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윤소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고 잔뜩 오버하는 표정으로 민지훈을 째려보며 콧 방귀를 뀌었다.
“대체 그 놈의 잘난 척은 언제까지 할 셈이야? 진짜 뭘 믿고 그러냐? 너 돈 한 푼 없는 거지인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밥 사먹을 돈도 없는 가난뱅이 주제에 어디서 유세야? 내가 원하는 삶 넌 죽었다 깨어나도 나한테 못 줘. 아마 내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를걸? 하긴...인생 자체가 시궁창인 네가 뭘 알겠냐?”
화가 머리끝까지 난 민지훈은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고 곧 뚜껑이 열릴 것만 같았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꺼져, 어디 가서 나 안다는 얘기도 하지마...”
있는 정 없는 정 다 떨어지게 만드는 윤소희, 뻔뻔하고 당당한 얼굴로 교문 밖을 가리키며 민지훈에게 호통을 친다.
곧이어 최영도가 거들먹거리며 걸어오더니 동네 양아치인 양 민지훈의 얼굴을 찰싹찰싹 두드리더니 목소리를 한껏 내리깔고 조소하듯 말했다.
“왜? 억울해? 억울해도 소용없어, 그러게 누가 가난하래? 그러니까 왜 돈이 없냐고? 세상은 말이야, 돈 있는 자들이 움직이는 대로 돌아가는 법이거든, 그거 알아? 난 오늘밤 저 여자랑 신나게 놀아날 수 있어, 왜냐? 난 돈이 있으니까. 넌 없잖아?”
민지훈은 최영도를 노려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게 노려 본다고 뭐가 달라지나?”
최영도가 하하 큰 소리를 내고 웃으며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한껏 목청을 높여 말했다.
“어이, 민지훈이, 낯빛이 너무 어둡다? 몇 끼 굶은 사람같아, 밥은 먹고 다니냐? 그래, 내가 자비를 베풀 테니 무릎 꿇고 큰 절 세 번만 해봐, 그러면 식권 몇 장 던져줄게, 어때?”
이미 마음의 상처가 깊을 대로 깊어진 민지훈은 모든걸 단념한 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필요 없거든요!”
“오빠, 가요...”
민지훈의 축 늘어진 꼬락서니를 한시라도 더 보고싶지 않은 윤소희는 최영도의 손을 잡고 교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마치 경기에서 이긴 사람처럼 시뚝해진 최영도는 민지훈 놀리기에 제대로 재미를 들였고 한 술 더 떠서 아예 학생들에게 광고를 해댔다.
“학생 여러분, 여기 좀 봐주세요, 이 분은 한국 대학교 학생인데 툭 털어봤자 먼지밖에 없는 빈 털터리랍니다! 밥 먹을 돈도 없는 놈이 감히 우리 과 원탑 미녀를 넘보지 말입니다, 이런 놈을 두고 지 주제도 모른다고 하죠?”
지나가던 학생들의 시선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민지훈한테 쏠렸고 하나같이 시답잖은 시선으로 지훈을 벌레보듯 쳐다봤다.
“한국대 애들 낯짝이 원래 저렇게 두꺼웠나?”
“돈도 없으면서 무슨 연애를 한다고? 넘 볼 걸 넘봐야지, 참 나...”
“내 말이, 생긴 것도 딱 기생 오라비처럼 생겨 가지고, 주제를 모르네, 우리 윤소희 여신님께서 어떻게 저런 놈이랑 사길리가 없지.”
잔뜩 신이 난 최영도가 윤소희를 품에 껴안은 채 깔깔 웃으며 말했다.
“자기야, 우리 오늘 밤에 재미있게 놀다 오자, 내가 돈 많은 애들 몇 몇 소개해 줄게, 그리고 시간이 늦으면 들어오지 말고 내가 좋은데 데려가줄게, 단 둘이 오붓한 시간 보내자...”
“아앙, 오빠도 참!”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버린 민지훈은 두 남녀의 하하호호 신나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마음은 깨진 유리 조각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내가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던 여자친구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모든 걸 다 내줄만큼 지켜주고 싶었던 그녀가 왜? 그녀를 위해 구 씨 집안과의 혼인 약속도 무산 시켜버렸건만, 고작 돈 때문에 다른 남자 품에 안겼다고?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생각할 수록 지독한 허탈감에 헛 웃음이 절로 나는 민지훈, 매일과 같이 보고 듣던 이 익숙한 세상이 점점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심한 소외감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민지훈인데 고작 돈, 개도 안 먹는 돈 앞에서 공든 탑이 무너지듯 와르르 무너져버린 내 사랑, 갖은 모욕과 모독까지 다 당하며 마지막 남은 자존심조차 무참히 짓밟혀 버렸다.
그 시각, 민지훈의 아픈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하늘에서는 비가 뚝뚝 내리기 시작했고 쏟아지는 비는 민지훈의 얼굴에 이따금씩 떨어졌다, 흥분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겨우 마음을 추스른 뒤에야 한국 대학교로 발걸음을 옮기는 민지훈.
기숙사에 돌아 온 민지훈은 저금통 안에 들어있던 꼬깃꼬깃 잔돈들을 끌어모았다.
천 원, 오 천원 가끔 가다 만 원짜리도 보인다... 그나마 제일 큰 금액이 만 원에 제일 적은 금액은 십 원짜리 동전들, 이 돈들을 다 끌어 모아봤자 오 만원도 안 됐다.
이 돈들은 민지훈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아글타글 모아 둔 것이다, 사실 오십 만원 정도 모았었지만 윤소희를 위한 여신절 선물 목걸이를 구매하느라 사십 만원을 썼고 꽃 다발 오만원까지 쓰다보니 지금 남은 전 재산이라곤 저금통에 남은 동전 몇 잎에 꼬장꼬장 지폐 다 합해봐야 오만원이다.
그 때 기숙사 문이 열리더니 룸메이트인 박효신이 들어왔다.
“지훈아, 너 소희랑 헤어졌다며?”
민지훈은 고개를 푹 떨군 채 힘없이 끄덕였고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한국 대학교와 한국외대가 서로 가까이 있다보니 한국외대에서 터진 이슈는 지금쯤 이미 한국 대학교 캠퍼스 전체에 퍼질대로 다 퍼졌을 것이다, 그러니 박효신이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에 대해 민지훈은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나 걔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넌 한 푼이라도 아끼겠다고 하루 한 끼만 먹어가며 소희한테 옷이며 화장품이며 다 사줬는데, 걔는 속물같이 이제 와서 돈 많은 놈한테 들러붙어서 널 엿먹이잖아! 사람을 얕봐도 유분수지! 바람 피운 년 놈들 내 절대 가만 안 둬!”
“하지마!”
민지훈은 긴 한숨을 내쉬며 흥분한 박효신을 막아섰다.
“하지마? 야, 민지훈, 너 바보냐?”
민지훈의 말에 박효신은 더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돈 사십 만원 정도 쓴 거?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게다가 사십 만원에 한 사람의 진짜 모습을 철저하게 알았으니 그걸로 충분해, 어쩌면 나한텐 좋은 일이야!”
화가 잔뜩 나서 펄쩍 뛰는 박효신한테 민지훈은 무척 차분하게 말했다.
“민지훈, 너...”
박효신은 주먹을 불끈 쥐고 사나운 눈초리로 민지훈을 노려보았다.
민지훈은 체념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크게 위안을 받았다, 사랑하는 여자 윤소희는 자신을 배신했지만 절친 박효신은 자신의 일 처럼 두 발 벗고 나서주니 말이다, 그동안 박효신이 없었다면 민지훈은 얼마나 더 비참해졌을지 모른다.
“헤어진 것도 나쁘진 않아, 이제 헤어졌으니 돈 모을 필요도 없잖아, 오늘 저녁에 우리 이 오만원 가지고 나가서 맛있는 거 사먹을까? 내가 쏠게!”
민지훈이 웃픈 표정으로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그 자식들을 그냥 놔 두겠다고?”
여전히 분노가 가시지 않았는지 씩씩 거리는 박효신.
민지훈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니, 걔들 나중에 반드시 후회한다! 그래도 이미 헤어진 이상 오늘 저녁엔 이별 축하파티라도 할 겸 나가서 맛있는 거 먹자, 내가 쏜다!”
상처받은 민지훈이 내심 걱정이 된 박효신은 일단 그의 요구에 응했다.
“그래, 그럼, 나한테 여윳돈이 좀 있으니까 먼저 가져다 써, 저녁에 내가 애들 불러 모을게, 같이 모이자!”
박효신의 적극적인 모습에 민지훈은 크게 감동을 먹었고 한 숨을 길게 내 쉰 뒤 전화할 일이 있어 휴대폰을 꺼내들었지만 마침 그 절묘한 타이밍에 휴대폰 벨소리가 먼저 울렸다.
“둘째 도련님, 김병규입니다, 오늘 마침 근처에 미팅이 있어서...”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민지훈의 얼굴에는 미소가 띠었다, 김병규는 아버지의 무한 신뢰를 받는 비서인데 오랫 일한 만큼 민 씨 집안에서 지위가 꽤 높았다. 게다가 민지훈이 어릴 때부터 믿고 따르던 삼촌 같은 존재라서 두 사람 사이는 각별했다, 그런 김병규가 학교 근처에 있다니 민지훈은 너무 기뻤다!
“둘 째 도련님, 준비하고 계십시오, 제가 금방 모시러 가겠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에 잔뜩 신이난 민지훈은 냉큼 침대에서 내려와 어린 애처럼 퐁당퐁당 뛰어갔다.
누가 부르기라도 한 듯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가는 민지훈을 보며 어리둥절해진 박효신이 다급히 물었다.
“지훈아, 너 어디가? 애들 곧 올텐데!”
“나 나갔다 올 테니까 애들 먼저 더블유 가 있으라 그래, 나 금방 갈테니까...”
“더블유?”
박효신은 순간 깜짝 놀랐다, 더블유라면 학교 근처 가장 고급진 프리미엄 레스토랑인데? 소문에 의하면 밥 한끼에 오십 만원도 넘게 나온다고 하던데? 그런데 민지훈이 거길 가려 한다고? 그래, 괜찮아, 사랑하는 여자한테 배신을 당해서 마음도 못 추스르고 있는 녀석인데, 비싼 밥 사주면 좀 어때서? 다음달에 굶는 한이 있더라도 친구가 행복해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