔다.
  • “지훈아, 너 소희랑 헤어졌다며?”
  • 민지훈은 고개를 푹 떨군 채 힘없이 끄덕였고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한국 대학교와 한국외대가 서로 가까이 있다보니 한국외대에서 터진 이슈는 지금쯤 이미 한국 대학교 캠퍼스 전체에 퍼질대로 다 퍼졌을 것이다, 그러니 박효신이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에 대해 민지훈은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 “나 걔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넌 한 푼이라도 아끼겠다고 하루 한 끼만 먹어가며 소희한테 옷이며 화장품이며 다 사줬는데, 걔는 속물같이 이제 와서 돈 많은 놈한테 들러붙어서 널 엿먹이잖아! 사람을 얕봐도 유분수지! 바람 피운 년 놈들 내 절대 가만 안 둬!”
  • “하지마!”
  • 민지훈은 긴 한숨을 내쉬며 흥분한 박효신을 막아섰다.
  • “하지마? 야, 민지훈, 너 바보냐?”
  • 민지훈의 말에 박효신은 더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 “돈 사십 만원 정도 쓴 거?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게다가 사십 만원에 한 사람의 진짜 모습을 철저하게 알았으니 그걸로 충분해, 어쩌면 나한텐 좋은 일이야!”
  • 화가 잔뜩 나서 펄쩍 뛰는 박효신한테 민지훈은 무척 차분하게 말했다.
  • “민지훈, 너...”
  • 박효신은 주먹을 불끈 쥐고 사나운 눈초리로 민지훈을 노려보았다.
  • 민지훈은 체념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크게 위안을 받았다, 사랑하는 여자 윤소희는 자신을 배신했지만 절친 박효신은 자신의 일 처럼 두 발 벗고 나서주니 말이다, 그동안 박효신이 없었다면 민지훈은 얼마나 더 비참해졌을지 모른다.
  • “헤어진 것도 나쁘진 않아, 이제 헤어졌으니 돈 모을 필요도 없잖아, 오늘 저녁에 우리 이 오만원 가지고 나가서 맛있는 거 사먹을까? 내가 쏠게!”
  • 민지훈이 웃픈 표정으로 애써 웃으며 말했다.
  • “그래서 그 자식들을 그냥 놔 두겠다고?”
  • 여전히 분노가 가시지 않았는지 씩씩 거리는 박효신.
  • 민지훈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 “아니, 걔들 나중에 반드시 후회한다! 그래도 이미 헤어진 이상 오늘 저녁엔 이별 축하파티라도 할 겸 나가서 맛있는 거 먹자, 내가 쏜다!”
  • 상처받은 민지훈이 내심 걱정이 된 박효신은 일단 그의 요구에 응했다.
  • “그래, 그럼, 나한테 여윳돈이 좀 있으니까 먼저 가져다 써, 저녁에 내가 애들 불러 모을게, 같이 모이자!”
  • 박효신의 적극적인 모습에 민지훈은 크게 감동을 먹었고 한 숨을 길게 내 쉰 뒤 전화할 일이 있어 휴대폰을 꺼내들었지만 마침 그 절묘한 타이밍에 휴대폰 벨소리가 먼저 울렸다.
  • “둘째 도련님, 김병규입니다, 오늘 마침 근처에 미팅이 있어서...”
  •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민지훈의 얼굴에는 미소가 띠었다, 김병규는 아버지의 무한 신뢰를 받는 비서인데 오랫 일한 만큼 민 씨 집안에서 지위가 꽤 높았다. 게다가 민지훈이 어릴 때부터 믿고 따르던 삼촌 같은 존재라서 두 사람 사이는 각별했다, 그런 김병규가 학교 근처에 있다니 민지훈은 너무 기뻤다!
  • “둘 째 도련님, 준비하고 계십시오, 제가 금방 모시러 가겠습니다...”
  • 듣던 중 반가운 소식에 잔뜩 신이난 민지훈은 냉큼 침대에서 내려와 어린 애처럼 퐁당퐁당 뛰어갔다.
  • 누가 부르기라도 한 듯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가는 민지훈을 보며 어리둥절해진 박효신이 다급히 물었다.
  • “지훈아, 너 어디가? 애들 곧 올텐데!”
  • “나 나갔다 올 테니까 애들 먼저 더블유 가 있으라 그래, 나 금방 갈테니까...”
  • “더블유?”
  • 박효신은 순간 깜짝 놀랐다, 더블유라면 학교 근처 가장 고급진 프리미엄 레스토랑인데? 소문에 의하면 밥 한끼에 오십 만원도 넘게 나온다고 하던데? 그런데 민지훈이 거길 가려 한다고? 그래, 괜찮아, 사랑하는 여자한테 배신을 당해서 마음도 못 추스르고 있는 녀석인데, 비싼 밥 사주면 좀 어때서? 다음달에 굶는 한이 있더라도 친구가 행복해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