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무열은 살면서 TV 안의 왕을 본 적이 있었으나 그가 직접 왕이 되어보니 뭇사람이 자신을 우러러볼 땐, 남자의 야심과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천하는 내가 가질 거야! 폭군이든, 혼군이든 상관없어. 내가 꿀리는 대로 할 거야!’
“전하, 관중 일대에 심한 가뭄으로 풀 한 포기 자라지 않고 백 리에 새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고 하옵니다. 백성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없으니 전하께서 속히 결정을 내리셔야 하옵니다!”
붉은색 옷을 입은 늙은이가 옥 지팡이를 짚고 나와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외쳤다.
‘자연재해가 이토록 심각하면 큰일이야!’
그는 왕의 위엄있는 말투로 말했다.
“휼민(恤民)하여라, 백성을 구휼하여라! 호조 판서, 더 큰 흉년을 맞이하기 전에 즉시 고성통폐(고성국의 화폐)와 식량을 나누어 관중 일대를 지원하여라.”
그 말에 조정의 신하들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조정에 돈이 남아 있던가?
흰 수염을 기른 한 삐쩍 마른 노인이 신하들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가늘고 긴 두 눈을 가졌는데 속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었다. 그 노인이 바로 호조 판서 안중원이자 안귀인의 아버지였으며 조중 권신(权臣)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난처한 어조로 말했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국고의 고성통폐가 바닥났사옵니다. 지난해 용천신궁을 건조하였고 이번 해는 고성궁 후원을 수선하여 국고가 거의 텅 비어버렸사옵니다. 현재 국고에 남은 원결은 오십만 냥 뿐이옵니다. 이 정도로는 구휼은 고사하고 조정의 지출을 충당하기도 넉넉지 않사옵니다.”
‘오십만 냥?’
진무열은 경악했다. 그의 기억 속 고성국은 땅이 넓고 물산이 풍부하여 주변국을 아울러 흥하던 국가였는데 어떻게 국고에 오십만 냥밖에 없는 걸까?
그가 유일하게 떠올릴 수 있는 이유라곤 신하 중 탐관이 있어 사사로이 돈을 먹어버렸다는 것뿐이었다.
“당장 장부를 가져오거라. 과인이 살펴봐야겠다!”
그의 어조는 불만스러웠다. 안중원의 표정이 굳어지며 의문이 생겨났다. 왜 왕께서 오늘 갑자기 장부를 보려 하는 걸까?
하지만 그는 조금도 긴장하는 기색 없이 즉시 장부를 꺼내오도록 명령을 내렸다.
얼마 후, 장부가 진무열의 손에 들려졌고 한참 장부를 들여보던 그의 안색이 흐려지며 탄식했다.
알고 보니 몸의 주인이 정말로 국고의 돈을 써버렸다. 멀쩡한 궁을 두고 기어코 용천신궁을 만들어 걸핏하면 안귀인를 데리고 이곳저곳으로 놀러 다녔는데 매번 거액의 지출을 동반했다.
하지만 진무열은 고성국이 엄청나게 강성하여 몸 주인이 아무리 흥청망청 쓴다고 한들 국고가 바닥날 정도가 되긴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말은 즉, 궁궐 안에 썩은 벌레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탐관오리를 조사하기엔 아직 너무 일러. 난 아직 제대로 발을 붙이고 서지도 못했어. 조정 안의 세력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으니 섣불리 행동하면 오히려 화를 입을 거야.’
그는 속으로 생각하다가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즉시 용천신궁의 건조를 멈추어라. 고성궁 후원과 석묘의 수선 작업도 전부 그만두어라! 그리고 매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매각하여 고성통폐로 바꿔 구휼을 진행하여라!”
그의 말이 떨어지자 조중의 신하들이 두 귀를 의심했다. 조정은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 조용했다.
오늘 전하께서 왜 평소와 이토록 다르실까? 신궁 건조를 멈추고 백성을 구휼하라니, 예전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안중원의 노련하고 악랄한 두 눈이 번뜩이며 진무열을 의심스럽게 쳐다보았으나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전하, 현명하시옵니다! 백성들의 살길이 열렸사옵니다!”
붉은 관복을 입은 늙은 신하가 바닥에 꿇어앉아 눈물범벅이 되어 외쳤다. 그의 모습이 진무열의 마음을 흔들었고 그가 누구인지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신하가 바로 사대부의 곽자운이었다!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 누추한 집안의 늙은 신하로서 오롯이 백성을 위하는 마음뿐으로 살며 줄곧 왕을 찾아 백성을 구휼하려 했으나 몸 주인이 여색에 빠져 그를 만나주지 않았을뿐더러 그에게 태형까지 내렸었다.
진무열이 후회하며 나지막이 얘기했다.
“좋다. 이 자는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갸륵하여 등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느니라.”
바로 이때, 안중원이 슬그머니 자기 측근에 있는 신하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신하가 뜻을 알아채고 얼른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전하, 소신이 상소를 올리고 싶나이다.”
“말해 보아라.”
진무열이 주저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검남 도창산 일대에 마적이 판을 치고 다니며 나날이 그 세력이 커지고 있사옵니다. 오늘날 이미 1만여 명으로 확장되어 곳곳에서 살인과 강도질을 일삼아 백성과 상인이 멀리 피하고 있사옵니다. 만약 조정에서 발병(出兵)하지 않으면 훗날 엄청난 재앙을 불러들일 수 있사옵니다!”
그 말을 들으니 진무열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고성국은 대체 왜 이렇게 많은 사건과 사고가 있는 걸까? 천재가 들이닥쳤다 하더니 이젠 마적이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건 좋은 징조가 아님은 틀림없었다!
“발병하여라!”
그가 과감하게 명령하며 장군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을 훑었다.
“누가 갈 것이냐?”
뭇 장군들이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누가 감히 나서서 쟁취할 수 있을까? 이는 이미 안씨 가문이 예정한 일과 다름없었다. 그때 한 문관이 얼른 나서서 제안했다.
“전하, 소신은 안명, 안장군께서 가시는 것이 타당하다 생각되옵니다!”
“맞습니다. 안장군은 용맹하고 전투에 능해 마적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사옵니다.”
“안장군은 온 마음을 다해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며 또한 금오위의 대장군으로서 병법에 통달하여 도창산의 난을 평정하기에 적합한 인물이옵니다!”
“…”
진무열이 싸늘하게 눈앞의 광경을 지켜봤다.
‘오호라, 조정안 절반이 넘는 신하가 모조리 안씨 가문의 장자 안명을 지지하고 있는 것을 보니 한패가 틀림없구나.’
많은 장군이 감히 나와 그들과 경쟁하지 못했다.
‘안씨 일가의 세력이 대체 얼마나 큰 걸까? 호조 판서, 장군, 귀인가 모두 한 가문에서 나왔어.’
진무열은 고대에 이런 식으로 권력이 기울여져 조정이 난잡해진 경우는 수두룩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 장군들은 나서고 싶은 생각이 없단 말인가?”
그가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물었다. 그냥 묻는 말처럼 들리지만 실은 타협하고 싶지 않은 물음이었다.
뭇 장군들이 서로 얼굴만 바라볼 뿐, 나서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들 대부분은 안씨 가문과 사이가 좋았으며 일부 장군만이 안씨 가문과 서로 합이 맞지 않았으나 나선다고 달라지는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하, 다들 다른 의견이 없으니 소신이 보기엔 안명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책봉하여 전군을 통솔해 마적을 무찌르게 하는 것이 어떻사옵니까?”
청색 관복을 입은 행동거지가 기품있는 노인이 점잖게 웃으며 앞으로 나와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진무열은 머리가 펑 터지는 기분이었다!
이 노인의 이름은 이종서였고 고성국의 영의정이었다. 그마저 안씨 가문과 한패란 말인가?
‘제기랄, 이건 미쳤어!’
동시에 검은 갑옷을 입은 젊은 장군이 앞으로 나왔는데 그가 바로 안명이었다.
“전하, 소신이 반드시 전하의 걱정을 덜어드리겠사옵니다. 7일 내로 도창산 일대의 마적을 모조리 뿌리 뽑겠나이다!”
“안장군의 기개가 대단하옵니다! 소신이 상소를 올리오니 안장군을 마적 토벌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소신도 같은 생각이옵니다!”
“…”
누군가 먼저 나서서 무릎을 꿇으며 진무열에게 안명을 마적 토벌의 총사령관으로 책봉하라 요구했다. 마치 진무열이 그리하지 않으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진무열은 속에서 분노가 들끓는 것을 느꼈다. 이는 명백히 그에게 안명을 책봉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었다!
총사령관이 함부로 책봉할 수 있는 자리었던가? 만약 그렇게 되면 모든 장군이 그의 지휘하에 있게 되는데 그 권력이 대체 얼마나 커진단 말인가?
게다가 반대하는 신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진무열의 기억 속 몸 주인은 너무 막돼먹어 주색에 빠진 채 안씨 가문을 맹신하여 이런 국면을 만들었다.
진무열이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며 조정을 훑어보다 기골이 장대한 한 중년 장군을 보자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가 바로 서문이었다. 그는 낙정 좌태파의 대장군이자 서숙의의 친오빠였으며 충심이 갸륵하였다!
하지만 그 역시 서숙의과 마찬가지로 안씨 가문이 권력을 함부로 확대하는 것에 불만을 품어 그들의 눈 밖에 나게 되어 대접을 받지 못한 채 밀려난 처지였다.
언젠가 진무열이 서숙의를 죽도록 때린 후, 화를 누를 수 없었던 서문이 욕을 몇 마디 한 것이 진무열의 귀에 들어가 태형 100대를 맞고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었다.
그러므로 서문은 왕의 신하로 살고 있으나 그 속은 왕과 한없이 멀었다.
이때, 진무열은 커다란 위기감을 느꼈다. 권신이 횡포하고 충신이 멀리하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닐까?